제89화
그리고 결국.
나는 짭계수 앞에 도달해 네 구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부 상체가 없고, 하체만 남아 있었다.
잔혹한 모습에 잠시 방송 화면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시신을 다시 수습했다.
그동안 채팅 방은 여러 의견으로 갑론을박이다.
-왜 다른 팀들이 저기서 전부 당했는지 알 것 같아. 그냥 많다. 몹이 그냥 미치게 많은 거였어.
-근데 그걸 전부 다 학살한 거 레알 실화냐?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 펀치!
-엄지척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그래. 시신 수습하는 동안 이렇게 대화하는 시간을 즐기고 계시는구먼.
조금은… 힘이 나는군.
이 시신들도 내가 이곳을 클리어하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척량. 고양이가 죽으면 어디로 가?’
[아까 보았던 노란 고양이 사진 때문이십니까?]
신경 쓰여서 말이지. 성좌가 되면 알 수 있을까?
[음… 모든 건 성좌가 된 뒤에 생각할 문제 같습니다.]
그런가.
-1따봉을 받았습니다!
-1따봉을 받았습니다!
-1따봉을 받았습니다!
-1따봉을 받았습니다!
…….
따봉도 미쳐 돌아가듯 올라가기 시작하는군.
이 던전의 위험성을 이제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몬스터가 어마 무시하게 많다.
헌터들의 마력은 회복이 더디고, 양도 결국 제한되어 있으니까.
특히나 저렙 때는 스킬 한두 개만 난사해도 지칠 수밖에 없다.
체력통과 마력통은 레벨 업을 하면서 증가하니까.
결국 다 된 건전지처럼 마력이 끊기는 순간 죽는 건 당연한 수순이랄까.
내가 들어오기 전에 앞선 두 팀이 잡아낸 몬스터들의 숫자까지 하면 이 던전 내부의 몬스터들 숫자는 거의 천여 마리에 가까울 수도.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주군.]
그래서, 주변에 감지되는 몬스터는 있어?
[더 이상의 적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행이군.
그러면 남은 건 저거뿐인가.
내가 강해져서 그런지, 지금까지 큰 위기는 오지 않았어.
[겉으로 보면 충분히 위기처럼 보입니다만.]
그래도 보스 방 앞까지 약속대로 화염 스킬 없이 통과했잖아?
시신을 수습하고, 다시 방송을 틀고.
“안녕하세요. 다들 화장실 잘 다녀오셨나요? 커피도 준비했고요? 방송 다시 시작합니다!”
-엄지 다시 뽀송해졌네.
-그렇게 잘생겨서 뭐 하려고 그래? 너 그러고 살다가 나중에 내 남편 된다.
“오우, 고맙습니다.”
방송이 여기까지 무르익으니 안티 댓은 확실히 줄었군.
아니면 지금 상황에서 내 멘탈을 흔들어 봐야 별반 소용이 없고, 팬덤도 흔들어 봐야 공고해지기만 할 뿐이라는 걸 깨달은 건가?
과연 인간은 학습할 수 있는 존재야.
[주군, 그냥 방송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음, 그런가?
[헌터가 매력적이지 않으면 팬덤도 뭉치지 않습니다. 이러나저러나 냉혹한 곳이다 보니 결국은 기본 콘텐츠가 알차야 가능하거든요.]
한마디로 결국 헌터가 기본 실력이 있어야 잔재주도 막을 힘이 있다 이런 건가.
뭐, 정론이긴 하네.
왠지 교과서를 바탕으로 국영수 중심으로 공부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짭계수 앞에 서니 그 아래에는 뿌리로 이루어진 동굴이 보인다.
“음, 딱 봐도 이건 보스 룸이죠?”
-엄지야, 진짜 들어갈 거야?
-안 들어가면 어쩔 건데. 여기서 살 수도 없잖아.
-이제 보스 앞이니까 불 마법 쓰자. 위에 약속했던 것도 지켰으니까, 응?
다들 걱정스러운 마음에 채팅이 우르르 올라왔다.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엄지 죽냐?
음. 안티들이 간 줄 알았는데 일부는 살아 있군.
그것도 내가 못 볼까 싶어서 꼭 보라고 복붙으로 도배하는 거 봐라.
팬들이 신고를 하자며 챗창을 올렸고, 누군가는 정화하기 위해 응원들로 도배를 시작했다.
한순간이라도 내 새끼가 악플을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 하지만 괜찮아.
고작 이런 글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죽을 내가 아니니까.
거기다가 이곳은 [죽음을 거부하는 자]의 신전처럼 보스가 튀어나오지는 않는 걸 보니 제법 예의를 갖추었어. 유교 출신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포털이 위웅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게 아닌가.
헌데 그 색이 조금 다른 것이 이상하네?
본래면 새카만 시궁창 색이어야 하는데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는 게 아닌가.
-노멀 클리어다! 이거 노멀 클리어 포털이야!
-그게 뭔데?
이미 알아보는 사람, 헌터 라이브는 처음이라 모르는 사람이 섞여 있군.
이럴 때는 정리해 주는 게 좋겠지?
“자 여러분, 드디어 모든 몬스터를 처치했습니다. 헌터 라이브 방송을 자주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던전에 따라 보스를 제외한 모든 몬스터를 잡으면 그것만으로도 노멀 클리어로 인정해서 나가게 해주는 던전이 존재합니다.”
-헐, 엄지 나갈 수 있는 거야?!
-엄지 살았어!!!!!!!!!!!!!!!!!!!!!!!!!!
-乃乃乃乃乃乃乃乃엄지 클리어 ㅊㅊㅊㅊㅊㅊㅊ乃乃乃乃乃乃乃乃
내 새끼가 살았다는 사실에 채팅 방이 도배된다.
이 기분 알지.
나도 한때 헌터 라이브를 열심히 본 적이 있으니까.
사람이란 게 그러지 않던가.
굳이 서포터즈까지 가입할 정도로 딥하게 파는 게 아니더라도 마음은 같지 않던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헌터가 살아 돌아간다는 것에 대한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으음~ 하지만 아깝긴 하네요. 이왕 하는 김에 보스 몬스터까지 잡고 갈까 싶기도 하고?”
노멀 클리어 포털.
저 붉은 포털은 아직 완전히 오픈된 게 아니다.
저 포털에 내가 손을 가져다 대면, 색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그제야 외부와 완전히 연결되지.
그게 바로 노멀 클리어의 정체.
이때 보스는 던전이 리셋되기 전까지는 다시 잡을 수 없다.
아마 밖으로 나가 재정비 후에 다시 보스를 잡는 걸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러니까 즉, 여기서 저 포털을 건드리지 않고 그냥 지나쳐서 보스를 잡으면 올 클리어가 된다는 말씀.
-오옹. 솔로 보스 레이드를 진짜 보는 거냐?
↳얘 뭐래냐? 엄지는 이미 예전에 솔로 보스 레이드 했음요. 트윈 헤드 놀 잡았음요?
↳고건 몰랐네. 지송. 제가 뉴비라…….
↳ 알았으면 됐고.
-그나저나 엄지가 강한 건 아는데, 특수 던전 보스도 잡을 수 있을까? 에바 아냐?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엄지라면 쌉 가능!
-그냥 돌아가자. 이미 얻은 게 큰데 더 할 필요 없잖아?
걱정하는 사람들부터, 믿어 주는 사람들까지 다양하군. 호기심이 생긴 사람도 보이고 말이지.
그리고 제법 큰 금액이 한 건 나왔다.
-[방송족같이하네] 님이 1,000,000원을 후원했습니다.
[방송족같이하네] : 해 봐라. 하면 5,000만 원 + 완주까지 하면 5,000만 원 준다
↳ 님 혐생 엄지한테 풀면 행복해요?
↳22233334444444455555555555
-엄지야! ㄴㄴㄴㄴㄴ 하지 마!
-처치해버려! 특수 던전 솔로 보스 레이드 가즈아아!
역시나 돈이 꽂히니 채팅 창이 용트림을 하는군.
그래도 재미있어. 확실히 나 엿 되어 보라는 놈이 저렇게 면전에 보인다는 건 꽤나 신선한 감각이야.
아이디를 눌러 보니 만든 지 얼마 안 된 아이디네?
[주군, 보통 다른 팬덤에서 까질 하러 달려올 때는 이렇게 익명 아이디를 파는데 말입니다.]
음, 그런가?
[네. 자기 본진 욕먹이는 일이라는 거 본인도 아니까요. 그러니 철저하게 꼬리 자르기를 하죠. 그렇게 사용된 계정은 후일 적당한 때에 폭파시킴이 옳습니다.]
그동안 헌터 방송을 봤을 때는 그냥 욕하는 애가 있구나, 하고 라이브를 봤었는데 이런 세계가 있군.
[네. 손자병법 제13 용간(用間)에서도 말하였습니다. 사용한 첩자는 적이 알기 전에 반드시 처리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처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죽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
……계정을 폭파한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 [방송족같이하네]는 일이 끝난 후에 계정을 폭파하여 잠수를 탈 것입니다. 그리고 본진으로 돌아가겠지요.]
그렇군.
과연 척량이야. 심계가 깊어.
어쨌거나 척량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1. 저놈은 원래 저러고 사는 놈이 아니라는 것.
2. 본진은 따로 있을 거라는 것.
3. 나를 죽이는 게 목적이며 내가 죽고 나면 즉시 저 계정은 폭파된다는 것.
이 정도인가. 과연 대단하군.
[허나 손자께서 다른 의미로도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장수일수록 적의 식량을 뺏어오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故智將務食於敵). 그러니 상대의 후원금을 찬탈하는 것은 적의 군량미를 뺏어오는 일. 즉.]
척량이 꼬리를 부채처럼 파앗 펼쳤다.
[무릇 지장(智將)으로서 마땅히 이루어야 할 덕이오니! 적의 군자금을 거덜 내 버립시다.]
오냐. 일억 원 잘 먹을게.
“오오! 그렇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는데 감사합니다! [방송족같이하네] 님!”
-보스, 변이된 세계수의 가지 한 조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오더니,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고.
“우와…….”
[예상외입니다, 주군.]
그러게. 이걸 레벨 20 미만 6인 파티로 클리어해 보라고?
돌았나?
깰 수 없는 던전은 없다, 클리어가 불가능한 던전은 없다.
그것은 이 세계를 지탱하는 어떠한 공식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몬스터들과 말도 안 되는 보스 몬스터.
아무리 난이도가 최상급이라고 해도 이걸 클리어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최소한 미리 공략법을 알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건 알겠어. 이건 모두가 지혜를 짜내서 적합한 역할들로 파티를 맞춰서 가야 해. 그래도 거의 클리어가 불가능할 거야.’
그리고 기업의 이득 앞에서는 좀처럼 공략법을 풀지 않는, 군수+미디어+에너지 삼위일체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더욱 불가능한 이야기일 터.
쿠그그긍!
땅이 갈라진다. 동굴이라 생각했던 그것은 사실 입이었다.
그 위로 뿌리가 갈라지며 눈구멍이 생기고, 지면 한쪽에서 뿌리로 이루어진 손이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 놈은 지면을 박살 내며 그대로 땅 위로 몸을 일으켰다.
“모노 바이크G 소환!”
마구 흩어지는 지면 위를 바이크를 탄 채로 질주!
[주군! 그림은 좋습니다! 바이크 위에서 주군의 흑발이 멋지게 흩날리고 있어요!]
그래? 따봉 벌이 좀 되려나?
목숨값으로 보여 주는 그림인데 말이야.
[신나 보이십니다.]
그래. 미친 것 같지만 이쯤 되니 재미있어.
옛날에 이런 종류의 게임이 있었거든? 옛날 생각 나네~ 그래도 그 게임은 목숨을 세 개 줬는데 말이야. 왜 난 하나밖에 없는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