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똑딱, 똑딱, 똑딱.
어떤 이능은 사람의 정신을 오염시킨다.
단순히 고양감이나 절망감, 우울감을 넘어서 사람의 이성 그 자체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사내의 머리 뒤에는 후광처럼 톱니들의 환영이 돌아가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톱니 사이로 숫자가 올라갔다가 사라지고, 또 어떤 톱니바퀴는 홀로 다른 속도로 돌기도 했다.
그저 바라만 보더라도 정신이 돌 것 같은 기괴한 후광을 지고, 청년은 한 걸음 내디뎠다.
철벅-
최고급 구두 아래로 핏물이 흘러 내려간다.
그의 주변에는 수백 명의 시신이 조각나서 쓰러져 있었고, 주변은 산산조각 난 폐공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찰칵-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에서 그가 들고 있는 건 손바닥만 한 잭나이프.
이런 시대에 와서는 호신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날을 지닌 단검이다.
단검을 도로 넣고는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줍는다.
렌즈에 핏물이 배어났으나 한번 털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능력을 해제했다.
기괴하게 꿈틀거리던 톱니바퀴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철벅-
그는 발아래 핏물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갔다.
어차피 이 풍경 역시 그가 만들어 낸 풍경이 아니던가.
이제 와서 시체의 산을 보고 정신이 나가기에는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왔기에.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다가간다.
그곳에는 백금으로 만들어진 큐브가 지표면에서 조금 높게 떠 있었다.
중력을 잊어버린 듯 떠있는 그것은 일견 성스러워 보이기도, 일견 모독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 시간대에 이 장소에 아직 골든 큐브가 남아 있어 다행이군.”
큐브의 겉면에는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통 하나가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거대했고, 또 강력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두 손을 뻗어 큐브를 들어 올리고 겉면을 잡고 마력을 흘려 넣자 큐브의 모서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스스로 열려 흡사 종이 도면처럼 변한다.
3차원이 2차원으로 돌아가며, 마침내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붉은색의 보석.
표면은 갓 뽑아낸 사람의 피와 닮았고, 그 안의 오래된 핏방울이 굳어져 만든 것 같은 흉물스러운 보석은 스스로 발광하며 큐브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빛나는 부등변다면체를 여기서 회수했으니, 하나의 재앙은 막은 셈인가.”
어떠한 것은 사람을 끌어당기고 광기로 이끌었다.
이 폐공장에 모여 있던 자들도 그랬다.
처음에는 각성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모여들었다가, 차츰 침식당하게 되고.
후에는 같은 말을 지껄이며 이계의 성좌를 불러들이고 싶어 했지.
거기까지 가기에는 아직 인류는 멀었다.
아직 인류는 그저 빙산 위의 북극곰과 같아서,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단계가 아니던가.
그는 그 기괴한 보석을 잡는다.
우우웅-
기묘한 소리가 울렸다. 아기의 심장 소리와도 닮은 맥박.
그것은 이계의 목소리를 전했다.
할 수 있다면 그곳으로.
그것은 기묘한 망향(望鄕).
간 적도 없는 곳을 그리워하는 공허한 향수병.
여기서 미쳐 버린다면 그는 새로운 골든 큐브가 되겠지.
3차원이 되었다가 2차원이 되어버린 그 껍데기처럼.
한없이 성스러웠으나 한편 모독적인 광기가 느껴졌던 백금의 껍질은 이 광증을 이겨내지 못한 각성자의 뼈와 살과 마력으로 만들어졌으니.
빠각-
기묘한 톱니를 꺼낼 것도 없이.
마침내 붉은 보석은 빛의 입자로 변해 그의 손등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곧이어 골든 큐브라고 불렀던 물건도 역시 입자로 변해 그의 손등에 흡수되었다.
“후우. 몇 번을 뒤로 걸어도 이건 힘들군.”
이계의 광증이란 흡사 계몽과도 같다.
이미 알아버린 것을 모른다 할 수 없듯, 그저 안 만큼 축적되어 간다.
인간 형태의 신들을 만나면 좋으나, 그게 아닌 성좌들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광기에 물드는 이가 한둘이 아니니.
이것만은 아무리 ‘뒤로 걸은들’ 광증이 나아지지 않는다.
단순히 뇌의 호르몬 불균형 같은 게 아니니까.
이것은 계몽(啓蒙)이니까.
어떤 ‘지식’은 그저 안다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되어 정신을 헤집는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오지 못하게 되지.
그 모든 일이 끝나자, 정지한은 미련 없이 그 장소에서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우우웅-
벨 진동음이 울린다. 그가 폰을 들었다.
[엄지척-104]
그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 전화받았습니다.”
사무적인 목소리.
도레미파솔의 ‘솔’ 음 정도의 적당히 경쾌하고, 적당히 무난하며, 적당히 거리감을 주는 톤이다.
그는 어깨로 전화기를 받고 손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사무적인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지금 업무 중이신가 봐요?
“네. 약간 일이 생겨 외유 중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스킬을 써서 방금의 참상에 결계를 친다.
공기를 차단하고, 그곳에 화염석 아이템을 밀어 넣었다.
-그게, 여의도에서 생긴 레벨 제한 던전 보셨죠?
“예. 알고 있습니다. 얼마 후면 터질 것 같습니다만…….”
밀폐된 곳에서 화염석이 산소를 먹으며 자작하게 타오른다.
-…….
수화기 너머로 엄지척의 한숨 소리가 울린다.
뭔가 말을 꺼내기 망설이는 모양.
여의도 사태에 대해 정지한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저게 터지고 난 후, 지역 전체가 날아갔으니까.’
식물형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도, 이후 주변에 이계의 식물이 이상 증식하며 여의도는 결국 포기하게 되었으니까.
언론에서는 이렇게 떠들어 댈 것이다.
던전 브레이크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잘 ‘관리’할 수 있다.
그렇게 방송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다.
전문가란 작자들도 와서 그저 종양이 하나 더 생긴 것뿐이다, 시기를 기다려 20레벨 이하의 괜찮은 각성자가 생긴다면 그 사람이 클리어해 주기를 기다리면 되는 일이라며 입을 털었다.
하지만 그건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는 나비의 순진함이었고.
20레벨 정예 식물형 몬스터들이 그곳에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려 마침내 30레벨, 40레벨 정예급 식물형 몬스터들을 뱉어내며.
결계석의 균열은 커져만 가고. 인간은…….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울렸다.
-우선은 놀라지 마시고 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더 놀랄 일이 있는가.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것뿐이고, 일어날 멸망이 계속 다가오고 있는 것뿐이다.
튜토리얼의 세계 속에서 세상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뿐이니까.
-저 레벨이 아직……20이 안 됩니다. 어…… 그래서 제가…… 혼자서 들어가 볼까 하고요.
“…….”
정지한의 입술이 멈춘다.
이번만큼은 그도 영업용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20레벨이 안 된다?’
그는 수화기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엄지척-104]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집을 나가려던 참입니다. 바로 던전 가려고요.
“아, 그렇군요. 네. 지금 가겠습니다. 30분 정도 걸릴 테니,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어… 직접 오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닙니다. 일단… 엄지척 씨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예.”
정지한은 전화를 끊었다.
“언제나 제 예상을 뛰어넘으시는군요. 언제나…….”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순간 결계가 해제되며 갑자기 공기를 먹은 화염석이 크게 폭발했다.
콰과과과광!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저벅, 저벅, 저벅.
세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의 모습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그가 중얼거렸다.
‘104번째는 또 다른 건가.’
불탄 시체들이 엄지척의 시신들로 보인 것은 계몽(啓蒙)의 영향인 걸까.
어찌 되었건, 어떤 영사기도 한계가 있듯, 모든 필름이 반복될수록 망가지듯.
[되감기]도 이제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가 알고 있는 건 단 하나.
엄지척만이 ‘특이점’이라는 것.
* * *
최대한 빨리 던전에 가는 게 좋겠지.
그래서 장비는 여전히 장착한 상태로 기다렸더니 30분은커녕 15분 만에 초인종이 울렸다.
물론 척량이는 내 목에다가 감고 있다.
소환수라서 그런지 불편하지도 않다.
“어서 오세요.”
언제나와 같이 깔끔한 슈트를 입은 정지한이 안으로 들어온다.
왜인지 희미하게 피 냄새도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착각일까?
뭐, 착각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냐.
“무척 씨는 어디 가셨나 보군요.”
“네. 걔도 걔 일이 있으니까요.”
이놈은 수련하러 갔다.
정확히는 수없이 많은 고서들 속에서 혼돈의 문자를 먹이고 있는 중이겠지.
참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지금쯤 잔소리를 아주 폭풍처럼 들었어야 했을 테니 말이지.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성격이 너무 급하시군요. 어차피 던전 브레이크까지 시간은 하루에서 이틀 정도 남았을 텐데요?”
“뭐,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제 힘으로도 충분히 처리가 가능한데 그사이에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는 것도 좀…… 그렇죠?”
내 말에 그는 웃고 있을 뿐, 답을 하지 않는다.
뭔 생각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이 녀석.
“일단, 뭐라도 드시겠어요?”
나는 그를 거실에 앉히고 오렌지 주스를 꺼내서 따라 주고는 나도 앉았다.
“일단, 지척 씨께서 마음만 앞서시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이런 종류의 일은 이렇게 급히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해관계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런 것도 있습니다만……. 우선 지척 씨의 레벨이 20 미만이라는 점부터 논란거리죠.”
으음, 그 부분을 찔러 오는군.
“그래서 묻겠습니다만. 진짜 레벨은 몇이십니까?”
어쩐다.
[주군, 어느 정도는 밝혀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
“이걸 쓰겠습니다.”
정지한이 무언가를 품에서 꺼냈다.
고풍스러운 양피지로 되어 있고, 각 면마다 마법적인 느낌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게 딱 봐도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닌 거 같은데?
거기다가 안쪽에 있는 글은 또 한글이네. 이거.
훈민정음과 오컬트, 동서양의 화합이 이 괴랄한 양피지에서 일어난다.
“이게 뭐죠?”
“맹세의 계약서입니다. 저주받은 마법 물품이죠.”
“네?”
아니, 너는 무슨 남의 집 거실에서 저주받은 물건을 꺼내니?
먹은 주스 토해서 원래대로 빚어 놓으라고 할까 보다.
“맹약의 신이 직접 만든 물건으로, 이 계약서에 서로 사인하면 반드시 지켜지는 물건입니다. 이곳에 엄지척 씨가 허락하지 않는 한, 비밀을 지키겠다는 조건을 쓰겠습니다.”
“어기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길 수 없게 강제력이 생기는 물건입니다.”
“강제력이요?”
“예. 아예 해당 사항을 말하거나, 언급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입도 안 열리고 목소리도 안 나오죠. 여기서 더 강제로 하고자 하면 영혼마저 파괴됩니다.”
“대단하네요.”
계약의 신이란 놈. 보통 놈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