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계속해서 같은 구결에서 나는 떨어졌다.
그냥 바닥을 밟고 할 때는 그렇게 쉬웠건만, 장대 위에서는 고작해야 1미터를 못 걷고 쓰러지기를 수차례.
‘나 혹시 재능이 없나?’
체한 것처럼 명치가 무겁네.
‘그냥 스킬에 맡겨 버릴까. 고작 걷는 거잖아.’
헛짓 하는 건 아닐까. 그냥 귀한 시간을 날리고 있는 거라면.
나는…….
아아, 그래.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무공을 포기하는구나.
하지만 여기서 타협한다고 한들, 뒤가 있을까?
나는 극한의 관종이어야 했고, 흔한 스킬만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으니까.
그래. 앞으로 검법도 배워야 할 텐데 이게 보법보다 쉬울 것 같지는 않으니까.
‘해 보자.’
어차피 고생을 얼마큼 하든 트롤의 재생력이 나를 회복시켜 줘.
몬스터에게 당한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보법 하다가 떨어지는 상처 치료하는 것 정도는 마력도 별로 안 드니까.
그러니까.
다시 아득한 시간을 다시 반복한다.
계속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니까.
보통 노력한 수준으로는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우연이었을까.
장대 전체를 내 발이 묵직하게 눌렀다.
어떤 방식으로 무게를 전달했는지는 모르겠다.
장대의 중심감, 그 반탄력마저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척량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마지막 구결과 동시에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한 후였다.
“주군!”
“어, 됐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 느낌이 맞았네. 잊기 전에 한 번 더 해 봐야겠다.”
서둘러서 다시 반복하려는 내게 척량이 말했다.
“명상을 하십시오.”
“왜?”
“깨달음을 갈무리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깨달음? 무협 소설에 나오는 그런 거 말인가.
주인공이 무공을 쓰다가 뭔가 묘리를 깨닫게 되고, 그러고 나면 실력이 엄청 상승하곤 했다.
그래서 옛날이면 못 이길 적을 단숨에 처치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겪은 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었다.
“하셔야 합니다. 작은 깨달음도 큰 깨달음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니까요. 머릿속에서 정리하지도 않고 무작정 반복하면 아까의 감각을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이야기였다.
“알았어. 쉽게 말해 세상에는 큰 깨달음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사소한 깨달음도 있다는 거지?”
“네. 큰 깨달음이란 이런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성취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거구나. 그런 거였어.
척량 말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좌를 했다.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방금 내가 느꼈던 감각들을 하나하나 복기했다.
스킬에 의존하지 않고 보법을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지는군.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재산을 얻게 되었어.
바로 효율적으로 노력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
같은 3시간을 소비해도 10만큼 느는 사람이 있고 3밖에 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척량은 그렇게 10만큼 느는 법을 내게 전수해주고 있었다.
긴 명상 후, 눈을 떴을 때 다시 장대 위에 올라갔고. 두 번 정도의 시행착오 후에는 한 번도 장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보법의 기초가 완성된 셈이다.
-[건곤신행보]의 이해도가 1% 증가했습니다.
‘숙련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해도…….’
스쳐 지나가듯 본 적은 있지만 깊이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도 당연한가?
자동으로 알아서 발동하는 스킬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하나하나 뜯어서 연구하는 헌터가 몇이나 있겠나.
그렇게 차근차근 쌓아 가니…….
-[건곤신행보]의 이해도가 99.8%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아무리 연습을 해도 0.2%가 늘지 않았다.
척량이 말했다.
“주인님, 남은 0.2%는 나중에 올리고 지금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하죠.”
* * *
다음 날, 천장에 거대한 쇠공들을 달았다.
밧줄 대신 사슬로 지탱하고 있는데 특수 건물이라서 그런지 천장이 이 무게를 버티는 게 용했다.
나는 트레이닝 센터에 도착하자 우선 마보 자세를 취했다.
팔다리에 무거운 추를 달고 마보 자세를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무공은 단단한 하반신에서 나온다.’
탱커 정지벽이 레벨에 비해 그렇게 단단한 탱킹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극한까지 단련한 하체 덕분이니까.
-반복적인 운동으로 체력이 1 증가했습니다.
-반복적인 운동으로 근력이 1 증가했습니다.
-[건곤신공] 운공 보너스로 체력, 근력, 지구력이 1씩 증가합니다.
[건곤신공]
등급: 유니크 (성장형 F)
건기와 곤기를 다루어 신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일로정진한다. 내공심법이자 외공기공.
내공의 증가가 타 무공에 비해서 느린 대신 육체가 동시에 진화한다.
주의, 다른 무공 심법을 익혔을 시 스킬 습득 불가. 레벨 5 이상의 육체도 습득 불가.
가부좌를 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마보 자세를 유지하면서 건곤신공을 운공하는 게 가능하다.
워낙 무난한 무공.
그것도 육체 능력에 집중되어 있는 무공이다 보니 이런 방식의 운공도 숙련도가 오르는구나.
‘전투 중에 운공하는 것도 가능할까?’
그런 경지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가능하다면 사기일 것 같다.
적에게 검강을 줄기줄기 날리면서 동시에 내력도 축적할 수 있다는 거니까.
그렇게 팔다리가 끊어질 것처럼 버티기를 4시간.
한계에 다다른 나는 휴식을 취했다.
척량이 도시락을 입에 물고는 내 앞에 내려놨다.
“동생분께서 만드신 도시락입니다.”
“걔는 자기 수련이나 하지. 시간도 없을 텐데…….”
미안한 마음에 괜히 투덜거렸다.
“오늘 도시락은 오삼불고기 덮밥과 재첩된장국입니다. 계란말이랑 마요네즈 샐러드도 들어 있어요. 디저트는 과일 푸딩이네요. 직접 만들었나 봅니다.”
입에서 침이 고인다.
같이 살게 된 이후로 동생 녀석의 요리 솜씨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작은 도시락통도 들어 있어서 열어 보니 거기에는 척량을 위한 치킨 요리가 들어 있었다.
“와와와와! 주인님 동생은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동감이다.
갓튜브 요리 방송에 나오는 그런 화려함은 없어도 누구보다 맛있는 음식이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도로 덮었다.
“자, 잠깐. 이거 방송 찍을래. 먹방 인기 좋잖아.”
“이 틈에도 따봉을 버시다니! 주인님!”
‘아니, 사실은 동생 자랑하고 싶어서…….’
남들이 팔불출이라고 해도 좀 어때. 내 동생인 것을.
나는 다시 도시락을 보자기로 싸고는 방송 녹화를 틀었다.
“안녕하세요! 트레이닝 센터 점심시간입니다! 오늘은 도시락이네요. 뭐가 들었는지 한번 볼까요?”
점심시간을 그렇게 먹방으로 보냈다.
편집해 달라고 정지한에게 영상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한테 문자가 왔다.
[아, 형! 부끄럽게 그걸 찍으면 어떻게 해. 이럴 줄 알았으면 솜씨 좀 부릴걸.]
아니 뭐 이것만으로도 인기 좋을 것 같은데…… 유난은.
* * *
소화도 다 되었으니, 이제 점심 수련 시작인가.
벽에 있는 버튼을 작동하자 쇠공이 추가 되어 양옆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두 개라면 모를까 수십 개가 넘는 쇠공이 서로 다른 박자로 딱딱 움직이는 모습이 아주 장관일세그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목검 하나 들고 지나가야 한다는 거지? 한 대도 안 맞고?”
“맞으면 그것도 좋습니다. 외공 상승에 도움이 되니까요. 어디 한 군데 부러져도 트롤의 재생력으로 커버될 겁니다.”
허허허, 미치겠네.
현대인 기준으로 이건 수련이 아니라 자해다.
‘하지만 무공한테 그런 말 해봐야 의미가 없겠지.’
“외공 숙련도 잘 보셔야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안 오르면 전기를 흐르게 할 테니까요.”
“전기?”
“네. 그것도 익숙해지면 다음은 불타는 쇠공입니다!”
현대인의 교육 인권 감각으로는 미치게 이해가 안 가는군.
이게 자해 쇼가 아니라 수련이라니.
“스킬을 발동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나는 장대 위에서 보법을 펼치며 목검으로 쇠공을 쳐내…기보다는 태반을 맞아가며 하루를 보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척량이 ‘아…….’ 하고 말을 못 이었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척량도 그걸 부정하지는 않았다.
“원래 둔재가 나중에 대성하는 법입니다! 주인님!”
이렇게 나를 위로하는 걸 보면 말이지.
금방 끝날 줄 알았던 검술 기초조차도 장장 한 달이 지났다.
“요즘은 먹방튜브가 더 잘나가는 것 같다, 척량아.”
“아닙니다. 주인님! 동물튜브 쪽도 꽤 잘나가고 있어요!”
맛난 거+귀여운 거가 합쳐지니 시너지는 배가되었다.
-우리 엄지 위험한 거 하지 말고 그냥 계속 이렇게 먹방만 하면 안 될까?
-회사 점심시간 때 시청하면서 먹고 있습니다. 존잼乃
-지난번에 올려주신 반려 동물 케이크 레시피 잘 쓰고 있어요. 우리 집 개도 진짜 좋아하더라고요乃
이번 방송으로 남성층뿐만 아니라 3040 여성층도 엄청 증가하게 되었고.
그랬다.
이러다가 내 커리어가 바뀌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군.
“척량과 함께하는 존맛 런치! 오늘 점심은 짜잔~!”
척량이 주둥이로 도시락을 열었다.
달칵-
키양!
“참치! 세상에, 척량이가 가장 좋아하는 참치네요! 거기에 광어에, 연어에! 연어알도 있군요!”
회를 가득 쌓아 올린 회덮밥이다.
색색이 화려한 게 비주얼로도 일품이었다.
-우와, 벌써 입에 침 고인다.
-연어 광택 봐라…… 크으…….
-손도 많이 갈 텐데 꽃 모양으로 쌓아서 만들었네.
-덮밥 장식인 줄 알았는데 조개관자랑 생새우 맞죠?
“한 입 먹어보겠습니다!”
-어서어서!
-맛 평가도 꼭 하고!
-[존맛멍멍구리] 님이 1,000원을 후원했습니다.
[존맛멍멍구리] : 이번에도 반려동물용 레시피 알려주세요! 우리 집 개가 여기 레시피에는 사족을 못 써요!
그랬다.
동생 무척이는 요리사의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사람 음식도 기가 막히게 하지만 특히 반려동물용 음식에는 얘만 한 애가 없었다.
그것도 영양과 기호성을 모두 살린 그 레시피는 입 짧은 노견도 벌떡 일어나 먹을 만큼 대단했다.
“어, 오늘은 고양이용이긴 한데…….”
-[존맛냥냥구리] 님이 1,000원을 후원했습니다.
[존맛냥냥구리] : 아싸--!!!!!!
“……개도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일단 사람부터 먹고요.”
게 눈 감추듯 호쾌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밥알의 감촉과 연어회의 고소하고 탱글한 맛, 그걸 감싸는 초장의 매콤함까지 더해졌다.
“헛, 혀에서 연어가 춤을 춘다! 눈물 나도록 감동적인 맛이네요. 어흐흐흑!”
나는 과장되게 우는 척 소매로 눈가를 쓸었다.
“이번에는 우럭, 우럭 먹어 보겠습니다. 회덮밥으로 우럭! 크으, 생선살이 아주 꼬들꼬들하네요. 보이시죠?”
그러고는 싹싹 비빈 밥 위에 커다란 우럭 살점을 얹어서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아…… 오늘 점심은 회덮밥 해야겠다.
-22222222222.
-3333333333.
-4444444444444.
-난 이미 주문했음乃
-난 지금 먹으러 나감.
-부장님이 갑자기 회덮밥 먹자는 걸 보니까 나랑 같은 거 보는 듯乃乃乃
따봉과 함께 구독자들이 실시간으로 증가했다.
수련이 느려지는 동안 그나마 있는 위안거리다.
-[홍익횟집] 님이 10,000원을 후원했습니다.
[홍익횟집] : 이 계절에 회덮밥만 한 게 없죠!
그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신들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1,000따봉을 받았습니다!
보이냐, 무척아. 형 이러다 커리어 바뀌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