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같은 시간.
정지한은 형님들과 누님들에게 한참을 시달려야 했다.
‘클리어 불가로 여겨졌던 던전을 깼다.’
20레벨에 대한민국 누구도 깨지 못한 던전을 정지한이 소속된 팀이 클리어했다. 그것도 던전 그로잉 상태에서.
당장 내일 신문에 뜰 일이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직원들까지는 입단속이 됐지만 의료진들과 리무진을 부른 시점에서 이미 소문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불안한 거지. 할아버지가 과연 누구를 총애할지. 정하 그룹이 누구에게 넘어갈지.’
권력욕 덕지덕지 묻은 견제 전화는 그래도 익숙하다.
문제는 그다음.
정비가.
그녀의 전화.
-안녕. 두 번째 던전 그로잉이네? 이야, 운도 좋아~
빙글빙글 웃으며 덤벼드는 그녀를 막아 내는 건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 버겁다.
그녀는 권력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진리의 광신도이며 이면 세계에 미친 정키다.
그런 그녀에게서 비밀을 지키고 얻어낼 수 있는 걸 얻어내는 일이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전화를 끝낸 정지한은 카 시트에 몸을 깊이 파묻고는 생각에 잠겼다.
‘능력을 눈치챘겠군.’
던전 클리어 직후, 엄지척은 손목시계와 폰 시계를 번갈아 확인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뻔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빨리 눈치챘어.’
원래라면 던전 두어 개는 더 클리어한 연후에 눈치채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던전 그로잉이 문제였다.
그가 힘을 쓰지 않았다면 엄지척도 몰랐을 이야기였으니까.
그는 턱을 쓸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리무진 버스에 불이 완전히 꺼졌다.
일행들 모두 자러 간 모양.
그는 눈가를 문질렀다.
피곤하긴 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이 없었다.
그는 셔츠 소매를 올리고는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 * *
삼 일이 지났다.
“형, 일어나서 밥 먹어!”
“……응.”
눈꺼풀이 무겁다.
침실 밖으로 나오니 동생이 이미 6첩 반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큼지막한 갈비찜에 조기구이에 들깨 토란국.
각종 무침에 구석에는 동그랑땡.
전분 소시지에 계란을 부쳐 놓은 게 놓여 있다.
반찬을 많이 만드는 날에는 언제나 이렇게 동그랑땡을 곁들이곤 한다.
앞은 정통 한식인데 동그랑땡만은 케첩을 찍어 먹을 수 있게 미리 뿌려 놓았다.
이것만은 애들 입맛이다.
“어제 또 밤늦게까지 스킬 연구했지?”
동생 놈이 내 맞은편 식탁에 앉았다.
“응…… 형 죽을 것 같다.”
“먹고 죽어. 국부터 마셔. 몸 축날 때는 들깨가 좋대.”
나는 숟가락으로 국을 퍼서 한 입 먹었다.
크으, 스며든다. 고소한 들깨가 뼈마디에 스며들어.
동생이 말했다.
“나 없는 동안 배달 음식에 편의점 파티 했더라. 아주.”
“혼자 먹는 건데 치우기도 귀찮고, 거하게 뭐 벌이는 것도 귀찮고.”
“내 그럴 줄 알았다. 형 그러다 말년에 고생한다. 몸 삭아.”
그 말에 나는 대답 대신 갈비찜을 전투적으로 물었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동생이 작게 웃었다.
“많이 먹어, 형.”
나는 한 손으로 젓가락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TV를 틀었다.
거기서는 던전 그로잉 클리어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우리 파티 이야기였다. 동생이 말했다.
“오, 갓튜브에 올린 영상이네.”
내가 파티원들과 멋지게 버섯을 잡는 영상과 막바지에…… 트럭을 몰아 몬스터들을 로드 킬 하는 영상이 나왔다.
아나운서가 방송하다 말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저때 제정신이 아니었지…….”
“그래. 형 눈이 미쳤었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거 말고 저거 깰 방법이 없긴 했다.”
마침내 트럭이 달려 보스를 총알처럼 관통하는 영상은 제3자의 시점으로도 압권이었다.
탱커 정지벽의 목소리가 브라운관 너머로 울린다.
‘크아아아아! 우리는 할 수 있다아앗--!’
그때는 그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저런 미친 눈을 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 눈이 다른 파티원들한테도 옮겨 갔구나.
역시 똘기는 전염되는 모양이었다.
[이해석 전문가님 소견으로는 어떻습니까?]
아나운서의 질문에 전문가가 답했다.
[치밀한 작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치밀하다고요?]
[저 상황에서 가장 큰 물리력을 가진 건 결국 특수 트럭입니다. 그것을 사용해 보스 몬스터를 잡는다. 그것도 탱커를 이용해 내구를 보강하고, 힐러를 이용해 축복과 보수를, 레인저를 이용해 잡몹들을 견제하며 보스 몬스터까지 최단 거리를 주행했죠.]
[이 모든 게 계산된 행동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이해석 전문가는 자세를 바로 했다.
[네. 거기다가 같이 들어온 헌터 보조원들의 목숨도 살렸어야 했어요. 캠프에 두고 이동한다고 해도 방벽이 얼마나 버틸지는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 저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안전한 자리란 헌터들 옆이었을 겁니다.]
오오-!
여기저기 패널들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이해석 전문가가 당당하게 말했다.
[다만 탑승 관련 스킬은 라이더 계열 특성 능력자만이 익힐 수 있는 데다가 포인트도 상당히 비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헌터 엄지척이 언제 어디서 그런 포인트를 모았는지, 그런 포인트를 모을 만큼 몬스터를 사냥했음에도 어째서 제한 레벨 20이 되지 않았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앵커가 말했다.
[수호신이 도와주었을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
[음, 과학 계열 위인이 도와주었을 확률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 계열, 그것도 기계 공학 쪽 위인들치고 역사가 긴 위인이 없습니다. 자신의 대리인에게 그만큼의 포인트를 줄 여력이 있을까……? 저는 부정적으로 봅니다.]
[결론은 알 수 없다는 뜻입니까?]
[이런 식으로밖에 답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패널들이 아쉬운 눈으로 전문가를 바라본다. 앵커가 말했다.
[어느 쪽이든 미공략 던전, 그것도 던전 그로잉 중인 던전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클리어한 것은 사실. 외신들이 이 공략 방식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다른 전문가들이 이미 언급하였으나 20레벨 제한 던전이기에 가능한 공략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이미 헌터용 특수 트럭 이상으로 출력을 낼 수 있는 중장비차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위 던전에서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지요. 아마 이 이상의 던전에서는 엄지척 헌터가 속한 팀이라도 고전하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TV를 보고 있던 동생이 말했다.
“저 전문가 놈, 형 칭찬하는 듯하더니 결국 후려치네.”
“흔한 언론 플레이지 뭐.”
“저거 백 퍼 다른 그룹 헌터 팀… 아니 정하 그룹 타 팀에서 뭔가 받았나 보네.”
“왜? 처음 말했던 대로 다른 그룹 헌터 팀일 수도 있지. 어느 쪽인지 내기할래?”
내 말에 동생의 눈이 차가워졌다.
“내기할 필요 있나? 백 프로 정하 그룹 타 팀이겠지. 다른 대기업들은 그렇게 절박하지 않아. 초등학생이 백일장 상 받았다고 해도 그래 봤자 초등학생인걸. 어릴 때 천재 소리 듣다가 커서 범재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
미공략 던전을 클리어한 건 대단한 일이지만 그래 봐야 20레벨 제한 던전.
성장세가 대단할 뿐이지 상위 레벨에서 노는 그들이 돈을 풀어 견제를 할 정도의 일은 아니긴 하지.
반면 정하 그룹의 다른 후계자들은 입장이 다르려나.
회장 정만득의 나이를 생각하면 조급해지는 건 당연할지도.
‘쟤는 헌터 업계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파악이 빠르네.’
내 동생이라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단순히 전투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 감각도 뛰어나다.
나중에 정지벽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미 트레이닝 센터의 각성자들을 꽤나 포섭했다고 한다.
당근과 채찍을 아낌없이 사용하며 동급 각성자들 사이에서 꽤나 두려운 존재로 각인이 되었다는데, 사실 상상은 안 간다.
얜 그냥 내 동생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이 몬스터를 향해 총탄을 갈기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부드러운 반곱슬 머리카락에 처진 눈매.
그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큰 키와 넓은 어깨 덕분에 패널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이번에 동생도 팬 좀 많이 생기겠는걸?’
밥을 다 먹고 나니 동생이 곧바로 상을 치워 설거지를 했다.
“내가 할게.”
“형은 좀 쉬어. 어제 무리했잖아.”
그렇게 한참 투닥이다 내가 억지로 뺏었다.
설거지하는 틈틈이 갓튜브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따봉을 썼는데 10만 따봉이 또 모였네.’
예전 영상까지 합쳐서 증가한 거라고 해도, 따봉 회복 속도가 어마어마하군.
방송 보는 시청자 20명 중에 한 명 정도가 따봉을 누를까 말까 하다는 걸 생각하면 단순 계산으로 150~200만 명이 새롭게 채널에 들어와 따봉을 눌렀다는 뜻.
‘실감이 안 난다. 이 미친 속도가 실감이 안 나.’
리플 숫자도 엄청났다.
-乃던전 그로잉 2회 클리어! 킹지척 차냥해!乃
↳ 킹지乃갓지乃엄지乃킹지乃갓지乃엄지.
-저걸 차로 들이받아 깨네.
-과학으로 참교육 ㅇㅈ?
↳ 뉴턴 선생님 무덤에서 일어나실 듯.
↳ 몸으로 보여 주는 관성의 법칙 ㅇㅈ.
-본래 실력도 돌았는데 로드 킬 실력도 돌았다.
-무슨 레이싱 게임 하는 줄.
-차로 들이받아서 피날레를 해버리네.
가장 뒤쪽, 버섯 사이로 악마가 나오는 장면은 잘렸다.
정지한의 능력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
그는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나와 우리 팀이 전부 다 받기를 원했으니까.
‘뭐, 시간 관련 능력이 공개되면 복잡해지니까.’
물론 영상만 가지고는 알기 어려우리라.
집에 와서 느리게 감기를 해 봤는데 두 개의 컷밖에 없었다.
정지한이 악마에게 다가가는 컷과 악마의 머리가 잘려 있는 컷.
어떻게 잘렸는지까지는 촬영되지 못했다.
‘정만득이가 손주들 이름은 참 잘 지었어.’
정비가가 메카닉 능력자이듯.
정지벽이 탱킹 능력자이듯.
정수기가 물을 다루는 원소 능력자이듯.
정지한은 시간 정지 능력자였던 모양이다.
능력의 범위나 시간을 얼마나 정지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스템 기반을 뒤흔들 사기 능력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지.
‘이걸 알게 되면 후계 구도는 뒤집힌다.’
다른 경쟁자 연합 VS 정지한으로.
지금은 그래도 레벨 20 이하의 새싹이니 죽이려면 최대한 빨리 밟아 죽이는 게 좋을 터.
정지한이 철저하게 몸을 낮추는 건 당연한 일.
‘거기다 후계 구도에서 가장 입김이 센 정비가는 중립이고.’
정작 가장 강한 정비가는 후계 싸움에 관심이 없다.
그녀에게 돈과 명예란 진리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니까.
‘괜히 메카닉 프릭이 아니지.’
그녀가 보고 있는 세계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서 리플을 쭉쭉 더 읽어 갔다.
내가 리플을 읽는 동안 동생은 책을 읽는 중.
붕대를 푼 동생의 손에는 검은색 먹으로 그린 듯한 문양이 있었다.
‘혼돈의 문자’라고 부르지, 아마?
정비가가 조사한 바로는 문자 자체가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