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나같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한 멀티 플레이어는 없었다.
워낙 희귀하기도 하고, 한 우물만 파는 것보다는 한 방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신 멀티 플레이어는 여러 던전에 불려 나가기 좋다.
대형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는 레이드에서 멀티 플레이어는 각 팀을 이어 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니까.
대형 레이드는 뛰어난 멀티 플레이어 한 명이 있고 없고가 파티 전멸 여부를 결정하지.
그래서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는 던전은 멀티 플레이어가 마이크를 잡고 지시를 내린다.
탱킹, 딜링, 힐링, 버프, 저주 이 모든 직종의 사정을 알아야 대응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옛날에는 ‘공대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한 방이 갖고 싶다.’
스크롤을 내리다가 문득 랭킹 32위가 눈에 띄었다.
로마나 라시프.
SSS급 예언 능력자.
레벨 블랙.
클릭하니 추가 설명이 떴다.
[정보계 능력자. 예언 능력을 이용해 던전의 아이템과 스킬 북을 찾아 강해짐.]
아래에는 그녀의 활약을 다룬 갓튜브 영상이 링크되어 있었다.
미래를 안다는 건 강력한 무기.
그걸 활용하는 던전 공략 방식은 무척이나 재미있어서 어지간한 상위권 SSS급 능력자들보다 인기가 좋다.
‘정보 능력으로 우위를 점한다…라.’
따봉 상점을 이용하면 나도 예언계 능력을 살 수 있다.
정보, 정보라.
하지만 정보를 알아도 그걸 엮을 줄 알아야 보배 아닌가.
제갈량 같은 책사가 옆에 붙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
어, 잠깐?
나는 스킬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뒤틀린 황천의 책사]
등급: 레전드 (성장형 F)
시스템이 창조한 정령. 정신만 존재하며 엄지척을 위한 최적의 조언을 할 수 있다. 과거 어떤 주군을 모셨던 책사의 인격을 복제하여 시스템에서 재창조했다. 반드시 주군을 위한 최적의 길을 찾아낸다.
구매 조건 : 엄지척일 것
시스템 판매란에 내 이름이 붙어 있다.
나만이 구매 가능…이라니. 거기다가 제작자가 ‘시스템’이다. 이건 신의 이름이 아니다.
헌터들에게 ‘시스템’은 각별하다.
각성자들의 머릿속에서 퀘스트를 출력하고, 레벨 업 메시지를 보내고, 던전이 끝난 후 정산을 하는 존재들.
마치 게임의 운영자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시스템’? 아니, 시스템이 직접 아이템을 만들어 판다고?
그동안은 ‘스크루지’같이 오래된 신이나 영웅이 만든 다른 차원 스킬들만이 걸려 있었다.
“일단 시스템이 직접 만든 다른 판매 물품 없어?”
-1건, 뒤틀린 황천의 책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이것 말고는 없다는 거다.
일단 가격을 보자.
가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이렇게 떴다.
[악마의 정수 1개 + 10,000따봉 + 중급 스킬 교환권]
‘너도 악마의 정수 달라고?’
대체 악마의 정수가 뭐기에 이러는 걸까.
신도, 영웅도, 심지어 시스템마저 달라고 하고 있다.
[통찰의 눈]으로 봐도 별다른 건 없다.
악마가 가지고 있는 정수, 강한 어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는 쓸모없다.
이게 전부.
병실에 있는 동안 따로 전문가 감정을 맡겨도 별달리 알아낸 게 없다. 정말 인간에게는 쓸모가 없는 모양.
‘결국 누구에게 공양하느냐군.’
나는 어떤 신의 가호도 받지 않았다.
많은 신들이 호감을 표했지만 그들과 계약하기에는 어딘가 아쉬운 부분이 있었으니까.
‘시스템에게 붙는다?’
미친 생각이다.
나는 헌터 사이트에서 시스템의 후원을 받는 존재가 있는지 찾아봤다.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가 않았다. 기껏해야.
-X같은 시스템 새끼 내 공헌도 봐라. 내가 X발 왜 5위냐.
-시스템 제대로 돌아가는 거 맞냐? 왜 신이 나랑 계약을 파기해? 이거 잘못된 메시지지?
-아, 시스템 새끼 퀘스트 X같이 주네.
……이러한 글들뿐이었다.
시스템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좋아. 나는 재미있어 보이는 쪽에 걸겠어.’
“구입!”
-[악마의 정수]와 10,000따봉이 차감됩니다.
이것으로 남은 따봉은 12만 2천 따봉!
그리고 스킬 북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아니, 스킬 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얀 백우선이었다.
백우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황천의 뒤틀린 제갈 8호]
……뭐지……?
백우선에서 강력한 병맛의 향이 느껴진다.
나는 일단 스킬을 습득했다.
스킬 북, 아니 백우선이 빛이 되어 사라진다.
동시에 청아한 향냄새와 함께 말쑥한 모습의 미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마치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모아서 만든 것 같은 사내로, 무협풍의 옷을 입고 있었다.
유백색 머리카락과 기묘한 눈동자만이 이게 진짜 실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창조한 정령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주군,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뭐라고 짓지?’
앞으로 부려 먹을 건데 옛 영웅인 제갈공명 선생님 함자를 막 부르기도 좀 뭐하군.
일단 본인은 아닌데 그 인격에 기반해 재창조한 정령이라고 하지 않나.
8호까지 있는 걸 보면 앞에 7명이 더 있었던 모양이야.
게임 아이디 하나 짓는 것도 버벅이는 나다.
최대한 사람과 비슷한 이름으로 짓는 게 좋겠지?
엄지척과 제갈량의 끝자를 따서 ‘척량(尺量)’이라고 짓자.
자 척(尺)에 헤아릴 량(量), 사물을 자로 잰다는 뜻이다.
척량.
앞으로 그에게 맡길 일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척량, 좋은 이름이군요. 저는 성장하는 정령으로, 악마의 정수를 기반으로 시스템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악마의 정수는 너를 사는 값이었는데?”
-네. 동시에 제가 구동하기 위한 재료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들은 신들의 손에 넘어가게 하지 않기 위해 관리자께서 인과율에 따라 직접 이런 방식으로 변환시키기도 합니다.
그는 허공에 있다가 내 앞에 내려왔다.
반투명한 몸체가 아니었다면 진짜 사람인 줄 알겠다.
“관리자가 누구지?”
-기억이 소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시스템이란 정확하게 무엇이지?”
-인간이 하늘을 뛰어넘기 위한 육성 장치입니다.
“자세히…….”
-기억이 소거되어 있습니다.
몇 번 더 유도 심문을 했지만 같은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래. 이만큼 알아낸 것도 어디냐.’
나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나보다 강한 적을 상대할 강력한 공격 스킬을 원해. 내가 가진 따봉 안에서.”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활동을 위한 절전 모드로 돌아갑니다.
그는 사람의 모습에서 자그마한 새끼 여우의 모습으로 변했다.
은색과 금색이 섞인 모피에 커다란 귀에 커다란 눈.
그야말로 이상적인 사막 여우의 모습!
“자, 잠깐. 척량.”
-네. 주군 말씀하십시오.
“너 사진으로 찍히니?”
-네. 제 심장을 구성하고 있는 [악마의 정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물질화 변환 중, 3…… 2…… 1…… 완료했습니다.
찰칵!
나도 모르게 이놈을 폰카로 찍고 말았다. 그러고는 정신을 놓고 계속해서 촬영 버튼을 연타했다.
“자, 잠시 이리로.”
-무릎으로 올라오라는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새끼 사막 여우는 내 무릎에 올라오더니 엉덩이를 붙이고 공손히 앉는 게 아닌가.
허허허. 이거 참 늠름, 귀엽군.
찰칵, 찰칵, 찰칵!
역시 갓튜브는 동물이 최고다.
애동튜브가 왜 인기겠나.
척량은 내가 폰카로 자신을 찍든, 동영상을 돌려 촬영을 하고 있든 미동도 하지 않고 스킬을 검색했다.
-주군. 몇 가지 추가로 여쭈어볼 것이 있는데 지금 해도 괜찮습니까?
“어?”
-혹시나 지금 찍는 영상에 주군의 스킬 정보가 노출될까 저어됩니다.
“아아, 응!”
세상에, 의젓하기까지 하네.
나는 폰 촬영을 껐다.
척량이 말을 이었다.
-저는 갓 태어난 신공정령. 즉, 신이 만들어낸 정령이라는 뜻입니다.
그, 그렇군.
-지금 저로서는 인간의 형상을 오랫동안 유지하지는 못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계속 짐승의 형상으로 주군 곁에 있을 예정입니다.
그거참 잘됐다.
-주군의 표정을 보아하니 만족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허나, 스킬을 검색하는 중에 촬영하시면 자칫 주군의 정보가 외부에 새어 나갈까 저어되니 촬영 전에는 반드시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 그래…….”
-시스템은 저를 보다 인간과 잘 지낼 수 있도록 구현하였습니다. 제가 잘생기고, 아름답고, 귀여운 이유는 모두 시스템의 안배 덕분입니다. 그러니 제 외형을 아낌없이 써 주십시오.
놈은 뒷발로 귓등을 벅벅 긁었다.
-아, 죄송합니다. 물질화 중에는 동물의 본능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책사로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는 별문제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있는 거냐. 시스템아.
귀여움으로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검색 범위를 좀 더 좁힐 필요가 있습니다. 조건을 더 말씀해 주십시오.
척량의 북실북실한 꼬리가 까딱거린다. 꼬리가 움직일 때마다 달콤한 분유 향이 났다.
“조건?”
-네. 예를 들면 공격력에 비례해 부작용이 큰 스킬도 괜찮으신지요.
“부작용이라면 목숨이 위험한 종류의 스킬도 있는 거야?”
-네. 조건 검색…… 이 스킬입니다.
[심장 바치기]
등급: 레전드 (비성장형 S)
자신의 심장을 제물로 바쳐 신의 힘을 끌어낸다. 신 아누비스의 힘이 지상에 강림하여 사용자의 능력을 극한까지 증폭시킨다. 신의 힘이 깃들기에 스킬이 해제되면 반드시 죽는다.
-사용하기에 따라 최대 100배 정도의 공격력 증폭을 보입니다만…….
척량의 귀가 처진다.
-스킬의 설명대로 사용자는 사망합니다. 리스크가 클수록 능력 증폭량은 더욱 커집니다. 희생계 스킬 중에 가장 강력하다 할 수 있습니다.
어엄…… 한마디로 상한선을 정하라는 거군.
찾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까.
“그러면 내가 가진 마력 총합으로 봤을 때, 10회 정도 사용할 만한 가장 최고의 공격 스킬을 찾아주겠어?”
-알겠습니다. [분노하는 뇌신의 망치], [죽음이 담긴 검의 일격] 두 가지가 있습니다.
스킬 설명을 열어 보니 두 스킬 모두 상당한 스킬인걸?
[분노하는 뇌신의 망치]는 번개 속성 단일 공격으로 최대의 효율을, [죽음이 담긴 검의 일격]은 어둠 속성으로 적을 공격해 나가는 쾌검 스킬이었다.
문득 나는 척량에게 다른 식으로 질문을 해 보기로 했다.
“네 생각은 어때? 내게 어떤 게 가장 잘 맞을까?”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기 전에 주군이 어떤 상황인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아…… 그것부터 설명해야겠다.”
척량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아시겠지만 저는 주군의 스킬이고, 주군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세세한 부분까지 말씀해 주실수록 더욱 좋은 간언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숨기는 거 없이 다 말해 달라는 뜻이었다.
‘뭐… 숨길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는데…….’
앞으로 24시간 함께할 사이인데 괜히 비밀을 만들어 봤자 피차 피곤해질 뿐.
나는 내가 각성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직후의 일들, 그리고 여기까지 어떤 여정을 걸어왔는지 척량에게 모두 다 말해 주었다.
척량은 눈을 지그시 감고 꼬리를 백우선처럼 흔들었다.
말을 다 들은 척량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두 스킬 모두 손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