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엄지척(志剔)의 동생.
엄무척(武剔).
내 이름에 뜻을 가지고 바르게 살라는 의미가 담겼다면 동생은 굳세고 바르게 살라는 의미가 담겼다.
실상은 이름과는 달리 처진 눈에 덩치가 크고 서글서글하게 생긴 미남.
반곱슬인 머리카락이 인상을 한결 더 부드럽게 만들어서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골든레트리버를 닮았다고 했다.
다만 키가 2미터에 육박하다 보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준다.
“형, 나는 아직 졸업도 못 했어.”
동생은 곤란한 듯 한쪽 눈썹을 구부렸다.
“그래도 계약서 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냐.”
동생은 정지한이 건네준 계약서를 한참이나 읽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래에 배상 책임 넣어 주셔야 해요. 만약 B급 각성석을 기한 내에 제공하지 않으시면 계약 파기로 끝나는 것뿐 아니라 그에 합당한 금액을 추가로 배상하실 의무가 있습니다.”
정지한이 휘파람을 불었다.
“동생분 성격이 장난 아니군요.”
무척은 정지한의 차가운 목소리에 웃음으로 답했다.
“기한 안에 주실 거잖아요. 성실하게 이행만 하신다면 배상 책임을 신경 쓸 일이 있을까요? 아니면 걸리는 거라도……?”
“엄지척 씨 동생분은 벌써부터 돈 밝히시는 게 판사보다는 변호사가 적성 같군요. 꼭 저희 로펌에 모시고 싶을 정도네요.”
차라리 욕을 해라.
둘은 멀쩡한 얼굴로 서로를 돌려 까면서 계약서를 수정하고, 수정하기를 거듭했다.
나는 동생에게 물었다.
“정말로… 쓸 거니? 팔아서 네 용돈 해도 돼. 형은 80억만 해도 엄청난 장사야.”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다 벌었으니 팔아도 형이 그 돈 다 가져야지. 그리고, 형만 허락한다면 각성석 쓰고 싶어. 어차피 일반인밖에 쓰지 못한다며.”
“응, 이미 각성한 사람한테는 그냥 평범한 돌덩이지.”
동생은 웃음기를 거두고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면 망설일 이유가 없어. 말했잖아. 형은 내 유일한 가족이고 형을 돕기 위해서는 뭐든 할 거야. 형이 나한테 그래 왔으니까.”
착한 녀석. 왜 이렇게 착하게만 컸을까.
가슴이 뭉클해진다.
동생이 말했다.
“아, 그리고 계약 4조 말인데요. 독소 조항 아닙니까?”
“…호오…? 보편적으로 각성자들에게 쓰이는 계약서입니다. 독소라고요? 대체 얼마나 더 뜯어 가시려고.”
“뜯어 가는 게 아닙니다. 저희 형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정지한이 폰을 들었다.
“저희 로펌 변호사를 부를 테니까 상의해 보십시오.”
그래 봤자 아직 학생 아닌가.
국내 톱인 로펌 변호사를 이기기는 어려우리라.
동생이 말했다.
“싸우는 게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니지요. 그저 상호 합의하에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사르르 짓는 미소에 정지한은 폰을 내리……기는커녕 5분 안에 달려 나오라고 일갈을 날렸고, 로펌 변호사 넷이 와서 배틀을 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와, 동생이 내 편이라 다행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둘이 진짜 성격 안 맞는구나.’
그런 사이가 있다.
사회생활 안에서 사회적 행동을 하고, 사회적 선을 지켜 가면서 만났는데 왠지 서로 꺼져 줬으면 하는 사이.
그것을 두고 세간에서는 상성이 안 맞는다, 지랄맞다, 이런 말을 한다.
정지한도, 내 동생도 서로 사근사근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데 하는 짓을 보면 서로에게 엿을 먹이고 있었다.
“형, 완성되었어.”
동생이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것은 폰트 8에 장장 50페이지로 구성된 어마어마한 계약서였다.
동생이 말했다.
“완전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형 한 몸은 지킨 것 같아.”
정지한이 답했다.
“많이 양보해 드렸습니다. 정말 많이요…. 이것만은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엄지척 씨.”
계약 협상 때부터 느꼈지만 이분은 퍼줄 때 가장 분노해 있다.
‘누가 보면 강도 만난 줄 알겠어.’
후, 이제 이 계약서에 사인하면 80억 + B급 각성석 머슴살이 하는 건가?
동생이 말했다.
“아, 저는 각성 이후로 어디와 계약할지 아직 정하진 않았습니다. 아시죠? 독소 조항 삭제한 거.”
동생이 각성하면 우선권은 정하 그룹에 있다는 조건을 넣었다가 부리나케 뺀 모양이다.
“B급 신예가 또 생기겠군요.”
“운이 좋다면 A급이 될 수도 있죠. 최하 B급이라는 거지, 그 이상도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동생의 질문에 그가 웃음기를 담아 답했다.
“네. 운이 좋다면, 그리고 잠재력이 있다면요.”
확률은 무척이나 낮다.
정지한이 나를 향해 상자를 밀었다.
“선물입니다. 돌아가실 때 열어 보시죠.”
주먹만 한 크기의 나무 상자 표면에는 룬문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 * *
계약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낯익은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앗, 대헌 그룹 최현진 과장님.”
계약이 끝날 때까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여태 기다리고 계셨던 모양이네.
“안 돌아가시고 뭐 하셨어요?”
“할 말이 남아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대헌 그룹 캐슬 아파트 제안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다만…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내 말에 최현진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차라리 정하 그룹에서 조건을 아주 높게 부른 덕분에 제 면이 섰습니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조건이면 본사에서도 별말 못 합니다. 저라고 용빼는 제주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늘 운동을 하는지 탄탄한 체구. 그리고 강한 안광을 가진 분이셨다.
흰머리를 일부러 염색하지 않은 대신 단정하게 잘라 귀 뒤로 넘기고.
여기에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까지 합쳐지니 백전노장의 연륜을 보여 준다.
막상 헤드헌팅에 들어갔을 때는 능글능글한 인상 때문에 전혀 몰랐는데 자세히 뜯어보니 만만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네.
최현진은 명함을 꺼내서 내게 건넸다.
“우선 계약이 파토 났을 경우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저희 대헌 그룹에서 좋은 조건으로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직도 B급 각성석을 보유하고 있다는 정지한의 말이 미심쩍은 모양.
대헌 그룹도 대헌 그룹의 정보망이 있을 테니 그런 거겠지.
그 이상은 내 알 바 아니다.
띠링-
-1따봉을 받으셨습니다.
역시 최현진 과장님은 내게 각별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네. 고마운걸?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정하 그룹은 가장 가지 말았으면 하는 곳 중의 한 곳이기도 합니다.”
“어째서죠?”
“요즘 워낙 잡음이 많은 곳이라 고생이 있으실까 봐 걱정이 됩니다.”
“경영권 싸움을 뜻하는 건가요?”
띠링-
-거래자 1이 당신의 통찰에 감탄합니다.
-1따봉을 받으셨습니다.
이번에는 이름이 뜨지 않고 ‘거래자’로 뜬다. 역시 시스템 안에 내가 모르는 조건이 숨겨져 있는 모양이다.
“알고 계시는군요.”
“아무래도 회사 생활 하다 보면 듣게 되는 게 있으니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정지한은 과거 정하 그룹 망나니라고 불렸던 인물입니다. 오죽하면 회장 정만득의 버린 자식이 낳은 버린 손자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요.”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최현진은 깊게 숨을 쉬더니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회사 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어도, 다른 자식이나 손자들에 대해 들어도, 정지한에 관해서만큼은 모르셨을 겁니다. 그동안 치부처럼 대하던 자였으니까요.”
“…….”
“갑자기 각성을 하더니 곧바로 회사에 입사, 쥐 죽은 듯이 업무 처리 잘 하며 지내다가 이렇게 뜬금없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평범한 과정은 아니죠. 망나니였던 기질이 남아 있는 거라면 그거대로 문제일 거고, 그게 아니라면 그것대로 꿍꿍이가 많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조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가슴이 답답했다.
내 난처한 얼굴을 보더니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헤드헌터의 못된 분탕질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아닙니다. 걱정해 주셔서 말씀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조언자 1이 당신의 마음에 조금은 기뻐합니다.
-1따봉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거래자에서 조언자로 바뀌었다.
그녀는 내게 악수를 청하고는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했다.
기왕이면 정하 그룹 계약 파기 소식을 선물로 들고 왔으면 좋겠다고, 넉살 좋게 웃으며.
‘정지한한테 그런 게 있었어?’
정하 그룹 망나니라니.
지금 모습만 봐서는 굉장히 멀쩡한, 아니, 까탈스럽기까지 한 재벌 3세인데…….
최현진 과장님 입이 아니었으면 그냥 웃고 넘어갔을 일이었다.
‘정말 본인 말대로 헤드헌터의 못된 장난인가…….’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거래자에서 조언자로 바뀐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때 동생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형, 뭐 해?”
* * *
기숙사로 복귀하자마자 정지한에 대한 것들을 한참이나 검색했다.
국내 굴지의 정하 그룹 재벌 3세인데도 검색으로 나온 건 거의 없었다.
정지한의 아버지는 회장 정만득의 넷째 아들이라는 것 정도?
첫째, 둘째, 셋째 자식이 모두 능력자로서 기사가 수백 페이지가 넘는 반면에 정지한의 아버지, 정한규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것도.
형제들과 달리 강한 능력을 물려받지 못했거나, 아마 무능력자일 가능성도 있으려나.
대신 몇 가지 기사가 떴는데…….
-S그룹 넷째 아들, 주폭 후 돈다발 던져.
-음주 운전으로 7중 연쇄 추돌, 범인은 재벌가 넷째 아들.
클릭을 해 보니 ‘삭제된 링크입니다.’라고 뜬다.
정하 그룹에서 돈을 주고 삭제시켰거나 아니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지워진 걸지도 모르겠군.
술 마시고 사람 패고, 술 마시고 운전해서 사고 치고.
반면 형제들은 모두 능력자로서 빼어나 줄줄이 던전을 공략하고, 그렇게 얻은 기술과 자원으로 회사를 키워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기사가 바로 미모의 연예인과 결혼식을 올렸다는 이야기.
‘형제들은 정략결혼을 시킨 것에 반해 이쪽은 연예인…….’
정만득은 넷째 아들 정한규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한규에게서 태어난 게 바로 정지한이다.
정지한에 대한 기사는 거의 없다.
망나니 아버지의 성격을 꼭 닮아 싹수가 노랗다는 연예지 한 줄 정도.
금융가 지라시를 뒤져 보니 10대에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오토바이 몰고, 돈을 물 쓰듯 쓰며 사치하고 다니고, 연예인들과 구설수 만들고.
정하 그룹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이상,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사고를 무마시키고 돈으로 언론사를 발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대헌 그룹 최현진 과장이 했던 이야기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었다.
‘……희한하긴 하네.’
지금 인상만 보면 옆길도 안 보고 명문 대학교 졸업해서 엘리트 가도를 걸었을 것처럼 생겼는데 말이지.
그런데 옛날에는 망나니짓하며 살았다니.
‘그러고 보니 나 노려볼 때 약간 날기(氣)가 있었던 것도 같고…….’
낙인 효과인가.
어릴 때 껌 좀 씹었다고 하니까 왠지 하는 행동이 다 그것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