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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봉으로 레벨업-9화 (9/305)
  • 제9화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대충 정했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문고리를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익숙한 얼굴이었다.

    정지한.

    그는 벨을 누르려다 말고 약간 놀란 눈으로 말했다.

    “기숙사에 일이 생겼다고 해서 돌아왔습니다만 타이밍이 딱 맞았군요.”

    “네. 그렇습니다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것, 다른 업체들도 불러서 자리를 준비할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한번 다른 업체들의 조건도 들어 보시면 더 나은 판단을 하실 수 있겠죠. 저는 자신 있습니다만.”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 그래. 그 조건이면 그럴 만하지.

    하지만 유명 길드 헤드헌터들이 모인 자리다.

    경매에 부칠 수 있는데 안 하는 건 바보짓이겠지.

    나는 태연한 척 웃었다.

    “잘됐군요. 손님들이 오셨는데 문전 박대할 수는 없는 법 아닙니까.”

    “모두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답했다.

    “상대가 아닙니다. 그저 조건을 듣는 것뿐이죠. 만나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기숙사 이웃분들께 민폐가 될 터이니 조용한 곳으로 갔으면 합니다.”

    내 말에 정지한이 허허허 웃었다.

    “저를 너무 부려먹으시는군요.”

    “현관에서 돗자리 펴고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그러면 언론에서의 제 이미지가 실추되겠죠. 알겠습니다. 이것 참, 못 당하겠네요.”

    정지한은 너스레를 떨었다.

    띠링-

    -1따봉을 받았습니다!

    대체 이 따봉은 무슨 원리야?

    등에 동생의 시선이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형 잘하고 있다. 걱정하지 마.’

    조금은 안심했을까. 이 녀석.

    * * *

    기숙사 내부에 있는 임시 회의실.

    사실 회의실이 아니지.

    원래는 직원 카페용으로 만들어진 곳.

    그곳을 급하게 회의실 형태로 고친 셈이랄까.

    언론에 노출되는 게 적도록 임시 가벽을 쌓고, 카페 테이블 대신 회의용 탁자를 놓았다.

    급하게 만든 것치고는 괜찮은 편 같은데. 으음.

    정지한은 헤드헌터들을 임시 회의실로 안내하고는 나를 잠시 언론에 노출시켰다.

    응답을 받거나 기자회견을 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저 기숙사를 나와 임시 회의실로 가는 짧은 구간을 걸어가는 샷이 찍힌 것뿐.

    그것만으로도 내심 무섭네. 이거.

    차자자작!

    셔터 터지는 소리가 마치 번갯불과도 같았고.

    카메라 섬광이 터질 때마다 심장이 쿵쿵 성을 냈다.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다는 게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이었구나.

    기자들 사이에서 고함치듯 질문이 들려왔지만 정지한이 직접 막았다.

    질문들 속에서 한 기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모델 같네.”

    동생 덕분인가.

    제법 괜찮은 그림이 나온 모양이야.

    회의실에 도착하니 헤드헌터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석에는 내 자리가 준비되어 있다.

    자리에 앉기 전에 나는 깊숙하게 90도 각도로 인사를 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 태도에 헤드헌터들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띠링-

    -1따봉을 받았습니다!

    -1따봉을 받았습니다!

    -1따봉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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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따봉을 받았습니다!

    내 예측대로 따봉이 터지고 있다. 그래. 그럴 만하지.

    각성자들은 보통 젊고 어린 나이에 발현되니까.

    그리고 갓 각성된 사람이라면, 그리고 헤드헌터가 직접 나설 정도의 각성자라면 뭣도 모르고 힘에 취해 한창 오만해질 때였다.

    옛날 베테랑 헌터들이 이런 말을 했었다.

    -사실 말이다, 각 길드들이 애타게 바라는 건 따로 있어.

    -힘이 있는 각성자?

    -물론 맞는 말이지. 힘은 최고 우선순위니까. 그다음이 뭔지 아냐?

    -뭔데?

    -사회성이다. 길드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야. 그런데 신흥 귀족이라고 불리는 각성자, 그것도 어린 상위 각성자님들 중에, 그 재능을 가지고 남한테 맞춰 줄 만큼 사회성 있는 놈이 몇이나 되겠냐?

    -그 힘을 가지고 왜 남한테 맞춰 줘?

    -그래. 그게 문제라는 거다. 그런 놈들을 통솔해야 하는 게 대형 길드야. 거기 대가리들이 덕분에 아주 몸에서 사리 뱉고 있지.

    정지한이 한 방 먹은 표정을 짓는다.

    들리나요? 내 몸값이 올라가는 소리.

    차분하게 내 말 들어 주세요.

    “사회생활 하면서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는데…….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이거 면목이 없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근거리, 원거리, 회복이 모두 가능한 희귀 하이브리드형이고.

    실전 훈련도 없이, 각성하자마자 고블린 척후병들을 모두 막아낸 강철 멘탈의 소유자다.

    거기다 등장 스토리조차도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화제성을 가진 루키겠지?

    여기에 인성과 사회성까지 덧붙여 보자.

    나는 얼마나 할까?

    갑자기 헤드헌터들이 일제히 노트북을 북처럼 두들기기 시작했다.

    폰 진동 울리는 소리 아주 맑고요.

    각 헌터 길드 마스터와 위원장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소리가 객석 박수처럼 들리는군그래.

    ‘죄송합니다. 정지한 팀장님. 좀 더 불러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 * *

    회의실, 거기에는 각 기업의 헤드헌터들이 들어차 있었다.

    처음 준비 시간으로는 30분을 제시했다.

    그 안에 윗선과 조율을 끝마치라는 이야기였다.

    활짝 펼쳐진 노트북 위로 각 회사 임원들의 의견이 오르내리고 있다.

    [전지용 상무님 : 아무래도 정하 그룹이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네요.]

    [김한솔 전무님 : 그렇다고 해도 상도가 있지, 이런 식으로는 기업 차원에서도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만 줄 터인데 걱정입니다. 아무래도 젊은 혈기 때문인지…….]

    사내 회의 메신저라 매우 고상하다. 실상은 이렇다.

    ‘X발, 정하 그룹 새끼가 우리 엿 먹이려고 이러고 있는 거구만?’

    헤드헌터로 나온 대헌 그룹 최현진 과장 역시 이 의견에 동감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이태용 과장님(정보 팀) : 일단 조사에 의하면 계약을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이 부분만큼은 신뢰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요약 서류 모두 파일로 동봉합니다.]

    첨부 : 엄지척_profile.zip

    이미 최현진 과장은 출발 전에 다 읽었다.

    아마 이 자리에 온 헤드헌터들 모두 똑같으리라.

    [전지용 상무님 : 첨부 파일 읽었습니다. 루키들 영입할 때마다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각별하게 더 힘들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김한솔 전무님 : 아무래도 사회생활을 해 본 능력자인 데다가 매스컴에서도 크게 조명을 받았으니까요. 그룹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전지용 상무님 : 최현진 과장, 잘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그룹의 보배시니까요.^^]

    못 잡아 오면 죽을 각오 하라는 뜻이었다.

    헤드헌터, 최현진 과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프리랜서로 시작해서 대헌 그룹에 입사하고 고정적인 헤드헌터 생활을 해 온 지도 이제 8년.

    최현진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긴장했을 때의 버릇이다.

    ‘이런 건 쫄면 지는 거지. 경매처럼 만들어서 압박하는 모양인데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나. 정지한인가 뭔가 하는 새끼. 이 바닥에서는 내가 더 위야, 인마.’

    그녀는 조사 파일 내용 하나하나를 떠올렸다.

    ‘부모와 일가친척은 없고, 동생은 법대. 성적이 매우 우수해서 장학금도 몇 번 탔고, 외모는 형을 닮아서 출중한 편이고. 엄지척은 동생 때문에 위험한 헌터 보조원으로 들어갔고……. 이런 상황이면 우애가 끔찍할 수밖에 없지.’

    후룩-

    싸구려 커피가 쓰다.

    정하 그룹씩이나 돼서는 이딴 개도 안 먹을 원두를 대접하다니.

    이놈들 인성이 이따위인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

    하지만 엄지척은 다르다. 진흙 속의 진주랄까?

    ‘마침 우리 대헌 그룹의 입김이 들어가 있는 K대니까, 이걸로 승부를 보면 되겠어.’

    그러나 이 생각은 비단 헤드헌터, 최현진 과장만 한 생각이 아니었다.

    방 안에 들어찬 헤드헌터들은 모두가 저마다 압박을 받고 있었다.

    ‘회장님이 촉이 온다고 무조건 데려오라고 하시는데… 이게 무슨…….’

    이성보다 육감파인, 이른바 작두형 회장님들은 일단 데려오라고 떼를 썼다.

    ‘전무님이 부른 가격 안에서 해결이 될까, 이거.’

    육감보다는 이성이 우선인 알파고형 회장님들은 정해진 자본 내에서 그를 데려오라고 압박했다.

    이런 경우에는 선금보다 비율이나 조건에 메리트를 줘야 한다.

    ‘역시 유명 연예인들과 미팅 주선…은 무리겠군.’

    연예인 미팅 주선은 이제 구닥다리 방식이다.

    과거야 남성 헌터에게는 잘생긴 여배우, 여성 헌터에게는 잘생긴 남배우와의 미팅을 주선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시대가 바뀌었다.

    재벌집 방계와 혼맥을 이었으면 이었지, 연예인 단순 맞선은 메리트가 없어진 지 오래.

    젊은 세대일수록 자기 이득을 더 냉철하게 챙긴다.

    거기다가 저 미모를 가지고 연애 한 번 안 하고 일만 해 온 독한 새끼 아닌가?

    이제 와서 미팅 주선에 넘어갈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면 쪽으로 파고들어야 할 텐데……?’

    시간은 계속 흘러 제한 시간 30분이 종료되었다.

    삐비비빅-

    이제는 찾아보기도 힘든 구형 폰이 알람을 울렸다.

    금 가고 표면 칠까지 군데군데 뜯겨 있어 아직도 작동하는 게 용하다 싶을 지경이다.

    엄지척의 폰이었다.

    엄지척은 폰을 끄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은 착실하고 사회성 있는, 대기업에서 바라 마지않는 청년상이었다.

    띠링-

    -1따봉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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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따봉을 받았습니다.

    …….

    루키란 루키는 다 만나 본 헤드헌터들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 * *

    가장 먼저 손을 든 사람은 대헌 그룹 최현진이었다.

    “대헌 그룹의 대외영입부서 최현진 과장입니다. 제가 먼저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최현진의 태도에 다른 헤드헌터들은 생각보다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경매다.

    상대의 조건에 맞춰서 이쪽 조건도 변화시키겠다는 뜻.

    내가 나서기도 전에 정지한이 응수했다.

    “순서대로 하겠습니다. 우선 대헌 그룹부터 발언하시고, 그다음 분은 준비되시면 거수해 주십시오. 발언권을 드리겠습니다.”

    최현진은 그런 정지한을 향해 넉살 좋게 웃었다.

    “아, 사회자를 하시는 겁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역시 정하 그룹의 젊은 피, 이런 자리에 능숙하시군요.”

    어린 새끼가 대장 놀이 참 좋아한다는 말을 비즈니스적으로 먹여준 후에 그녀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저희 대헌 그룹은 계약금 40억, 계약 기간은 5년. 매니지먼트 비용은 85 대 15입니다.”

    오오-!

    웅성거리는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현진은 말을 이었다.

    “그 외에 동생분의 K대 법대 생활을 도와드릴 수 있고, 5년간 주택도 제공하겠습니다. 물론 후에 집이 마음에 드시면 재계약 후, 무료로 인수하셔도 됩니다.”

    고막 안쪽,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40억.

    처음 제안한 20억의 두 배가 넘고. 매니지먼트 비용이 5% 더 세지만 미친 조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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