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335화 (335/336)

335화

* * *

“으… 음….”

쏟아져 내리는 환하고 따뜻한 빛에 한성이 눈을 떴다.

‘뭐지? 난… 죽었을 텐데.’

눈을 뜬 그곳엔 자신 외엔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이 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방 전체에 가득 찬 밝고 따뜻한 빛과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의자 둘, 탁상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이렇다 할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멍할 뿐이었으니까.

“기분이 어떤가.”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에

한성이 뒤를 돌아보니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적당한 키와 체구, 주름져 인자해 보이는 얼굴.

흰 정장에 흰 구두, 백발에 흰 중절모까지.

꽤나 멋지게 늙은 할아버지였다.

“멋지게 늙은 할아버지라. 칭찬 고맙군.”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흠칫.

‘어떻게…?’

“별 대단한 능력은 아니네. 우선 앉지.”

노인이 한성에게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당신은… 신입니까?”

한성이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그에게는 미쳐버린 자를 쓰더라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뭐,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네만,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내가 신이라 불리는 자일세.”

노인이 피식 웃고는 의자에 앉으며 담담히 답했다.

“앉지.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으니까.”

다시 한번 노인이 한성에게 의자를 권했다.

비척비척 일어난 한성이 의자로 향했고

힘없이 풀썩 의자에 주저앉아 노인을 바라보았다.

“투르바는 죽었습니까?”

잠깐의 침묵 뒤 한성이 입을 열었다.

“보통은 본인을 먼저 걱정하는데 말이야.

자네는 그런 면에서 봤을 땐 참… 자네답구만.

여하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완전히 소멸했으니.”

그가 어디서 꺼냈는지도 모를 찻주전자로

한성과 제 앞에 놓인 잔에 차를 따르며 씁쓸히 답했다.

후릅.

“자네도 들게. 향이 참 좋아.”

그가 차를 권했다.

“세계수, 그녀가 준 거라네. 이 자리 역시 그녀 작품이고.”

그가 한성의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숨겨졌던 옵션이… 이걸 말하는 거였나.’

세계수가 죽어가며 남겼던 힘을 떠올린 한성이었다.

“들게.”

그의 말에 한성이 홀린 듯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좋네요.”

“그렇지?”

그가 웃으며 답했다.

다시 얼마간 생긴 침묵.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건 한성이었다.

“전… 죽은 겁니까?”

“안타깝게도 그렇다네.”

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계약이었지 않나. 그것도 자네가 먼저 청한.”

“….”

한성이 죽어가며 시스템에게 외쳤던 말들을 떠올렸다.

“죽음이 슬프지는 않나?”

“아뇨. 딱히. 다만…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떠나보낸 것이 맘에 걸립니다.”

“좋은 사람이군. 자넨.”

“….”

후룩.

둘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벨루몬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멸되었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그럼…?!”

찻잔을 내려놓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근본이 천하든, 귀하든 상관없이

생명이라는 건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네.

그것이 바르든, 바르지 않든 말이야. 내가 그리 만들었지.”

“….”

“흔히 말하는 권선징악에 대한 걸 말하려는 게 아니야.

난 누군가를 함부로 심판하지 않아. 다만 알려줄 뿐이지.”

“…?”

“내가 던지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하든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오답은 없으며, 뭐든 자유이나,

그것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너의 몫이라는 걸 말이야.”

알 수 없는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벨루몬들은 말이지.

제 앞에 펼쳐진 수많은 선택과 결정의 가운데에서

꽤나 훌륭한 답을 했고 정답에 가까운 옳은 선택들을 했어.”

“….”

“뭐, 물론, 처음엔 자네라는 사람을 만나

자의가 아닌 타의에 가까운 결정을 하긴 했지만,

후에는 결국 자신만의 생각으로 선택들을 해 나갔지.”

벨루몬들과의 만남과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쳤다.

“그에 대한 결과로 누군가의 삶을 구하고 지켜냈으며,

또한 하나의 생을 위해 자신의 생을 바치기까지 했어.”

‘…나인가.’

“그런 장한 이들에게 내가 소멸을 안겨줄 리 없지.

그들은 어딘가에서 또다시 내 질문에 답하며 살 거야.”

“….”

“다만, 내가 힘을 좀 썼기에

이번 생보다는 좀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 테지.

뭐, 이번 생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잊은 채겠지만.”

노인이 한성에게 윙크를 했다.

‘그나마… 다행인가.’

풀썩.

한성이 세웠던 몸을 다시 의자에 파묻었다.

자신과의 기억을 잊은 것이 서글펐지만 상관없었다.

대신 새로운 삶을 얻었으니.

“좋은 동료군. 자네는.”

노인이 푸근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주지.”

“…?”

“자네 동료들이 여기 왔을 때 반응이 어땠는지 아나?”

“…어땠습니까?”

“모두가 똑같았다네.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

무슨 말이냐는 한성의 얼굴을 보고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신이라는 걸 알게 되자,

내 말 한마디면 자신들이 소멸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자네를 죽게 내버려 두면 날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더군.

도끼와 총구, 지팡이와 칼, 토템을 들이밀며 말이야.”

“…아.”

울컥.

목구멍에서 뭔가 솟구쳐 올랐으나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래서 그들에게 생사여탈에 대한 권리는

내가 아니라 자네 선택에 달려 있는 거라 말해주었네.

그리 말하니 타우한과 티에라, 칸은 고개를 끄덕이더군.”

“그럼… 나머지 두 녀석은…?”

“벨루몬과 레그나토르?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던데? 하하하.”

그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너무 걱정 말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군요.”

“자.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그가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묻고 싶은 게 많을 테지. 답해줄 테니, 묻게.”

“….”

한성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왜 그러셨습니까?”

한성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무엇을?”

“첫째로 당신이라면… 신인 당신이라면….

슬픔과 고통, 눈물과 아픔, 괴로움이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세상을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부정을 만들고 투르바를 잉태하게 했습니까?”

그를 바라보는 한성의 눈에는 원망이 어려 있었다.

“둘째로. 왜 보고만 있었습니까?

당신의 손짓 하나면 살 수 있었을 생들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었습니까?”

“….”

“정말로 당신에게는 투르바의 울분이….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 그저 눈요기에 불과했습니까?

어찌… 이 모든 것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습니까. 어찌!!!!”

고함에 가까운 한성의 말.

노인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한성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는

대격변의 날 때 겁에 질렸던 어린 소년이 비치고 있었다.

“다 물었나?”

“예.”

“답해주지.”

“….”

그가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네 말대로 전지전능한 신인 나라면

세상에서 슬픔과 고통, 눈물과 아픔을 없앨 수 있네.

그러나 그것은 결단코 옳지 않으며, 바르지 않은 일이네.”

“어째서입니까.”

“부정은 내가 아니라, 수많은 생(生)들이

살아가며 만들어낸 삶의 산물이고 선물이기 때문이네.

그렇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며 의미와 가치가 있어.

그런데 내가 어찌 그것을 없애겠나. 그건 안 될 말이야.”

‘뭐…?’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처럼 띵했다.

“하나 묻겠네. 슬픔, 눈물, 아픔, 분노 등의 부정이 없고

기쁨, 사랑, 행복만이 있는 세상이 정녕 완전한 세상인가?”

“….”

“내가 대신 답해주지. 아니? 아닐세.

그런 세상은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네.”

“….”

“슬픔을 모르는데 어찌 기쁨을 알고,

고통이 뭔지 알지 못하는데 어찌 행복을 알겠으며,

아픔을 느껴본 적 없는데 어찌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겠나.

그것이 내가 부정을 이 세상에서 없애지 않은 이유라네.”

“….”

“투르바의 잉태 역시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네.

그녀는 그저 부정에서 태어난 불행한 아이일 뿐이야.”

“….”

“난 그녀가 부정에 잡아먹히지 않길 바랐네.

부정으로 태어났으나 부정으로 남지 않기를 바랐지.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다르게 결국 부정으로 끝이 나더군.”

그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둘째로, 내가 보고만 있었다고 말했나?

아니. 아닐세. 난 그러지 않았네. 단 하루도.”

그의 눈은 슬픔으로 차 있었다.

“대격변의 날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전부터

난 다른 이의 입을 빌려 수없이 말하고 또 말했네.

날 믿으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

옳은 선택을 하라는, 후회할 선택은 하지 말라는 말들을.”

“….”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이해한 이는 적었으며

이를 제대로 행하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네.

오히려 곡해하고 왜곡해 더욱 좋지 않은 선택만 했지.”

“….”

“그 결과가 지금인 것이고.”

그의 음성은 침울했다.

“그리고 투르바의 울분과 자네를 비롯한

뭇 생명들의 죽음들을 결코 난 즐거이 보지 않았네.

하나하나의 생이 꺼져 갈 때마다 아파했고 눈물지었어.”

“….”

“그리고 내가 정말로 뭇 생명들의 죽음을,

투르바 그 아이의 울분을 보고 즐거워할 거였다면

자네들에게 왜 굳이 내 힘의 조각들을 나누어 줬겠나.

편하게 앉아 죽어가는 걸 지켜봤으면 될 일을 말이야.”

“….”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자네 말대로 내가 직접 개입했으면 일은 쉬웠겠지.

죽는 이들은 없었겠고, 대격변의 날 따위도 없었겠고.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네. 난 묻는 자일뿐이기 때문에.

그것이 섭리이고 이치이며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

“대답이 됐나?”

“아뇨…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이해하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게 신이라는 자가 지니는 숙명이라는 것일 테니까요.”

“…자네다운 대답이군.”

그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후웅.

한성의 반지가 빛을 내다 그 빛을 잃어갔다.

“시간이 다 되었군. 아쉽지만 대화는 여기까지일세.

그녀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거야.”

한성의 반지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자네의 선택에 달렸네.

왜냐하면 내가 자네에게 선택권을 줄 거니까.

많은 이들과 세상을 구한 자네는 그럴 만한 자격이 되거든.”

“…?”

“선택권을 쥐여 준 이는 이제껏 몇 없었기에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내가 더 설레고 신이 나는군.”

그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첫째. 영원한 안식일세.

환생도 그 어떠한 방해도 없네. 그저 안식만 있을 뿐.

지친 지금의 자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선택이지 싶어.

다만 자네 성격상 좀 지루해할 수는 있겠다 싶긴 하네.”

“….”

“둘째. 신으로의 좌정일세. 표정하고는.

함부로 쉽게 결정한 것이 아니니 걱정 말게.”

노인이 한성의 얼굴을 보고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자네를 지켜봐 온 결과,

난 자네가 누구보다 곧고 바르며 선한 자라 생각했네.

또한 힘에 따른 책임감이 무엇인지 아는 자이기도 해.

그렇기에 자네가 신의 자리에 올라줬으면 해. 난 지쳤거든.

또, 자네가 만들어가는 세상은 꽤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너무 부담 가지진 말게.

시작부터 전지전능한 힘을 줄 정도로 멍청하진 않으니.”

“네?”

“자네가 그리한다 한다면

작은 세상부터 우선 맡겨볼 생각이네.

권능 역시 많이 제한될 것이며, 금제도 많아.

어… 쉽게 말하자면 신이 되기 위한 견습? 정도가 되겠구만.”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하게. 신중한 건 좋은 거니까.”

한성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그가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환생일세.

이번 생에서의 기억은 잊겠지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

자네가 환생을 택한다면 내가 혜택을 좀 주지.

조금 더 윤택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야.”

“….”

“자, 선택하게. 시간은 충분히 주겠네.”

그러나 한성의 대답은 생각보다 빨랐다.

“방금 환생을 택한다면 혜택을 주겠다 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조건지가 가진 가치가 더 크기 때문입니까?”

“…역시 예리하군.”

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맞네. 영원한 안식과 신의 자리는

그 누구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선택지니까.

그러니 그를 포기하겠다고 하면 그에 마땅한 혜택을 줘야지.”

“…두 선택지의 가치는 어느 정도 됩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한성이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보다도 훨씬 크고 값지지.

세상 하나를 송두리째 갖다 바쳐도 부족할 만큼.”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전 환생을 택하겠습니다.

그리고 환생 시 받을 혜택을 모두 받지 않겠습니다.”

“…음?”

의외라는 얼굴을 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대신 투르바로 인해 죽은 이들 모두를 살려주십시오.

그것이 마물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

“그래서 그들이 다시금 당신이 질문한 수많은 물음들에

여러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것이 설령 바르든, 바르지 않든.”

“…하.”

허를 찔렸다는 듯 그가 웃었다.

“참으로 자네답구만. 참으로.”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답일세.”

“예?”

뜻 모를 그의 말에 한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이 또한 그가 내민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였나?

그런 한성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노인이 옅게 웃었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네.

죽었던 이들은 모두 다시 살아날 것이며,

이어졌던 마물과 인간들의 세상은 다시 단절될 걸세.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이전의 모습을 되찾게 되겠지.”

“예? 벌써…?”

한성이 멍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래 봬도 전지전능한 신이라서 말이야. 하하.”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답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디아와 자네 품에 있던 세계수의 씨앗은

내가 회수해 직접 마물의 세계에 돌려보냈고 심어두었네.

머지않아 마물의 세계도 본모습을 찾고 안정을 되찾을 거야.”

“다행…입니다.”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 말하네만,

벨루몬들은 다시 살아나지 않을 걸세.”

흠칫.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한성의 어깨가 떨렸다.

“이미 그들의 환생은 모두 이루어졌네.

그런 그들을 다시 되살리는 건 나라도 불가해.

또한, 자네의 혼과 강한 연으로 엮인 그들이라면,

자네 없이 살아가는 것을 조금도 원치 않을 것 같군.”

“그럴 것… 같군요.”

벨루몬들을 떠올린 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자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지.”

“네?”

“본래 환생을 할 때에는 전생의 기억과

전생자가 전생에 맺었던 인연들을 모두 흩어내고

새로운 기억과, 새로운 인연을 맺도록 만들어야만 하나.”

“…하나?”

“자네에게는 기억은 앗아갈지언정,

벨루몬들과의 그 연만큼은 이어가게 해주겠네.”

“그 말씀은…?”

“그래. 서로에 대한 기억은 없겠지만, 연은 이어질 걸세.

좋은 인연이 될지 나쁜 인연이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감사합니다.”

한성의 목소리가 떨렸다.

“별거 아니야. 그대가 보인 모든 것들에 비하면.”

노인이 씩 웃었다.

“문은 저기네. 저기로 나아가면,

이번 생의 모든 일들을 잊고 새로운 생이 시작될 걸세.”

그가 벽 한쪽을 가리켰고, 그곳엔 환한 빛이 있었다.

눈이 부실 만큼 환했고, 따뜻한.

“예.”

“그럼. 건투를 빌지. 부디 현명한 선택만을 하게나.”

한성이 환한 웃음과 함께 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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