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 * *
‘?’
한성은 각성이 시작된다는 시스템의 알림이 들리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침을 느꼈다.
솟아오른 힘은 온몸 구석구석을 향해 뻗어 나갔다.
가야 할 길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레 나아갔다.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힘임에도
한성은 그것이 불쾌하거나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 힘이 자신을 해하려는 힘이 아님을 알았으니까.
알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한성의 머릿속으로 시스템이 아닌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키고자 했으나, 지키지 못한 비운의 왕.]
‘…?’
들려온 목소리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분명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이건만,
어째서인지 낯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했다.
그의 목소리는 역설적이게도
엄격하고 딱딱했으나 누구보다 부드러웠고,
시리도록 차가웠으나, 그 무엇보다도 따스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의 말이 시작됨과 동시에
한성의 심장은 터질 듯이 빠르게 뛰어댔으니까.
[그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해지길 열망하는 왕.]
미친 듯 피가 끓어올랐다.
몸은 녹아내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 백성을 위해 기꺼이 수라의 길에 오르길 선택한 왕.]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마력이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처럼 터져 올랐다.
[패왕(霸王), 그것이야말로 그대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열기는 빠르게 식었고
내부에서 폭발하듯 솟구치던 힘은 은은해졌으며,
흥분은 빠르게 가라앉았고 마력 역시 갈무리되었다.
한 편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디마디 차올라 있는 강인한 힘과
한성의 내부를 파도처럼 휘도는 웅대한 마력은 여전했다.
분노하는 자를 처음 사용 했을 때 느꼈던
그때의 전능감을 또 한 번 한성은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꿈이 아니었다.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패왕(霸王)으로 각성하셨습니다.]
그런 한성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노인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시스템의 건조하고 사무적인 말투가 들려왔다.
[스킬 : 흑월난무가 특정 조건을 달성,]
[스킬 : 패왕(霸王)의 검으로 진화합니다.]
[스킬 : 왕의 위압, 왕의 함성이 특정 조건을 달성,]
[스킬 : 패왕(霸王)의 형(形)으로 융합, 진화합니다.]
[멎었던 시간이 다시 흐릅니다.]
흑백이었던 세상은 다시 제 색을 되찾았고,
멈췄던 마물들의 고함과 병장기들의 소리 역시 다시 들렸다.
꿈같던 짧은 시간이 지났고, 현실이 찾아왔다.
“무슨…?”
당황도 잠시, 투르바의 얼굴에는
웃음이 아닌 불쾌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신이 된 자신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힘이
잠깐이나마 자신을 짓눌렀다는 걸 깨달은 모양새였다.
“네놈 짓이냐?”
한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
“물었다. 네놈 짓이냐고.”
그의 물음에도 한성은 그저 그를 바라볼 뿐, 답하지 않았다.
“아니지. 아니야. 물어본 내가 병신이군.”
그가 빈정거렸다.
“네놈에게 신격과 시간을 짓누를 힘이 있을 리 없지.
위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는 저놈이라면 몰라도.”
그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
“그나저나 뭐지? 네놈의 그 힘은?”
한성을 바라보는 투르바의 눈에 살의가 일었다.
“한낱 인간 따위가 지니기엔 참으로 오만한 힘이군.
보나 마나 저 위엣 놈이 허락해준 힘의 조각인 것일 테지.”
그가 한성을 보며 중얼거렸다.
“딱한 네놈이 가여워 동정심에 준 힘일까.
아니면 내가 겁이 나 급하게 쥐여준 힘일까? 킥킥킥.”
그가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의 소리.
그러나 그의 얼굴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이해하기 힘들군.
개입을 하려거든 직접 하는 게 나을 텐데….
어찌 네놈에게 감당도 못 할 힘을 준 것일까… 흠.”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소리쳤다.
“아!”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싸우다 공멸하라는 뜻인가? 아니면 그저 눈요깃거리?”
“….”
장난치듯 그가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보는 한성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뭐라 말 좀 해라. 이 버러지 새끼야.
당장이라도 날 씹어 먹을 것 같은 얼굴만 하고 있지 말고.”
빙글거리며 웃던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알량한 힘 몇 조각을 받았다 해서
뭔가를 기대하고 있나 본데, 달라지는 건 없다.
지금껏 몇 번이고 반복했으면 알 때도 된 것 같은데?”
“…네놈이 내뱉은 끝의 그 말, 다시 돌려주마.”
마침내 한성이 입을 열었다.
높낮이라고는 하나 없는 건조한 목소리에
소름 끼칠 정도로 냉기가 묻어 나오는 날 선 말투였다.
“음?”
“몇 번이고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고,
사랑하는 이들이 눈앞에서 죽었음에도 난 물러서지 않았다.”
“….”
“그런 내가 다시 네놈 앞에 서길 선택했을 땐,
도망치도, 목숨을 구걸치도 않고 또다시 여기 섰을 땐,
네놈 역시 알았어야지. 결단코 내가 물러서지 않을 거란 걸.”
오싹.
한성의 눈동자 너머에서 느껴진 살의에 소름이 돋았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러나 그의 분노가 전과 같이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그가 무너졌을 때의 쾌감을 상상하며 즐거워할 수도 없었다.
그저 불쾌할 정도의 소름만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버러지 새끼가 잘도 지껄여대는군.
네놈의 권속들은 이미 내 손에 다 찢겨나갔고,
세상에 가득 찬 부정들은 모두 다 내 힘이 될 것이며,
너희 인류가 만들어 낸 모든 것은 이제 곧 무너져 내린다.
그런데 이 틈바구니에서 네놈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지?”
“없다.”
“잘 아는군.”
그가 픽 웃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무너져 내린 것들을 다시 세울 수도,
고통스레 죽어간 이들을 다시 살려낼 수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내 품에 품을 수도 없다.”
흠칫.
한성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살기가 점차 짙어져 갔다.
그로부터 폭발적으로 인 마력의 폭풍에
투르바는 한성에게서 처음으로 오싹한 감정을 느꼈다.
바뀐 한성으로부터 느껴지던 알 수 없는 불쾌함이,
그로부터 일었던 소름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져갔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
“네놈과 네놈이 만들어 낸 모든 것들을 지워내는 것이다.”
[스킬 : 패왕(霸王)의 형(形)이 발동,]
[주변 아군에 막강한 고양감을 선사합니다.]
[포식과 그림자, 칼의 노래가 왕의 힘에 의해 강화됩니다.]
[스킬 : 패왕(霸王)의 형(形)이 발동,]
[대상 ‘마신, 투르바’에게 복속할 것을 명합니다.]
[대상 ‘마신, 투르바’가 왕의 힘에 일부 저항합니다.]
[대상 ‘마신, 투르바’가 왕의 힘에 불안을 느낍니다.]
“무슨…?”
투르바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자신을 옥죄는 한성의 힘이 불쾌했고, 불편했으니까.
거기다 자신을 짓누르는 힘을 모두 떨쳐낼 수도 없었다.
그의 머리로는 현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순하게 한성이 신에게 힘을 부여받았다 생각해봐도
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낱 인간의 몸이 신의 힘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가라.”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악!!!!!!!
한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곁을 배회하며 마물들의 접근을 막던
그림자와 그에 어린 포식, 그리고 칼의 노래들이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거칠고 포악하게 나아갔다.
파도처럼 쏟아져 내리는 마물들은 이제
패왕의 형으로 강화된 그들을 막아내지 못했다.
끼에에에에에!!!!!
쿠와아아아아아악!!!!
별다른 저항이랄 것은 해보지도 못한 채
마물들의 파도는 그대로 갈려 물보라가 되어 사라졌다.
쏟아져 내리는 검은 창들에 꿰뚫리고,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포식들의 탐욕에 짓씹혔으며,
그림자들이 만들어낸 날카로운 날에 베이고, 잘려 나갔다.
쿠와아아아아악!!!
끼야아아아아악!!!
들리는 것은 오로지 마물들의 고함 소리와
칼의 노래에 몸과 머리 꿰뚫리고 터져나가는 소리,
그림자가 만들어낸 날붙이에 베이고 갈려 나가는 소리,
들불처럼 퍼져 나가 그들을 삼키는 포식의 소리뿐이었다.
이제는 쏟아져 내리는 마물들의 수보다
포식과 그림자, 칼의 노래가 찢는 마물들의 수가 더 많았고,
쏟아져 내리는 속도보다 그들이 마물들을 찢는 속도가 더 빨랐다.
[스킬 : 포식이 대량의 에너지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포식들의 진군이 게이트에 다다랐을 때, 한성이 중얼거렸다.
“먹어라.”
쿠와아아아아악.
가로, 세로 10m는 되고도 남을 게이트의 아래에서
포식이 그보다 큰 아가리를 벌려 게이트를 집어삼켰다.
[업적 : 신살자가 발동, 투르바의 권능을 무효화합니다.]
[스킬 : 포식이 대량의 에너지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에너지 포인트가 40%에 도달합니다.]
[노래하는 자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먹구름 속 우레처럼 집어삼켜진 게이트가
최후의 빛을 내뿜었으나 얼마 가지 못했고 이내 사라졌다.
“….”
죽음이 찾아온 것처럼 고요했다.
마물도, 게이트도 보이지 않았다.
숱하게 잘리고, 베이고, 찢겨져 나갔건만
그 어디에도 피 한 방울, 살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져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네놈 하나로군. 투르바.”
한성이 투르바를 바라보며 씹어 뱉듯 말을 내뱉었다.
“놈이 네놈에게 준 그 힘의 조각이… 이 정도일 줄이야.
꽤나 놀랐다. 조금 인상 깊기도 했고.”
여유로운 말투였으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하지만 그래봐야 네놈이 없앤 건
세상에 펼쳐진 수백 개의 문들 중 하나일 뿐이다.
거기다 그 문들의 주인인 난 여전히 온전하고 멀쩡하지.
알겠나? 네놈이 미친 망아지마냥 날뛰어봐야 결과는 같다.”
“아니? 같지 않을 거다.”
한성이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지금부터 나는 네놈의 흔적 모두를
모조리 씹어 삼킬 것이고, 남김없이 지울 테니까.”
후웅.
한성으로부터 대량의 마력이 피어올랐다.
[칠흑의 단검이 조건을 충족, 왕의 검으로 진화합니다.]
알림과 동시에 한성의 손에 있던
칠흑의 단검 두 자루에 환한 빛이 스며들었다.
한성은 이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권속들의 의지가 검에 깃듭니다.]
알림과 함께 연기 다섯 줄기가 단검에 스몄다.
벨루몬들에게서 회수했던 무기들이었다.
하나하나에 벨루몬들의 익숙한 기운들이 느껴졌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한성이 이를 악물며 속으로 생각했다.
빛이 사라지자 그곳엔 단검 두 자루가 보였다.
왕의 검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화려함은 없었다.
칠흑의 단검과 딱히 모양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라고 해봐야 부서졌던 검이
본래의 위풍당당한 그 모습을 되찾았다는 것과
검신의 길이가 전보다 20cm 정도 더 길어졌다는 것,
두께 역시도 전보다 조금 더 두꺼워졌다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더는 단검이라 부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한성이 검을 집었다.
기분 좋은 묵직함,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후웅.
날에 새까만 기운이 어렸다.
세상 그 무엇이라도 벨 것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새로운 스킬 패왕의 검이었다.
오싹.
한성과 한성의 검을 바라보는 투르바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보이는군.”
투르바를 바라보던 한성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뭐라?”
“네놈의 힘이. 네놈이 닿은 곳이.”
“뭐라는 것이냐!!!!!!”
투르바가 고함을 질러댔다.
“이제야 보여. 이제야.”
한성이 천천히 두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끝을 내자. 정말로.”
“그 말이 몇 번째인지 기억하나?”
투르바가 빈정거렸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결과는 모두다….
이 몸의 승리였단 것도 기억하려나 모르겠군.”
“그거 아나?”
한성의 안광이 살의로 번뜩였다.
“무엇을.”
“끝에 이기는 놈이 다 이기는 거라는 걸.”
쾅!!!!!!!!!!!!!!!!!!!!!!!!!!!!!!
한성의 신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