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 * *
쾅!!!!!!!!!!!!!!!!!!!!!!!!!
“치이익. 알파 팀. 알파 팀. 후방으로 후퇴한다!!!”
“치이익. 베타 팀. 현재 a―19 구역에 고립,
탄약과 화력, 헌터들의 증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물들을 후려치던 강건의 귓속으로 수많은 말들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쾅!!!!!!!!!!!!!!!
제 몸집보다 몇 배는 더 클 미노타우르스의 두개골을
단번에 박살 낸 그가 사체들 위에서 베타 팀을 바라보았다.
교신의 말대로 그들의 상태는 위태로워 보였다.
탄이 떨어진 병사들은 남은 수류탄을 던지거나
돌덩어리를 던져대며 악다구니와 발악을 해댔고,
그것마저 안 된다면 날조차 들지 않는 대검을 들어
자신들을 전 방위에서 압박해 오는 마물들을 위협했다.
헌터들 역시 마력을 다 쓴 건지,
아니면 체력에 한계가 온 건지 움직임이 둔했다.
“치이익. 여기는 파파 장. 베타 팀에게는 내가 가지.”
“치이익. 건투를 빕니다.”
쾅!!!!!!!!!!
교신이 끝남과 동시에 강건이 딛고 서 있던
사체의 산이 무너져 내렸고,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쾅!!!!!!!!!!!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베타 팀의 근처.
푸화아아아아악!!!!!
단순하기 그지없는 그의 주먹질에,
베타 팀을 둘러쌓던 두꺼운 마물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 마물들의 육신이 짓이겨져
피가, 살점들이, 내장이 헌터들과 군인들에게 쏟아졌으나
그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그저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기뻐 보이기만 했다.
“협회장님!!!”
설화가 강건을 향해 소리쳤다.
“괜찮나?”
“네. 덕분에요.”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 정도예요.”
“알고 있네.”
“당초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마물들의 진군 속도를 훨씬 늦춘 것은 불행 중 다행이나,
군 자원과 헌터들의 소모가 예상을 훨씬 웃돌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모두 죽겠지.”
강건이 담담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예. 그럴 겁니다.”
그녀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도, 아쉽지도 않습니다.
허나, 우리의 죽음이 별것 아닌 것이 될까 그게 두렵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걸세. 결단코.”
“….”
강건의 결연한 자세에 그녀 역시 숙연해졌다.
“내가 후방으로 향하는 길을 열 테니,
자네가 군과 헌터들을 안내해 대피해 회복을 꾀하게.”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날 걱정하는 건가? 하하하. 나 철권일세.
늙었다고 해도 겨우 이 정도에 쓰러지지는 않아.”
강건이 씩 웃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설화가 자신의 팀으로 뛰어가자,
그제야 강건이 참았던 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적지 않은 양의 피가 쏟아져 내렸으나,
강건은 황급히 그를 거칠게 닦아 흔적을 지워냈다.
“아직은 안 될 일이지. 아직은….”
강건이 중얼거렸다.
* * *
삐익. 삐익. 삐익. 삐익. 삐익. 삐익. 삐익.
연합군 지휘 본부에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붉은 빛이 계속해서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전면에 비친 스크린에도 붉은 점만이 가득했고
업무를 처리하는 인원들의 낯빛 역시 밝지 못했다.
누군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누군가는 상기된 얼굴로
전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고함을 치고 있었고,
몇몇은 아예 자리에 엎드려 울거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이를 어떻게 해야….”
으득.
창백한 얼굴의 요코하마.
그의 떨리는 두 눈이 스크린을 벗어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의를 뜻하던 노란색 지역이
이제는 위험 상태를 나타내는 붉은 색으로 변해 갔고,
몇몇 지역은 괴멸 상태를 나타내는 검은 색으로 표시됐다.
남은 헌터들의 수도 별로 많지 않았다.
최하위부터 중상위까지 모든 헌터들이 죽거나 다쳐,
더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거나 기동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최상위 헌터들 몇만이 겨우 남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언제 무너져 내릴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거기다 군 당국 또한 이는 마찬가지였다.
주요 군 시설은 모조리 습격당해 무너져 내렸고,
전투기와 전투함 등의 주요 무기 체계는 부서져 내렸으며
최후의 보루가 될 핵미사일 역시도 돌이 되어 가루가 됐다.
더 이상 여력은 없었다.
자그마한 승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
“?”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온 한성의 얼굴과 그의 생체 신호.
잦아들던 그의 신호가 다시 거세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끝났다 생각했건만, 아직은 끝이 아닌 듯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나.’
요코하마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가 세상을 구해내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한성은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한성이 이 상황에서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 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떠한 근거도, 이유도 없었으나 그럴 것만 같았다.
늘 사실과 정확한 근거에 기반한 생각과 말만을 하는
자신이 왜 이런 기대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부탁합니다. 이한성 헌터. 조금만 더 빨리….”
이를 악문 요코하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쾅!!!!!!!!!!!!!!!!!!!!!!!!!!!!!!!!!
한성과 투르바의 격전을 뒤로한 채,
타우한과 레그나토르가 벨루몬에게로 다가갔다.
“군사! 괜찮소?!”
타우한이 벨루몬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벨루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한성과의 전투로 기운이 약해졌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벨루몬에게 쏟아져 내리는 투르바의 권능은 여전히 거셌고,
타우한으로서도, 레그나토르로서도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까각… 깍.
거친 소리와 함께 벨루몬의 두개골에 금이 가고 있었다.
“제기랄… 신성의 힘을 함부로 쓸 수도 없고.”
타우한이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타우한의 신성이라면 벨루몬에게 쏟아져 내리는
투기와 압박을 밀어내거나 녹여낼 수 있을 것이나,
큰 힘을 쓰고 난 지금의 타우한에게 그만한 여력은 없었다.
거기다 이는 벨루몬에게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벨루몬 역시 타우한이 가진 생의 힘과 대척점에 있는
마기와 사기, 죽음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언데드였으니까.
거기다 평소와 달리 벨루몬의 몸이 쇠약해진 지금,
자칫 잘못했다간 신성의 힘에 완전히 소멸할 수도 있었다.
선택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내가 해보겠다.]
“…할 수 있겠소?”
레그나토르의 말에 타우한이 물었다.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주군께서 명하셨고, 난 그저 그 명을 해낼 뿐이다.]
레그나토르가 칼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해봅시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드리지.”
[부탁하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타우한의 품에서부터
토템들이 쏟아져 내리며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댔다.
평소에 그가 보이던 힘보다 몇 배는 밝았으며,
몇 배는 더 따스했고, 몇 배는 더 강인함이 느껴졌다.
쏟아져 내린 빛은 레그나토르와 그의 검으로 스며들었고,
안 그래도 날카롭던 그 기세를 한층 더 날카로이 만들었다.
쿨럭.
갑작스레 타우한이 기침과 함께 다량의 피를 뱉어냈다.
[타우한!]
“괜찮소. 재주에 얼마간의 생을 담아 그렇소.
모르긴 몰라도 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을 거요.”
타우한이 놀라 다가오려는 그에게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콰득.
검을 쥔 레그나토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느껴지는 힘은 적지 않았다. 아니 대단했고 상당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쩌면 투르바의 권능을
벨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문에 담아낸 생이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한 레그나토르가
솟구치는 감정을 누르고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참으로 그러하군.]
“쿨럭… 후욱… 후욱….”
타우한이 기침과 함께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레그나토르. 그대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소.”
[뭐지?]
“기회는 한 번뿐이오.”
[…?]
“내겐 더 이상 남은 여력이 없소.
남은 마지막 한 줌의 힘은 주군을 위해 써야만 하기에.”
[그렇겠지.]
레그나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을 담고 그대의 강인함을 담은 그 검은
적어도 한 번은 놈의 힘을 갈라낼 수 있을 것이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바람이고, 내 생각일 뿐,
정말로 그대가 그 힘을 갈라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소.”
[나 역시 그를 장담할 순 없다. 허나.]
철컥.
레그나토르가 검을 쥐어 잡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주군께서는 단 한 번도]
[내가 하지 못할 일을 맡기신 적이 없으셨다.]
[그렇기에 난 주군을 믿고 그저 검을 휘두를 뿐이다.]
“….”
[쉬고 있어라. 군사를 데려올 테니.]
레그나토르가 전면에 나서며 검을 들어 올렸다.
“부탁하겠소.”
[그러지.]
철컥.
벨루몬을 바라보는 그의 눈과,
벨루몬을 향해 들어 올린 그의 검 끝은
단 한 치도, 깃털만큼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의 실패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듯이.
‘주군을 위하여.’
서걱.
그의 검이 태산과도 같이 무겁게, 물을 가르듯 부드럽게,
천지가 흔들리듯 강하게, 벼락이 내리치듯 빠르게 내리쳤다.
눈으로 좇기조차 힘든 일격이었으나,
이는 분명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단순한 베기였다.
‘…실패인가?’
숨죽여 이를 지켜보던 타우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검은 이미 떨어져 내렸건만,
이렇다 할 변화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벨루몬은 역시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때.
카가각.
뭔가가 금이 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벨루몬의 상공에서
유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빛 무리가 터져 올랐고
이내 한 줌의 연기가 되어 어딘가로 유유히 사라져 갔다.
툭. 달그락.
이에 벨루몬의 육신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됐다!!!!!!!!”
타우한이 놀라 소리쳤다.
[오래 기다렸나.]
어느새 벨루몬의 곁에 간 레그나토르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들에게 구원을 받을 줄은 몰랐군. 빌어먹을.”
그가 레그나토르가 내민 손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투둑.
짧은 순간이었으나 충격은 상당했던 모양인지
두개골을 비롯한 온몸의 뼈들이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늦어서 미안하군.]
레그나토르가 벨루몬을 부축하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고맙다.”
[뭐?]
스치듯 지나간 작은 소리. 그러나 분명 벨루몬의 것이었다.
“괜찮소? 군사!!”
지친 얼굴과 몸을 한 타우한이 절뚝이며 다가왔다.
“얼마나 담았느냐.”
벨루몬이 한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린 듯
희미한 미소를 하던 타우한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얼마나 담았냐 물었다.”
“…못해도 열 해는 될 거요.”
“이런 멍청한!!!!!!”
콰득.
고함과 함께 그의 두개골이 또 한 번 부서져 내렸다.
“네놈이 죽었으면 어쩔 뻔했느냐!!
어찌 그리 멍청하고 어리숙한 선택을 했어!
날 구한답시고 네놈이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
게다가 내게 쏟을 힘이 있었더라면 주군에게 쏟았어야지!”
벨루몬이 고함을 질러댔다.
“…주군만큼이나 그대도 내게 소중한 이요.
설령… 똑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져도 난 그리할 것이오.”
“…이런 멍청한.”
벨루몬이 더는 말을 못 하고 몸을 떨었다.
그의 마음이 고마웠기에. 그의 말이 너무나 따뜻했기에.
[가자. 주군께로.]
레그나토르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