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 * *
쾅!!!!
백색의 갑옷을 입은 투사 하나가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마물들을 후려갈겨 댔다.
마치 은백색의 빛 무리가 나다니는 것 같아 보였다.
강건이었다.
전에 비해 빈약해진 몸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그의 주먹은 철권, 강권이라고 부를 법했다.
그저 내지른 주먹 하나에 그보다 큰 덩치의 마물들이
큰 압력에 짓눌리다 터지듯 힘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갔고,
단단한 외피나 갑옷들은 깡통마냥 찌그러진 채 부서졌으니까.
“후우… 전장에서 너무 오래 물러나 있었나.”
그가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보구만.”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얼마나 죽인 것일까.
그의 근처에는 수없이 많은 마물들의 사체가 늘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흥건하다 못해 질퍽거릴 정도로
마물들의 피와 체액, 내장들이 흘러넘쳐 역겨운 모습이었다.
쾅!!!!!!!!!!!!
멀리서 들려오는 큰 폭음에 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박 실장!! 죽었나?!”
“아직은 아닙니다.”
강건의 고함에 그의 이어폰으로 박 실장의 말이 들려왔다.
“다행이군. 그쪽 상황은 어떤가?”
“좋지 않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
무리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놈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계속 그렇게만 하게.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만 해.”
“알겠습니다.”
“체력 및 마력 회복 포션은 a―14구역에 가져다 놨으니
헌터들에게 알아서 필요한 만큼 충분히 충당하라 전해주게나!”
“예!”
“마지막으로, 죽지 마시게. 박 실장.”
“…회장님께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삑.
대답과 함께 박 실장의 신호가 끊어졌다.
쿠와아아아악!!!
사체들의 산 너머로 마물들의 고함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후우. 잠깐도 쉴 시간을 안 주는군.
이 늙은이가 뭐가 그리도 좋다고 달려드는지 원.”
버릇처럼 건틀렛과 방어구의 상태를 살핀 그가,
별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그래. 와라. 이 늙은이가 기꺼이 놀아줄 테니.”
쾅!!!!!!!!!!!!!!!!!!
그의 주먹이 사체로 이루어진 산을 후려갈겼다.
* * *
쿵!!!!!!!!!!!!
선공은 늘 그랬듯 레그나토르였다.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나아간 그의 검이
긴 호선으로 잔상을 남기며 투르바의 목을 향했다.
쾅!!!!!!!!!!!
그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먼지를 걷어내듯
레그나토르의 검을 가벼이 쳐 내고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 급할 필요 없잖나. 천천히 즐기자고. 응?”
‘…?!’
손아귀가 찢어져 나갈 것 같은 충격에
레그나토르의 안광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분명 전보다 강해진 자신이건만,
결과는 전과 조금도 달라져 있지 않았다.
전보다 묵직해진 건 자신의 검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투르바가 자신을 향해 질러낸 검은,
자신의 공격에 대한 방어 본능에서 휘두르거나
그저 우연하게, 운 좋게 들어맞은 눈먼 검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의 검을 읽고 목적을 가지고 휘둘러낸 검이었다.
비록 모양새도 다듬어지지 않았고,
무리(武理)도, 검에 대한 이해도 조금도 없는
단순 무식한 휘두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건만,
그의 검이 보이는 힘과 속도는 그를 넘어서는 무엇이었다.
‘겨우 이 정도에 흔들리지 마라. 명심해라. 넌 주군의 검임을.’
레그나토르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자,
흔들리는 검의 끝 역시도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뭐야? 끝났나?”
[그럴 리가.]
비릿한 웃음을 짓는 투르바에 대답과 함께 다시 짓쳐 들었다.
쿵!!!!!!!!!!!!
살을 에는 듯한 서늘하고 날카로운 그의 검이
투르바를 노리고 섬전처럼 끊임없이 빠르게 쇄도했다.
까가각!!!!
위에서 짓누르는 여섯의 대검에
레그나토르의 검이 부러질 듯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압도하던 방금 전과 달리
대적할 수 없는 힘에 레그나토르의 손이 떨려댔다.
“왜. 벌써 지친 건가?”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며
레그나토르의 녹색 안광이 세상을 불태울 듯 크게 타올랐다.
[어림없지.]
쾅!!!!!!!!!!!!!! 쾅! 쾅! 쾅! 쾅!
투르바의 검을 쳐낸 레그나토르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일라치면 어김없이 검이 향했고,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벌려 틈을 만들어냈다.
손이 떨리고 충격에 전신이 흔들려도 나아갔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무식하리만치 큰 여섯의 대검과 흑색의 검 하나가
샛노란 불똥을 빚어내며 우레와도 같은 굉음을 냈다.
단 한 번의 부딪침만으로도 땅이 뒤집혔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검에서 인 풍압만으로도 살이 찢어질 것 같건만,
그를 쳐 내는 투르바의 얼굴에는 웃음만이 가득했다.
“재밌군.”
투르바의 검 하나가 레그나토르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던 그때.
탕!!!!!!!
카각. 팅!
신중하게 쏘아 낸 티에라의 탄환.
그러나 나아가던 탄환은 그에게 닿지 못한 채,
그가 내지른 검 하나의 끝에 닿아 샛노란 불똥으로 피어났다.
“?!”
최후의 보루가 가진 힘을 의식해서일까.
그는 탄환을 갈라내는 것 대신, 탄환을 흘리려는 듯 검을 비틀었다.
이에 탄환은 검면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렀고,
이내 검이 향하는 방향을 향해 궤적이 틀어져 튕겨져 나갔다.
이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졌다.
“…미친.”
티에라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두 번은 안 통한단다. 아이야.”
쾅!!!!!!!!!!!!!!!!!
레그나토르에게서 눈을 떼지조차 않은 그가
폭발하듯 터져 오르는 푸른 화염을 등진 채로 중얼거렸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티에라의 일격에 맞추어 틈을 만들려는 듯
레그나토르가 세차게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과 태도로
거칠고 사나운 레그나토르의 검을 받아내고 있었으니까.
“빛이여. 환희여. 광명이여. 이곳에 깃들라!”
타우한의 주문 영창이 끝나자,
칸의 두 방패에는 다시금 신성의 빛이 환하게 어렸다.
“우랴!!!!!!!!!!!!!!!!!!!”
팡!!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칸의 방패 하나가
투르바의 목을 향해 탄환처럼 맹렬한 기세로 나아갔다.
이미 짜놓은 공격의 합 중 하나였던 듯,
방패가 닿기 직전까지 투르바를 공격하던 레그나토르가
빠르게 뒤로 빠지며 방패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 주었다.
쾅!!!!!!!!!!!!!!!!!!
방패가 만들어낸 묵직한 충격음.
콰드득.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던 투르바의 두 발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5cm 정도 뒤로 물러났다.
치이익.
방패에 어린 신성의 빛에
투르바에게서 아지랑이처럼 뿜어져 나오던
마기와 사기들도 비명을 지르며 녹아 사라져갔다.
쾅!!!!!!!!!!!!!!
방패를 쳐낸 투르바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밀려났다는 것에 대한 짜증과
상극의 힘에 대한 불쾌감이 섞인 것이리라.
팡!!!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이번엔 복부를 노린
나머지 방패 하나가 빠른 속도로 그에게 쇄도했고,
그에 의해 내쳐진 방패는 다시 칸에게로 되돌아갔다.
쾅!!!!!!!!!
두 번째 충격.
버티느라 단순히 밀리기만 하던 전과 달리,
이번의 일격에는 아예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됐다!”
쿵!!
철컥.
칸의 외침과 함께 레그나토르의 검이 날아들었고,
티에라의 탄환이 빠르게 장전되어 발사될 준비를 마쳤다.
“벌레들이 모여 봐야 벌레들일 뿐인 것을!!!!”
쿵!!!!!!!!!!!!!!!!!
고함과 함께 그가 바닥을 내리찍자,
바닥이 무너져 내리며 폭발하듯 먼지가 피어올랐고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더미로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놈이 사라졌다. 모두 주의…!]
레그나토르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티에라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오싹.
“…?!”
놀란 티에라가 칠흑의 쌍둥이 포로 총을 갈이 하려던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여섯의 검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티에라!!!!!!!!!!!!!!!!!!”
타우한과 칸의 고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레그나토르가
급히 그녀에게 내달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제 절반도 채 남아 있지 않은 거리에 그가 닿았을 때,
굉음과 함께 그녀가 서 있던 지반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기에.
쾅!!!!!!!!!!!!!!!!!!!!!!!!
[이런…?!]
“안 돼!!!!!!!!!!!!!!!!!!”
당황한 레그나토르의 음성과 칸의 절규가 이어졌다.
그러나 곧바로 들려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하… 또 네놈이냐. 성가시기 짝이 없군.”
구름처럼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투르바의 안광이 떠올랐다.
그의 말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황망한 칸과 타우한의 얼굴.
찰칵.
“음?”
익숙지 않은 금속성에 투르바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자,
그곳엔 푸른빛으로 밝게 타오르는 구체 하나가 보였다.
“이런 깜찍한….”
쾅!!!!!!!!!!!!!!!!!!!!!!!!!!!!!!!!!!!!!!!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체가 폭발을 일으켰다.
푸른 화염은 흙먼지를 밀어내며 거세게 피어올랐고,
맹렬히 타올라 투르바의 몸 전체를 집어삼켰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칸과 타우한이
멍청한 얼굴로 상황을 파악하려 하고 있을 때,
후방에서부터 벨루몬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상황 파악이 이리 느려서야 원.
이래서 내가 네놈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군사…?!”
“저 괜찮아요.”
“티에라!!!!”
벨루몬의 곁에 창백한 얼굴의 티에라가 보였다.
벨루몬의 힘이 자신을 감싼 그 찰나의 순간,
그 의미를 알아챈 그녀가 급히 수류탄을 뿌렸고
워프를 통해 벨루몬의 곁으로 몸을 옮긴 것이었다.
“다행이오. 다행이야.”
타우한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이 멍청한 것들아.
겨우 저따위 잔꾀에 흔들려서 어쩌겠다는 거냐.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벌써 늘어지지 마라.”
벨루몬이 엄하게 타우한들을 질책했다.
“아… 알겠소.”
“알겠다.”
[그러지.]
그의 말에 레그나토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꾀는 네놈들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투르바가 화염을 헤치고 나오며 중얼거렸다.
그는 제 육신을 불사르고 있는 푸른 화염을
마치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무심하게 툭툭 털어냈다.
“잊지 마라. 투르바. 이 빌어먹을 마기 덩어리여.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이놈들을 건드릴 수 없음을.”
“그거야 모를 일이지.”
투르바와 벨루몬의 안광이 타올랐다.
* * *
[재생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휴면 상태가 해제되지 않습니다.]
‘제기랄.’
체력과 마력 게이지의 수치가
전체 체력의 8할을 넘어간 시점임에도,
한성의 육신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억지로 의식을 깨우려 해봤지만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육신과 의식의 중간에 개입해
둘의 사이를 완전히 막고는 연결을 차단한 듯했다.
‘재생의 완료라는 게 완전한 회복을 뜻하는 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한성의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다오. 조금만.’
한성의 바람은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