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 * *
철컥.
[움직인다. 다들 준비하도록.]
레그나토르가 검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타오르는 그의 녹색 안광은 바위 더미에 깔려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투르바에게 가 닿아 있었다.
“제기랄. 쉴 틈을 주지 않는군.”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칸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방패를 방어형으로 전환하고는
빠르게 벨루몬들의 전면으로 나아가며 중얼거렸다.
“일어라. 통곡의 벽이여. 솟아라. 철의 노래여.”
그의 말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그의 방패에
벨루몬들 모두를 감싸고도 남을 회백색 기운이 어렸다.
어린 기운은 굳고 단단해 철의 벽과도 같았고,
그 누구라도 쉽사리 뚫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전투 준비를 끝마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철컥.
티에라의 손에는 언제 바꾼 건지
장전까지 끝낸 상태의 저격 소총이 들려져 있었고,
등에는 역시 장전을 마친 돌격 소총이 매여 있었다.
끼릭.
총구의 끝은 투르바를 향한 채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방아쇠에 얹은 손가락은 털끝만큼만 움직여도
바로 발사될 정도로 팽팽하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피어라.”
레그나토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하던 타우한이 말을 마쳤다.
꽤나 큰 주문이었던 듯,
그의 이마에서는 한 줄기의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그에게서부터 색색의 기운들이 무섭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강화의 술과 강체의 술, 방호와 신성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버프를 시전한 듯했다.
거기다 그는 그 짧은 순간에
벨루몬들의 개별 특성에 맞는 버프를 시전한 듯 보였다.
전면에서 싸울 레그나토르와 칸에게는
육체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버프를.
벨루몬에게는 마법 관통력을 높이고
마력 재생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버프를.
티에라에게는 물리 관통력을 높이고,
기민한 기동을 할 수 있게 이동 속도 향상 관련 버프를.
자신에게는 마력 재생 능력을 높이고,
물리적, 마법적 방어력을 높일 수 있는 버프를 부여했다.
거기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천둥의 술을 쓰기 위해 구름까지 불러 모은 상태였으니까.
쿠르릉.
하늘 전체를 뒤덮을 듯,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이에 반해 벨루몬은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고 한다면 목걸이와 반지 등
그의 몸에 있는 모든 장신구들이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리 캐스팅해 저장해 놓은 마법들이나, 여분의 마력들을
조금이라도 빨리 꺼내 쓸 수 있도록 가동해 놓은 것이리라.
후웅.
탁.
스태프를 꺼내든 벨루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상대하고자 하는 적은
주군께서도 쉬이 이기시지 못하셨으며,
아직 제 저력을 모두 드러내지조차 않은 괴물이다.”
벨루몬의 말에 좌중이 고요했다.
“그렇기에 그 누구라도 놈을 상대함에 있어
무리하거나 독단적인 행동을 하는 건 허락지 않겠다.”
“….”
“명심해라.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제거가 아니라,
주군께서 다시 자리하실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라는 것을.”
“….”
어떠한 경우에도 늘 자신만만하고,
심지어는 그를 넘어 오만하기까지 한 그였건만.
지금의 그는 지나칠 정도로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현 사안을 그만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단 하나의 작은 어그러짐만으로도,
일 전체를 그르칠 수 있음을 잊지 말도록. 알겠나.”
[명심하지.]
“알겠다.”
“알겠소.”
“알겠어요.”
벨루몬의 말에 레그나토르들이 답했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곳에 네놈들의 목을 걸어라.”
벨루몬의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목숨이 위태롭다 해도 함부로 싸우기를 멈추지 마라.
한 번이라도 더 방패와 칼을 휘두르고, 탄을 쏘고, 벼락을 내려라.”
벨루몬의 안광이 하늘을 태울 듯 타올랐다.
“너희의 죽음은 당장에는 주군께 슬픔이 될 것이나,
후에는 주군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토대가 될 것이며,
그분의 피와 살이 되어 영광된 승리로 피어나게 될 것이다.”
“….”
“나 역시 단 한 줌 마력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싸우겠다.
비루하고, 비참한 모습이 되어서라도 싸우겠다.
또한… 나 역시 주군을 위해 죽겠다.”
“….”
벨루몬들의 눈이 전의로 타올랐다.
“그러니 나와 함께해다오.”
“….”
“주군을 위하여.”
[주군을 위하여.]
“주군을 위하여.”
벨루몬의 선창에 모두가 그를 따랐다.
“지루하기 짝이 없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고 굵은 목소리.
투르바였다.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니건만,
그가 뿜어내는 폭발적인 마기에 벨루몬들은 소름이 끼쳤다.
오싹.
“쉴 만큼 쉰 것 같은데, 다시 해야지.”
“투르바…!”
벨루몬들의 안광이 타올랐다.
쿠구구구궁. 쾅!!!!!!!!!!!!!!!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 더미가 요란하게 터져 나갔고,
그와 동시에 용솟음치듯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투르바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새겨져 있던 많은 상처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헝클어진 것이라고는 금빛 머리칼과 바지의 가죽뿐이었다.
“덕분에 잘 쉬었다. 고맙군.”
그가 칸을 보며 장난스레 눈을 찡그렸다.
“….”
‘제길.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나.’
벨루몬의 안광이 흔들렸다.
“주인이 부족하고 나약하니 개들이 고생이로군.”
벨루몬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탐욕과 살의로 번뜩였다.
“듣기 역겨워 구역질은 났으나, 인상 깊은 연설이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충성이고, 안타까운 모습이더군. 킥킥.”
투르바가 벨루몬을 보며 이죽거렸다.
[부족한 건 네놈이지, 주군이 아니시다. 투르바.]
레그나토르의 녹색 안광이 확 하고 타올랐다.
“부족하다라… 재밌군.”
투르바의 입매가 비틀렸다.
“부족한 내게 짓밟힌 그놈은 뭘까. 모자란 놈인가?”
투르바가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너무 많이 틀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만,
첫째로 우리는 이라 놈들처럼 힘에 굴종하는 개가 아니다.”
“그러면?”
“그분의 곁을 지킬 든든한 동료이며,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그분의 곁에 설 가족이고,
주군께서 걷고자 하시는 길을 함께 걸을 가신이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참으로 유치하군.”
투르바가 비웃었다.
“둘째,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짓밟힐지는 그때 가 봐야 아는 법이지.
벌써부터 아가리를 놀리는 걸 보니 꽤나 두려운가 보군.”
벨루몬이 다시 이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백번 양보해 우리가 개라고 치지.
그런데 그거 아나? 개는 주인을 닮는다는 말이 있음을?”
“…흠?”
“정녕 부족하고 나약한 게 주군이라면,
그를 닮은 우리에게 패배한 네놈의 개들은 무엇이고,
그들이 닮은 네놈은 도대체 무엇이지? 참으로 궁금하군.”
“카하하하. 개보다 못한 놈쯤 되겠지.
군사. 거 말 한번 잘했다. 속이 다 시원하구만.”
벨루몬의 독설에 칸이 웃었다.
“확실히… 제 주제도 모르고 지껄이는 게 주인을 닮긴 했어.”
투르바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뭐라?”
그의 말에 타우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지금을 즐겨라. 어차피 네놈들이나
네놈의 주인이나 내게 짓밟혀 사라질 것은 변함없으니까.”
씨익.
그의 한쪽 입매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그나저나 듣자 하니 재밌는 말을 하더군.
그 인간 놈이 날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느니,
너희 버러지들이 날 상대로 시간을 끌겠다느니 말이야.”
“….”
“정말 궁금해서 묻는데,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정말?”
툭. 툭.
그가 아무렇지 않게 먼지를 털며 말을 이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네놈들의 주인은
지금까지 날 때려눕히지 않고 뭘 하고 있었을까.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가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
“그건 말이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기 때문이란다.”
투르바가 키득거리며 벨루몬들을 바라보았다.
“거기다 네놈들의 주인조차 하지 못한 일을
네놈들이 떼로 덤빈다고 해서 해낼 수 있을까?”
“….”
“뭐, 그 자그마한 이빨과 손톱들이
따끔할 수는 있겠지. 꽤 아플 수도 있겠고.”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벌레는 벌레란다. 밟아 죽이면 그만일.”
철컥.
“벌레에게 머리가 꿰뚫리고 나서도 그런 말을 할지 궁금하군요.”
티에라가 그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두고 보자고.”
그가 이빨이 드러나게 웃으며 답했다.
* * *
쾅!!!!!!!!!!!
‘…제길.’
체력은 이제 겨우 절반이 조금 더 차오른 상황.
다시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한성의 마음이 급해져 갔다.
게다가.
‘…결국은 실패했나.’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천라지망의 힘이
주인을 잃은 그림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음을 알려 왔다.
저지선이 무너져 내렸고,
인간들은 피하지 못한 채 죽어 나가고 있다는 뜻이리라.
습관처럼 입술을 짓씹으려 했으나, 씹을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의식의 편린이기에.
‘제길.’
한성의 머릿속에 세상의 그림자들이 그려졌다.
한성과 단 한 번이라도 연이 닿았던 헌터들 대부분이
죽거나 크게 다쳤고, 살아있다고 해도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미 뉴욕.
죽은 것인지 험프의 그림자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나이트의 그림자뿐.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으나, 그는 지쳐 보였다.
레그나토르의 아홉 기사단 역시,
가장 강한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소멸된 상태였다.
전역으로 퍼지는 마물들을 막아내려 애를 썼지만,
수십만에 이르는 이들을 겨우 아홉이 막아낼 리 없었다.
‘…미안하다. 부족한 날 용서해라.’
기사단들의 얼굴을 떠올린 한성이
차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인도. 델리.
링 링의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다.
굽타의 그림자 역시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샤오란과 팽 린의 그림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벨루몬의 불사의 군단은 더 이상 불사가 아니게 되었다.
제아무리 고위급 리치라 해도, 마력은 유한하기에….
마력이 부족해지고, 더 이상 소환할 여력이 없어지자
세상을 뒤집을 것 같던 언데드 모두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리치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제 주군을 위하여
먼지처럼 남은 마력을 짜내 마물들을 향해 쏟아냈고,
그렇게 마물들의 격랑에 휩쓸려 고통스레 죽어야 했다.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해.’
브라질, 상파울로.
나가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마사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믿었던 마키토의 그림자마저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마커스의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를 따르던 유럽 헌터들 전원의 그림자 역시
모두 무(無)로 돌아간 건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콘스탄틴과 해밀턴의 그림자가
여전히 건재하며 아직은 선명하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제 곧 그들에게로 수만의 마물들이 쏟아져 내리겠지.
‘버텨주십시오. 제발.’
아프리카. 말라위.
애림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
별 감정이 없다 생각했건만….
지난날 팀으로 함께했던 시간 때문일까.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고 가슴 한편이 시렸다.
힐러의 부재 때문인지 나머지 성용들의 그림자들이
언제 꺼질지 모를 촛불처럼 꽤나 불안하게 흔들렸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너무나 화가 났다.
분노에 이성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신을 죽이겠다는 오만한 이의 탐욕 때문에,
왜 아무런 죄 없는 이들이 고통받다 죽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신은 왜 이들을 보면서도 그저 방관하고만 있는지.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반드시 네놈만큼은 죽여주마. 투르바.
네놈이 숱한 이들로부터 앗아간 생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마.’
‘그리고 당신에게도 역시….
언젠가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신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