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 * *
“귀찮게 하지 마라. 이 버러지 새끼들아!!!!”
우르릉.
투르바의 노호성에 천지가 뒤흔들렸다.
빙글거리며 웃던 전과 달리,
그의 얼굴은 꽤나 붉어진 채로 일그러져 있었다.
거기다 몸에는 전에 없던 생채기들이 생겨나 있었다.
한성과의 격전 때 생긴 상처는 아니었다.
그건 이미 회복된 지 오래였으니까.
벨루몬들이 새긴 상처이리라.
카가가각… 쾅!!!!!!!!!!
무식하리만치 거대한 투르바의 검이
레그나토르의 검을 스쳐 지나며 샛노란 굉음을 흘려댔다.
서슬 퍼런 기세에 놀랄 법도 하건만,
레그나토르의 안광은 한 치 흔들림 없이 평화로웠다.
그는 그저 고요히 검을 휘둘러 적을 가를 뿐이었다.
카각! 쾅!!!!!!!!
레그나토르가 검을 빗겨 세워 그의 검을 흘려내자,
검은 레그나토르를 지나치며 속절없이 흙바닥만을 내리쳤다.
“이런 쥐새끼가…!”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그의 안광이 붉게 떠올랐다.
투르바가 거센 풍압을 일으키며
다시 레그나토르에게 검을 휘두르려던 그때.
탕!!!!!!
티에라가 쏜 탄환이 흙먼지를 뚫었다.
핏.
투르바의 귓불이 찢겨 나갔다.
“쳇. 그걸 피했나.”
철컥. 팅.
티에라가 아쉽다는 듯한 얼굴로 탄환을 재장전했다.
“…하.”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다 생각했던
투르바의 얼굴이 참혹할 정도로 크고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감히….”
그에게서 거친 기파가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에게
자신의 유희를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은 바뀌었다.
한낱 인간 따위에게 종속된 주제에,
자신의 힘을 부여받은 이라들을 꺾을 정도면
벌레만도 못한 것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이내 흥미로 바뀌었다.
떼로 덤비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지,
불나방처럼 자신에게 덤벼대는 꼴들이 재미있었으니까.
짧을 거라 생각했던 유희가 좀 더 이어지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벌레들의 저항은 자신의 생각보다 격렬했으니까.
* * *
벨루몬과 레그나토르, 티에라의 공격의 합은
강자인 투르바를 상대로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상당히 완성도 높은 짜임새를 보이고 있었고,
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다.
거기다 벨루몬들의 공격 하나하나가 꽤나 날카로워
이를 가볍게 흘려내기란 투르바라 해도 결코 쉽지 않았다.
전면에서는 레그나토르가 그를 압박하며
찢어 죽일 듯한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검을 휘둘렀고,
후방에서는 그런 레그나토르를 서포트하듯 티에라의 총이
투르바의 미간과 심장을 향해 거칠게 포화를 내뿜어댔다.
이에 성가신 티에라를 먼저 제거하려 해도,
그때마다 귀신처럼 나타난 벨루몬이 그녀를 향한 공격을
저지하거나 흘려내고 밀어내고 마법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그들의 합은 완벽해 보였다.
크와아아아아악!!!
투르바가 온몸으로 제 흉포함을 뿜어댔다.
쾅!!!!!!!!!
탕!!!!!!!!!
짐승의 노기에도 벨루몬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짐승을 베듯 베고, 휘두르고, 쏘았을 뿐이었다.
“건방진…!”
레그나토르의 옆구리에 투르바의 검이 닿았다.
[흡…!]
레그나토르가 급히 검의 날을 세워 이를 막아냈지만,
투르바의 검에 어린 무식한 완력마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쾅!!!!!!!!!!!!!!!
레그나토르의 몸이 건너편 산등성이에 가 처박혔다.
애초에 그를 베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거나 쳐 내는 것이 목표였던 듯했다.
“네년부터 죽여주마.”
티에라를 향한 투르바의 안광이 서늘했다.
쾅!!!!
날 듯이 뛴 그가 순식간에 티에라의 머리 위에 다다랐고,
그의 무식하리만치 큰 검이 그녀를 머리를 쪼개려 할 때.
여러 음성이 뒤섞여 들려왔다.
“그렇게는 아니 되오.”
“그렇게는 안 되지!!!”
“그렇게는 안 될 일이지.”
치직.
투르바의 후방에서 날아온 검붉은 선 수십이
검과 그의 두 손을 묶고는 강하게 잡아당겼고,
티에라의 전면에는 언제 나타난 건지 방패가 세워져 있었다.
방패의 위에는 찬란히 빛나는 금빛이 덧씌워져 있었다.
타우한의 신성이었다.
내리치던 그의 손은 검붉은 선에 의해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한 채로 휘둘러졌고,
그 아래에서는 방패가 치솟으며 그 손을 막아냈다.
쾅!!!!!!!!!!!!!!!!!!!!!!!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큰 굉음.
그러나 방패는 부서지지 않았다.
아니, 조금의 금조차도 가 있지 않았다.
“건방진….”
투르바의 목소리가 짜증으로 들끓었다.
그때, 방패의 위로 붉은 머리 하나가 나와 중얼거렸다.
“이거나 처먹어라.”
“뭐?”
칸의 말에 투르바가 미간을 좁혔을 때,
복부에서 느껴보지 못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쾅!!!!!!!!!!!!!!!!
칸의 방패로부터 인 금빛 섬광이
폭발하듯 투르바를 향해 내쏘아진 것이었다.
방패가 쌓은 에너지와 타우한의 신성이 합쳐진 결과였다.
투르바는 몸이 활처럼 휜 채, 끈 떨어진 연 마냥
빠른 속도로 나아가 반대편 산등성이에 가 처박혔다.
쿠르릉.
충격을 이겨낼 수 없었던 산은 그대로 무너졌고,
그것의 머리 위로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괜찮나.”
“덕분에요.”
칸이 티에라를 향해 돌아보자,
그곳엔 권총 두 자루를 들고 있는 티에라가 보였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상황을 대비한 것이리라.
후웅.
“주군은 어떠하시더냐.”
칸의 곁에서 모습을 드러낸 벨루몬이
바위에 처박힌 투르바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한성의 안부를 묻는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고비는 넘겼소. 상처도 모두 회복되었고.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면 완벽히 회복될 거요.
그러니 군사께서는 너무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어느새 곁에 다가온 타우한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콰득.
벨루몬의 쥔 주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뭐라는 것이냐. 난 걱정한 적 없다.
주군께서는 이미 몇 번이고 죽음을 이겨내셨다.
겨우 이 정도에 쓰러지실 만큼 나약한 분이 아니시다.”
벨루몬이 몰래 한숨을 내쉬다,
어떤 생각에 닿은 것인지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찌 네놈들이 이곳에 있는 것이냐?
내 분명 주군께 가 그분의 곁을 지키라 말했거늘!”
“주군이 자신은 괜찮으니 가서 너희를 도우라 했다.
알잖나. 주군의 고집을. 우리가 그를 무슨 수로 막겠나.”
벨루몬의 추궁에 칸이 머리를 긁으며 불퉁하게 답했다.
“주군의 곁에 방호와 신성을 겹겹이 쳐 두었소.
투르바 놈이라 해도 쉽게 건드리진 못할 테니 걱정 마시오.”
“…그랬나. 타우한 네놈의 말이라면… 맞겠지.”
“주군 생각의 반만이라도 우리를 좀 생각해주면 좋겠군.”
칸이 코웃음을 치며 샐쭉하게 말했다.
“닥쳐라. 칸. 투르바 놈에게 죽기 전에
내 손에 먼저 죽고 싶은 것이냐? 원한다면 그리해주지.”
벨루몬이 버럭 소리쳤다.
“그럴 리가.”
칸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민망함을 피하기 위한 벨루몬의 농담임을 안 것이리라.
“주군다우시네요. 괜찮으시다니 다행이고요.”
티에라가 다행이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행이라 말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어느새 벨루몬들의 곁으로 다가온 레그나토르가 입을 열었다.
“네?”
레그나토르의 말에 티에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놈은 여전히 건재하다.]
[너라면 선명히 느낄 수 있을 텐데?]
사수의 눈을 의식한 듯한 그의 말에
티에라의 시선이 빠르게 투르바의 흔적을 좇았다.
흠칫.
알 수 없는 오한에 티에라의 어깨가 떨렸다.
바위틈에 처박혀 모습조차 보이지 않건만, 분명 느껴졌다.
생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가.
구역질이 날 것같이 지독한 살의와 악이.
끝도 없이 침전하고 또 침전하고 있는 어둠이.
그의 말이 맞았다.
짐승은 조금도 상처 입지도 다치지도 않았다.
그저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주군께서 몸을 회복하시기 전까지,]
[우리가 저 괴물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하… 하지만 놈은 분명 우리에게 압도됐었다.
거기다 이번 일격으로 꽤나 고통받고 있을 거고.”
칸이 불퉁하게 답했다.
[아니. 그를 성가시게 했을지언정,]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를 압도한 적이 없다.]
[그리고 놈이 겨우 이 정도에 휘청할 거였다면,]
[우리 모두를 아우르신 주군께서 고전하셨을 리 없겠지.]
“그건 레그나토르의 말이 맞다.”
벨루몬 역시 레그나토르의 말에 동의했다.
“놈의 힘은 결코 저것이 다가 아니다. 곧… 알게 되겠지.”
벨루몬의 안광이 타올랐다.
* * *
[경고 : 육체가 수용 가능한 충격을 초과,]
[현 시간부로 일시적 휴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재생이 끝나기 전까지는 휴면에서 깨어날 수 없습니다.]
‘…뭐?’
선명하게 들리는 알림에 한성이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를 만지려 해도 만져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몸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뭐지? 분명… 의식은 있는데… 설마?’
하나의 가설. 생각하는 자가 떠올랐다.
기절과 함께 한성의 육신이 말 그대로 정지되자,
생각하는 자로 인해 나뉘어 있던 의식이 움직인 것이었다.
‘상태창.’
한성의 부름에 다행히도 상태창이 떠올랐다.
‘38%… 생각보다 더디다.’
좀처럼 늘지 않는 체력 게이지에 한성은 초조하기만 했다.
만전을 기한 상태로 싸웠어도 이기지 못했던 그를,
절반조차 되지 않는 체력으로 싸워 이길 리 없었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한성의 눈이 흔들렸다.
쾅!!!!!!!!!!!!!!!!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들려오는 충격.
한성의 불안은 전보다 더 크게 요동쳤다.
벨루몬들을 지켜내지 못할까,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현재 수중에 남은 카드는… 그거 하나뿐인가.’
어둠 속에서 한성은 미쳐버린 자를 떠올렸다.
아직 단 한 번 시도조차 해본 적 없었던 힘.
그렇기에 육체에 얼마나 많은 부하가 걸리게 될지
예측할 수조차도 없는 힘.
통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힘.
오히려 자신이 잡아먹힐지도 모를 정도의 힘.
그렇기에 두려웠다.
그러나 이는 수반될 고통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만일 이마저도 놈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통한다 하더라도 제한 시간 내에 그를 제압해내지 못한다면.
충분치 못한 역량 때문에 페널티가 생기게 된다면.
포식의 힘에 압도당해 그것에 잡아먹히게 된다면,
여러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가정들 중 단 하나라도 이루어진다면
그다음의 기회는 다시는 한성에게 주어지지 않겠지.
한성의 두려움은 오로지 그것이었다.
“빌어먹을….”
상태창을 살피던 한성의 눈에 퀘스트 창이 보였다.
[퀘스트 : 패왕(霸王)의 즉위를 위하여.]
[퀘스트 내용 : 패왕(霸王)의 자격을 증명하시오.]
[퀘스트 조건 1. 왕의 친위대 결성 (5/5)
[퀘스트 조건 2. 세계수의 인정(1/1)]
[퀘스트 조건 3. 왕의 표식 획득(1/1)
[퀘스트 조건 4. 지지 세력 구축 (5/5)]
[퀘스트 조건 5. 레벨 (99/100)]
[퀘스트 조건 6. 업적 ‘흑의 군주’ 획득 (1/1)]
[퀘스트 완료 보상 : 최후의 각성 퀘스트로의 연계.]
[퀘스트 실패 페널티 : 최후의 각성 퀘스트 연계 기회 박탈.]
“…후.”
미치도록 아쉬웠다.
채워지지 않은 단 하나의 조건. 레벨 100.
1개의 계단만 더 오르면 될 일이건만,
지금의 한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육체가 움직이지도 않을뿐더러,
투르바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패왕이 무엇인지,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었으나
최후의 각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3차 전직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 분명했기에.
“제기랄….”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한성은 강박증이 있는 사람처럼 체력 게이지를 살폈다.
45%. 여전히 부족했다.
세계수의 힘이 어린 반지를 받은 데다,
레벨업 덕에 전보다 체력이 상당 부분 증가했으니,
체력의 회복에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건만,
한성의 마음은 그저 다급하기만 했다.
쾅!!!!!!!!!!!!!!!!!!
들려오는 투르바의 고함 소리와 요란한 굉음.
한성의 심장은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지금 성치 않은 몸으로 그들에게 가 봐야,
짐만 되지 않음을 그 역시 알고 있기에 애가 탔다.
‘빨리. 빨리. 빨리. 빨리.’
한성의 눈이 체력 게이지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