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318화 (318/336)

318화

* * *

[경고 : 전체 체력의 4%가 남았습니다.]

[경고 : 지속된 피로의 누적으로 신체 기능이 저하됩니다.]

추웠다. 몸이 떨렸다. 의식도 흐려져 갔다.

또렷하게 들리던 알림 역시도

이제는 멀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흐릿하게 들려왔다.

[경고 : 전투 수행 능력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경고 : 즉시 전장에서 이탈, 전투를 회피할 것을 권고합니다.]

‘끝인가. 빌어먹을.’

죽음을 직감이라도 한 것일까.

다가오는 투르바에 한성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픽.

한성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가 같잖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라. 당장은 죽일 생각이 없으니.

말하지 않았나. 네놈에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 거라고.”

그의 얼굴에 희열이 차올랐다.

“난 네가 편하게 죽는 걸 원치 않는다.”

“….”

“난 네놈이 네 눈앞에서 죽어가는 네 백성들을 보며

슬퍼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증오하고,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고, 자책하고, 아파하다 죽어가기를 바란다.”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담겨 있었고,

그 웃음에는 지울 수 없는 광기가 짙게 어려 갔다.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단단하던 네가

부러지고 꺾인 채로 내 앞에 목숨을 구걸하기를,

너만을 바라보는 백성들을 내팽개친 채 굴복하기를 바란다.”

“툿… 미…친… 새끼….”

한성이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성이 뱉은 침은

투르바에게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의 턱으로 흘러내렸다.

침을 뱉어낼 힘조차 없는 것일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욕을 들어도 즐겁기만 한지,

한성의 모습을 본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팔 하나, 다리 하나 정도 잘라 놓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피로 범벅이 된 채 환히 웃는 그의 모습은

정녕 살육에 미친 악마였고, 살인귀였으며, 학살자였다.

“과연 어떨지 한번 지켜보자고.”

그가 칼을 들어 올린 순간.

까가각.

뭔가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음…?”

동시에 그의 얼굴 역시도 크게 일그러졌다.

마치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은 아이의 얼굴처럼.

콰각… 콱.

소리의 근원지는 허공이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건만,

그곳은 금이 간 유리처럼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대상 ‘투르바’의 권능 ‘공간 왜곡’이]

[외부 존재의 간섭에 의해 붕괴가 시작됩니다.]

“조잡하기는 하나 내 힘에 간섭을 할 정도라…? 흥미롭군.”

그가 재밌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치지…ㄱ’

시스템의 알림과 동시에, 노이즈가 잔뜩 낀

혼잡한 주파수의 소리가 한성의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윽….’

머리가 뜯겨져 나갈 것같이

높고 찢어지는 소리에 한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카가각….

시간이 갈수록 허공의 균열은 커져만 갔고,

쇠를 긁는 듯한 노이즈 소리 역시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ㅈ…구…ㄴ’

노이즈에 불과하던 소리가 전과는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

들려온 소리는 짧았으나 분명 말의 형태였다.

노이즈 소리와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익숙한 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지금보다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빨리…도 오…네.”

한성이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뭐?”

투르바가 한성을 향해 뒤돌아보던 그때.

콰드득…!

자잘하게 갔던 금이 크게 벌어지며 틈이 생겨났다.

그리고.

쾅!!!!!!!!!!!!!!!!!!!!!!!!!!!!!!!!!!!!!!!!!!!!!!!!!!!!!!!!!!!!!

굉음과 함께 그가 만든 공간이 모두 터져 나갔다.

[대상 ‘투르바’의 권역이 해지되었습니다.]

[정산을 시작합니다.]

‘…정…산?’

뜻밖의 알림에 한성의 눈이 커졌다.

끊어졌던 건 벨루몬들과 한성 간의 연결뿐만이 아닌 듯했다.

‘놈의 힘은 시스템의 개입마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놀람도 잠시, 시스템의 알림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야수군단장, 투모르가 제거되었습니다.]

[야만군단장, 모르부스가 제거되었습니다.]

[사령의 기사단장, 이라가 제거되었습니다.]

[불사의 군단장, 인비디아가 제거되었습니다.]

[색과 꿈의 군단장, 우르티카가 제거되었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룰렛 머신의 잭팟이 터진 것마냥

레벨이 올랐다는 시스템의 알림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생각지도 못한 수준의 경험치가 주어지자

당황한 듯 한성의 눈은 크게 흔들려 댔다.

빠르게 상태창을 켜 레벨을 살피자,

88이라는 숫자 대신 99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전에 비해 무려 11레벨이나 껑충 뛴 상태.

‘저지에 성공한 건 벨루몬만이 아니었나.’

생각과 함께 스탯을 힘과 행운으로 분배하던 그때.

빛이 산란하듯 터져 나간 공간의 틈 사이로

어디선가 봤던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였다.

찢어지고 더러워져 넝마가 된 수트에

흘러내린 피는 굳어 딱지처럼 앉아 있었지만,

그들의 안색은 전과 다를 바 없이 밝았고 생생했다.

타우한의 치유 덕분이겠지.

“하…?”

그들을 바라보는 투르바의 미간이 좁혀졌다.

“네놈들이 여기 있다는 건….”

“네놈의 개들은 지옥 저 바닥에 처박혀있다는 뜻이다.”

벨루몬이 그의 말을 끊으며 짓씹듯 대답했다.

“재미있군.”

투르바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그 재미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을 즐겨라.]

[네놈 역시 그들과 똑같은 신세가 될 테니.]

투르바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토할 것같이 지독한 살의와 살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글쎄?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내가 그리될지. 아니면 네놈들이 그리될지 말이야.”

투르바가 빙글거리며 답했다.

“모두 움직여라.”

벨루몬의 말에 벨루몬들 전원의 기도가 바뀌었다.

[내가 먼저 가지.]

쿵.

“그럼 제가 엄호할게요.”

철컥.

벨루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을 뽑아 든 레그나토르의 신형이 사라졌고,

티에라는 즉시 저격 소총을 꺼내들고는 탄환을 장전했다.

사악.

어느새 투르바의 곁에 나타난 레그나토르가

그를 향해 쉼 없이 검격을 쏟아내며 무섭게 압박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검이 한 번, 한 번 부딪칠 때마다,

금속이 맞부딪칠 때 날 수 있는 소리가 아닌

폭발 혹은 폭격 수준의 소음이 들렸고 공기가 떨려댔다.

한성의 레벨이 올랐기 때문일까.

그의 검은 전보다 더 무겁고 빨라져 있었으며

목을 노리는 검의 끝 또한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연격에서 강격으로, 또 강격에서 다시 파격으로

그의 검은 조금의 물 샐 틈 없이 이어지고 또 끊어졌다.

그가 내지르는 검은 단 한 자루이건만,

투르바가 질러내는 여섯의 검을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바라 마지않던 검의 극에 거의 맞닿은 것이리라.

카각. 캉!!!!!!!!!

“대단하군.”

투르바가 힘을 주어 그의 검을 쳐 내고는 감탄하며 말했다.

탕!!!!!!!!!!!

투확!

“…음?”

날카로운 통증에 그가 제 손을 바라보았다.

통째로 날아간 자신의 두 번째 손.

정확도와 위력이 증가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성조차 쉽게 베어내지 못했던 손이건만,

티에라는 그를 단 한 발의 탄환으로 찢어발겼다.

짜증이 난 것일까.

아니면 제 손가락만 한 몸을 가진 그녀에게

손 전체를 잃었다는 것이 수치스러워서일까.

투르바의 얼굴이 흉신악살의 그것처럼 변해갔다.

“날 잊으면 곤란한데요?”

철컥.

팅.

그의 시선 끝에는 탄환을 재장전 중인 티에라가 보였다.

“이런 버러지 같은 년이….”

날아갔던 그의 손이 순식간에 재생되고,

그와 동시에 그의 손끝에 불길한 기운이 어렸다.

기운이 티에라를 향해 쏘아지려던 찰나,

어디선가 날아온 검붉은 채찍 수십이 그 손을 붙잡았다.

“…?”

“그들의 곁에는 항상 내가 있음을 잊지 마라. 투르바.”

투르바의 눈동자에 불타오르는 안광의 벨루몬이 비쳤다.

* * *

흐린 의식, 어두워가는 시야. 멀어지는 소리들.

그 와중에 한성은 자신의 몸이 들려짐을 느꼈다.

‘어…?’

포근한 털. 익숙한 느낌. 친숙한 냄새. 타우한이었다.

툭.

들렸던 자신의 몸이 아주 조심스레 땅에 내려졌다.

쿵.

한성의 앞으로 사각의 두 벽이 굳건히 서 올랐다.

벽의 정체는 방어형으로 전환한 칸의 두 방패였다.

허나 칸은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생각했는지,

그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방어 절기를 펼쳐 보였다.

“일어라. 통곡의 벽이여. 솟아라. 철의 노래여.”

그의 중얼거림에 방패의 앞에 회백색 빛의 기운이 어렸다.

그 너비만 해도 한성은 물론,

큰 덩치의 자신과 타우한까지 가릴 수 있을 정도였고,

기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1m는 될 만한 두께를 보였다.

“이 틈에 주군의 회복을.”

칸이 사방을 경계하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지.”

타우한이 긴장된 얼굴로 한성에게 가 안색을 살폈다.

“주군. 괜찮소?”

“…너무… 늦었잖…아. 나 죽고… 나서… 오지 그랬냐….”

한성이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헛소리하는 걸 보니 아직은 살 만한가 보군.”

타우한이 약간은 풀어진 얼굴로 토템을 꺼냈다.

그는 한성의 사방에 네 개의 토템을 박아 넣었고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후웅.

[대상 ‘타우한’이 ‘회복의 술’을 시전합니다.]

[체력 회복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마력 회복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신체 재생 능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대상 ‘타우한’이 ‘강화의 술’을 시전합니다.]

[공격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공격속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이동속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지속시간 59분 59초 남았습니다.]

[대상 ‘타우한’이 ‘강체술’을 시전합니다.]

[이한성의 신체 능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지속시간 59분 59초 남았습니다.]

가장 먼저 한성의 몸 주위로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투명한 막이 되어 그에게로 스며들었다.

방호였다.

이어서 붉고 푸른빛이 피어나 한성을 감싸 올랐고,

황금에 가까운 샛노란 빛 역시 한성에게 스며들었으며

마지막으로 밝은 연녹의 빛이 그의 전신을 어루만졌다.

치유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우드득.

부러졌던 뼈가 제자리를 찾아 다시 붙었고,

잘리고 뜯겨 나간 상처에는 새 살이 돋아났으며,

찢어져 제대로 움직이지 않던 근육은 순식간에 연결되었다.

강해진 건 그의 치유력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뿌드득. 콰득.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요란한 소리를 냈고,

근육은 쥐라도 난 것마냥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날카로운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으나,

한성은 이 모든 고통들이 그저 즐거웠고 기쁘기만 했다.

이 모든 것이 살아있음의 증거였으니까.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던

벨루몬들을 또다시 볼 수 있게 됐으니까.

바닥을 보이던 체력과 마력 게이지 역시

빠르지는 않았으나, 천천히 그리고 착실히 차올랐다.

이 때문일까.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렸던 얼굴 역시

이제는 점차 본래의 제 혈색을 찾아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쿨럭. 쿨럭… 쿠웨에엑.”

한성이 기침과 함께 검게 변해버린 핏덩이를 토해냈다.

“됐다. 됐어!! 이제 됐어!”

내부에 파열되었던 장기가 회복되어

제 모습을 되찾자 죽은 피가 밀려 나온 것이었다.

자신이 치유하지 못할 수준이 아님을 알아서일까.

어둡던 타우한의 낯빛은 눈에 띌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괜찮소? 주군?”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목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한성에게 그가 물었다.

“난… 괜찮아….”

“다행이오. 참으로 다행이야.”

“…난 괜…찮으니… 가서 벨루몬들을… 도와…줘.”

털썩.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성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주군!!!!”

칸이 놀라 한성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지만,

타우한은 그런 칸에게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괜찮으니 걱정 마시게. 기절한 것뿐이니.”

“하… 하지만.”

“홀로 저 괴물을 맞서느라 힘들었겠지.

잠깐만이라도… 아주 잠깐만이라도 쉬게 해줍시다.”

“….”

“주군은… 이리도 어리고 작거늘….

어떻게 그리 크고 강할 수 있는 거요. 대체….”

한성을 바라보는 타우한의 눈이 깊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