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 * *
세상이 어두웠다.
마치 검은 바다에 모두가 잠긴 것처럼.
보이는 빛이라고는 화약이 만들어낸 거친 불꽃들과
금속이 부딪칠 때마다 튀어 오르는 샛노란 불똥,
그리고 짐승들의 소름 끼치는 안광뿐이었다.
들려오던 승리의 함성 역시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를 대신한 건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들의 울음과 절규,
고통과 분노로 악에 받친 자들이 토해내는 피맺힌 고함,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질러내는 비명들뿐이었다.
수많은 이가 죽었고, 또 죽어갔다.
희망은 없었다.
더 이상 어둠과 싸우려 들지 않았다.
그저 어둠이 자신들에게 스며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모든 걸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어둠에 스러지기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말리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내버려 두었다.
말리지 않더라도 어차피 곧 죽을 테니까.
차례가 다를 뿐, 결과는 매한가지라 생각했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이 전쟁에서 패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일 거라고.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을 뿐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저마다의 신을 찾던 자들도 이제 더는 신을 찾지 않았다.
그들의 기도에 응하지 않았으니까.
대답이라 할 만한 그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그들에게 빛은 없었다.
일말의 기대도 품을 수 없었다.
세상에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 * *
쾅!!!!!!!!!!!!!!!!!!
굉음과 함께 마지막 저지선이 무너져 내렸다.
“제기랄….”
나이트가 허망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각종 방호와 지뢰, 화기들로 무장했건만,
저지선은 별다른 힘도 쓰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이제 끝인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더 이상은 막아낼 수 없었다.
군은 찢겨져 나간 지 오래였고,
라이언 길드에 속한 헌터들마저 모조리 죽은 상태였다.
남은 것은 험프와 자신뿐.
체력도, 마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치지직. 끄아아악….
“형…?”
이어폰 너머로 들려온 험프의 비명 소리.
나이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형!!!!!!!!!!!!!!!!!!!!!!!!!”
나이트의 앞을 막아서며 그를 압박하던 마물들은
분노한 사자가 포효하듯 질러낸 고함에 몸을 떨어댔고
그가 휘두른 대검에 단번에 양단되어 그대로 사라졌다.
날듯이 달려간 그가 도착한 곳은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의 구석이었다.
싯누렇게 피어오른 흙먼지.
평소였다면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그였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먼지 속 누군가를 찾던 그에게 희미한 무전음이 들려왔다.
치지직.
“…형?”
그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탁. 탁. 탁.
그가 뛰어간 곳엔 산처럼 쌓인 콘크리트 더미가 있었다.
치지직.
그 아래로부터 희미하게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빅.
그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무전기 버튼 하나를 눌렀다.
삐빅.
나이트의 것과 똑같은 수화음이 저 아래에서 들려왔다.
“…씨발.”
작게 중얼거린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형…?”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콘크리트 더미를 치워냈다.
혹시나 그 아래 깔린 이가 다치기라도 할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콘크리트 더미 아래로부터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찢어지다 못해 걸레짝이 된 방어구와
톡 건드리면 와사삭 부서질 것 같은 단검.
피로 샤워라도 한 것마냥 피에 절여진 몸.
파랗게 변해버린 입술.
험프였다.
“…형?”
떨리는 손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
사자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형? 아니지? 죽은 거 아니지?”
대답은 없었다.
“형…?”
그가 험프의 몸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썩은 통나무처럼 그의 몸은 뻣뻣했다.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응?”
나이트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눈과 손으로
허리춤에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유리병을 열고는
그 내용물을 천천히 조심스레 험프의 입에 흘려 넣었다.
“이거 먹어. 형. 엘리자베스한테서 받아온 거야.
알잖아. 그 여자 대단한 거. 그 여자가 축성한 성수야.”
주륵.
그러나 그는 그를 넘기지 못하고 입가로 흘렀다.
“…형 이거 비싼 거야. 응? 좀 먹어봐.”
그의 목소리가 더욱 떨려갔다.
그의 입에 붓는 성수가 많아질수록,
입가로 쏟아지는 성수는 더욱 많아져 갔다.
툭.
텅 빈 유리병이 그에 손에서 떨어져 내렸다.
험프의 뺨을 어루만지는 투박한 손이 떨렸다.
“형…! 형!!!!!!”
느껴져야 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손끝에서는 분명 차가운 감촉만이 느껴졌다.
부드러워야 할 그의 살가죽은 시체처럼 억셌다.
“형!!!!!!!!!!!!!!!!”
사자가 울부짖자, 공기가 떨리고 지반이 흔들렸다.
공허한 외침.
돌아와야 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제 전부였고, 제 모든 것이었으며,
제 자신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한 이가 죽었다.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리 또한 없었다.
흥분 속에서도 냉철하던 그의 눈은 이제 없었다.
그의 눈에는 이제 짙은 살의와 광기만이 어려 있었다.
똑.
험프의 뺨 위로 굵은 눈물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조금만 기다려. 형. 나도 곧 따라갈게.
절대로 형 혼자 여기에 두지 않을게. 약속해.”
콰득.
그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쥐었다.
“죽음은 죽음으로 갚는다는 우리 철칙. 지킬게.
그러니까 쓸쓸해도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저 개새끼들 깡그리 다 찢어 죽인 다음에… 갈게.”
돌아선 사자의 얼굴에는 분노와 살의만이 가득했다.
* * *
쾅!!!!!!
“이런 씨발!!! 똑바로 라인 안 지켜!!!!”
팽 린이 출렁이는 저지선을 향해
도끼를 내던지며 날이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카가가가가각!!!!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부메랑처럼 날아간 그의 대부가
좀비나 구울 등 수백은 될 언데드의 대가리를 터뜨리고는
다시 그의 손으로 되돌아와 얌전히 잡혔다.
콰득. 콰드드득.
그러나 그의 날 선 고함에도
이미 시작된 붕괴는 막아낼 수 없었다.
10m 높이에 1m 두께는 될 저지선의 벽이
미친 듯이 진군하는 언데드들의 행렬과 공세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흔들리고 균열이 생겨났다.
드르르르르륵.
개틀링 건을 비롯한 기관총과 대포,
전차를 부술 때나 쓰일 바주카포가 불을 뿜어댔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 언데드들을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들이 쏟아 내는 탄환의 수보다도,
그들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마물의 수가 더 많았다.
겁에 질린 군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전선을 이탈해 도망하기까지 했다.
전선이 멀쩡히 유지될 리 없었다.
“이런 씨발!!!!!!!!”
쾅!!!!!
출렁이는 저지선 바깥에 벼락처럼 내리쳐진 그의 대부.
그 충격에 저지선 바깥쪽 지반이 출렁였고,
마치 흙으로 이루어진 파도마냥 마물들을 휩쓸고 나아갔다.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한 언데드들은
기이하게 꺾이고 기형적으로 부러지고 무너져
흙 속에 파묻힌 채 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후욱… 후욱… 후욱… 후욱….”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치지직… 여기 치지직… 끄아아아!!!!”
이어폰 너머로 링 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링 링. 대답해! 뭐라고?!”
주변 소음에 묻힌 건지 그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디니!? 응? 어디야!!!!!”
급박한 마음에 그가 허겁지겁 링 링의 흔적을 찾았다.
어릴 적 제 아들을 꼭 빼다 박은 듯한 그였기에,
누구보다 자신을 아빠처럼 따르던 그였기에,
누구보다 상처가 많은 아이였기에.
신경이 많이 쓰였던 팽 린이었다.
“링 링!!!!”
쾅!!!!
고함과 함께 무너져 내린 저 멀리 반대편의 저지선 하나.
“링 링…?!”
그 사이로 쏟아진 링 링의 권속들이 보였다.
근처에 부적 무더기들이 나뒹굴었다.
그들은 난도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찢겨 있었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내팽개쳐져 있었다.
“링 링!!!!!”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팽 린이 불안으로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저지선을 향해 마구잡이로 뛰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튕겨져 나간 팽 린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손과 노란 치파오가 보였다.
링 링의 것이었다.
“설마…?”
불안이 엄습했다.
“비켜!! 이 개새끼들아!!!!!!!”
쾅!!!!!!! 콰득. 콰드득.
급한 마음에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언데드들의 대가리를 손으로 부수고 찢으며 달려갔다.
“링 링!! 괜찮니? 어?”
노란 치파오가 있는 곳에 당도한 팽 린이
그 위로 쌓인 마물들의 사체를 허겁지겁 치워냈다.
“넌…?”
치파오의 주인은 링 링이 아닌 그의 권속이었다.
끼긱.
녹이 슨 쇳소리와 함께 그가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안광은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고,
움직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네 주인은?! 어?”
끼긱.
팽 린의 다급한 고함에 그가 힘겹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제 아래를 가리켰고,
제 임무를 다했다는 듯 그대로 안광을 꺼트렸다.
쿵.
그의 팔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ㄹ… 링 링?”
팽 린이 조심스레 링 링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툭.
떨리는 손으로 그를 치워내자 그 아래 뭔가 보였다.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볼살에 흰 피부를 가진 아이.
링 링이었다.
“링 링!!!!!”
그의 얼굴에 한 조각의 기쁨이 떠올랐고
반가운 마음에 그가 급히 링 링을 흔들었다.
“…링 링?”
이상했다.
기절했다 생각했던 링 링은 깨어나지 않았다.
“링 링…?”
툭.
팽 린이 그의 몸을 들어 올렸다.
‘어…?’
싸늘했다.
툭.
링 링의 팔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장난치는 거라면 그만둬. 응?”
팽 린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달래듯 말했다.
팽 린을 상대로 종종 그가 짓궂은 장난을 쳐 왔기에.
그러나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기대했던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웃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저씨가 용서해줄 테니까. 얼른 일어나봐. 응?”
팽 린이 입술을 짓씹으며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답은 없었다.
“…갔니…? 간 거야…?”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목은 잠겼으며 목소리는 떨렸다.
“…이제야 좀 애다워졌는데. 이제야 애답게 살게 됐는데….”
한성과의 만남 이후로 크게 변화한 링 링을 떠올린 그였다.
전보다 많은 대화를 했고,
전보다 많은 장난을 쳤던 꼬마였던 링 링.
언젠가 이 모든 난리가 끝나고 나면
그를 입양해 가족으로서 함께 살리라 생각했건만.
그러지 못하게 된 현실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스윽.
그가 싸늘하게 식은 링 링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그곳에선 부디 행복하거라….
아프지도 슬퍼하지도 말고… 그저 부디 행복하거라.”
각진 그의 턱 끝에 맺혔던 눈물이 링 링의 볼로 떨어졌다.
“잘 가렴… 내 아들아.”
그의 작은 중얼거림이 공터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