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296화 (296/336)

296화

* * *

“헥. 헥. 헥. 헥.”

짐승 특유의 숨소리.

거친 숨소리의 주인공은 투모르였다.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눈은 분노와 수치,

경계와 두려움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티에라를 찾아대고 있었다.

황금빛 찬란하던 그의 갈기들은

검댕과 흙이 묻어 더러운 넝마 조각이 되었고,

그의 몸은 크고 작은 상처로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그는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는 한 마리 짐승처럼

초조해 보였고, 두려워 보였으며, 또 화가 나 보였다.

“헥. 헥. 헥. 헥.”

숨을 고르며 호수 전체를 노려보던 그.

픽.

흠칫.

저 멀리에서 들려온 작은 소리에 그는 빠르게 반응했다.

그가 놀라 고개를 돌렸을 때,

뭔가가 종이 한 장 차이로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팍.

그의 등 뒤에 있던 암벽이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고,

그로부터 크게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씨익.

그가 웃으며 소리쳤다.

“흐흐.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내 손에 죽을까 앞에 나타나는 것이 두려워

숨어서 철 조각이나 쏘아내는 주제에 이것 하나 못 맞춰?”

탄환이 빗나갔다 생각했는지 그가 빈정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빈정거림은 오래가지 못했다.

뜨끔.

볼에서 뭔가 뜨끈한 것이 느껴졌으니까.

‘음?!’

그가 볼을 만졌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그의 볼.

어느새 얇은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선은 점차 벌어졌으며 메스로 살을 절개한 듯,

깔끔하게 살이 벌어지고 그로부터 피가 흘러내렸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악!!!!”

아파서일까, 수치스러워서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그녀가 짜증이 나서일까.

그가 고함을 질러댔다.

그의 고함에는 더 이상 이성이 담겨있지 않았다.

명백한 살의와 분노만이 가득했고,

희게 드러낸 그의 이빨에는 본능만이 담겨있었다.

“나와라!! 나와!!!!!!”

그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두 자루의 중검에서 인 거친 기파가

호수를 향해 사선으로 아무렇게나 나아갔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호수의 벽 일부가 무너지고

충격에 피와 체액으로 가득한 웅덩이가 출렁여댔지만

그 어디에서도 티에라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픽.

콰득.

반 박자 빠르게 들려온 바람 빠지는 소리.

놀란 그가 빠르게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탄환은 그를 지나 암벽에 꽂혀 있었다.

퍽.

다시 한번 가루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전과 달랐다.

탄환이 꽂힌 구역이 그의 위치와는 꽤나 멀었으니까.

멀어졌다고 해봐야 약 3cm 정도였지만,

그간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투모르 역시 눈을 반짝였다.

전과 다른 변화를 눈치챈 것이리라.

‘혹시?!’

그가 재빨리 제 칼의 흔적이 닿은 곳을 살폈다.

피 웅덩이, 큰 바위 뒤, 절벽 아래 돌무덤,

물풀 가득한 수초 지대, 절벽과 절벽 사이 틈바구니.

그의 충혈된 눈이 모든 곳을 샅샅이 뒤졌다.

애써 잡은 기회를 놓치게 될까,

안력을 최대한으로 높였고 감각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자그마한 소리에도 그의 귀가 발록거렸고,

아주 옅은 흙냄새에도 그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그러던 그때, 그의 눈동자에 뭔가가 비쳤다.

흐릿했고 찰나라 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바위 뒤의 투명한 뭔가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찾았다!!”

쾅!!!!

고함과 함께 그가 폭발적으로 발을 굴러 몸을 날렸다.

족히 500m는 떨어진 거리.

눈 몇 번 깜빡할 사이에 그 거리는 좁혀져 있었다.

그러자 바위 뒤에서부터 뭔가가 크게 흔들려댔다.

당황한 듯 흔들리는 그것의 은신이 풀렸고,

그곳엔 허둥지둥 탄환을 재장전 중인 티에라가 보였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로 손을 떨며

약실에 들어가지 않는 탄을 억지로 욱여넣고 있었다.

철컥. 철컥.

고장이라도 난 것일까.

그녀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죽어라!!!!!!”

쾅!!!!!!!!!!!!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곧게 내리쳐진 그의 중검.

충격에 그녀가 서 있던 바위 지대 일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폭탄이 터진 것처럼 솟구쳐 올랐고

그로부터 막대한 양의 흙먼지 역시 빠르게 피어올랐다.

‘뭐지?’

그의 얼굴에 황망함이 깃들었다.

그녀를 베었건만,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충격에 튕겨져 나간 건가 싶어

주위를 살펴봐도 그 흔한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뭔가를 베었을 때 느껴지는 감촉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티에라의 정수리를 내리쳤고,

그의 검에 티에라의 몸이 반으로 갈라진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며 미소까지 지었건만.

그가 내려다본 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하던 그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치지직.

놀란 그가 경계하며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

그러자 그곳엔 스파크가 일고 있는 공이 보였다.

공은 천이나 고무, 가죽이 아닌

금속인지 철인지 모를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킁. 킁.

그가 연신 코를 벌름거렸다.

‘이 냄새는…?’

순간적으로 인 익숙하지만 불쾌한 냄새.

짙은 피비린내와 썩은 시체의 냄새.

일전에 만났던 벨루몬에게서 느껴졌던 죽음의 냄새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가 합세한 건가?

그렇다면 설마…?! 인비디아가 놈에게 당한 거야?!’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빠르게 주위를 살폈으나 주위는 고요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가 쉽게 당할 리도 없겠지만,

설령 그가 당했다 해도 놈 역시 멀쩡하진 못했을 거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만약 놈이 인비디아를 상대로 압승을 했고,

여력이 남아 저 엘프 년에게 합세를 했다 쳐도,

알려진 놈의 성격대로라면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겠지.’

생각이 정리된 듯, 그의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

이 모든 것이 그년이 꾸민 단순한 장난질이라는 것.’

공을 집어 든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속았다는 생각에 빠르게 주위를 살피던 그때.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공으로부터 티에라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빙고.”

“…뭐?”

쾅!!!!!!!!!!!!!!!!!

“크와아아아아아악!!!”

조그마한 공에서부터 인 화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 그를 덮쳤다.

화약이 만들어낸 난폭하고 사나운 폭발은 아니었다.

폭발 속 화염에는 붉은색이 아닌

눈이 시릴 정도의 푸른색이 담겨져 있었으니까.

티에라의 최후의 보루를 담고 있었던 것이리라.

“크아아아아아아아악!!!”

그가 고함을 지르며 바닥을 굴러댔다.

사자왕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얼굴을 부여잡은 그의 손으로부터 피가 흘러내렸고,

그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과 고통스러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개같은 년이!!!!!! 크아아아아아악!!!!”

흉흉하다 못해 살이 베일 것 같은 살기가

그에게서 퍼져 나와 호수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우르릉.

대지가 떨리고, 잠잠하던 호수가 격랑이 되었다.

픽. 픽. 픽.

콰득. 콰득. 콰득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그의 고함과 위협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인지

쓰러져 뒹구는 그에게로 계속해서 탄환이 쏟아졌다.

일말의 동정도, 조금의 자비도 없는 무자비한 공격.

그는 자신의 몸을 꿰뚫는 차갑고 불쾌한 고통에

다시 한번 고함을 질러냈고, 바닥을 쳐 먼지를 일으켰다.

쾅!!!

지상으로부터 20~25m 정도는 될 법한 거대한 먼지구름이 그로부터 피어올랐고,

그가 내리친 지반은 굉음과 함께 빠르게 가라앉았다.

먼지 속에 몸을 숨긴 채 회복을 꾀하려는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몰랐다.

자신이 상대하는 존재에게는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과,

땅을 파고든 것은 오히려 나쁜 선택이었다는 것을.

휙. 휙. 휙.

먼지구름 속으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툭. 툭. 툭.

이윽고 한참 뒤에 구덩이 아래에

그것이 완전히 떨어져 내렸는지 둔탁한 소리를 냈다.

쾅!!!!!!!!!! 쾅!!!!!!!!!!!!! 쾅!!!!!!!!!!!!!

“쿠와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찢어지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이로 하여금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한 비명 소리였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욕설도 이제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거세게 타오르는 화마(火魔)의 고함뿐이었다.

타닥. 타닥.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는 짐승도 울음을 그쳤다.

죽은 것일까.

타닥. 타닥.

푸르게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불똥만이 타올랐다.

짐승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 끝났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말의 자비도, 조금의 동정심도 없이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폭탄을 던진 그녀였지만,

막상 그가 죽었다 생각하니 마음이 상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라는 존재가 자신의 손에 의해

이 세상에서 지워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악.

호수의 가장자리 끝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총구를 내리긴 했지만 견착 자세는 그대로였다.

방심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타닥. 타닥.

착.

구덩이에 도착한 그녀가 안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

그러나 있어야 할 짐승의 사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불꽃에 타 기화되어가는 그의 피와

어째서인지 아직 타지 않은 그의 안대뿐이었다.

‘저건…?’

구덩이 안의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물이 가득 차 있던 호수였기에

흙은 부드러웠을 것이고 파내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도망친 건가.’

“제길. 방심했어.”

그녀가 입술을 짓씹으며 다시 은신으로 몸을 숨기려던 그때.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억!!!!!!!!!!!!!”

짐승의 포효가 들려왔다.

곰 같기도, 늑대 같기도, 사자 같기도 한 포효였다.

“윽…!?”

짐승의 포효에 그녀의 이마가 크게 일그러졌고,

시전하던 은신 역시 불안정하게 일렁이다 결국 실패했다.

단순한 포효가 아닌 마력이 담긴 포효였기 때문이었다.

“크르르르르르….”

소름이 끼치는 짐승의 숨소리에

그녀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뒤를 돌았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그곳엔

피로 온몸을 칠갑한 투모르가 있었다.

‘제기랄.’

다 죽어가는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할 뿐이건만

핏발 선 그의 눈을 마주하자 티에라는 오한이 들었다.

나머지 한쪽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지만,

짐승이 뿜어내는 살기에 소름이 일고 닭살이 돋았다.

티에라의 본능이 외쳐댔다.

눈앞의 짐승은 위험한 존재라고.

그는 이제 이지(理智)를 상실한 한 마리 짐승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물어뜯을 듯

피로 적셔진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고,

검은 어디다 버렸는지 손톱을 세운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발을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발 역시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손에 들려져 있던 저격 소총은

어느새 돌격 소총으로 변해 있었다.

철컥.

침착하게 탄띠에서 탄알집을 꺼내 결합한 그녀가

천천히 어깨에 개머리판을 견착하고 그를 겨누었다.

“후우우….”

그녀가 크게 숨을 내뱉으며 장전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래. 와라. 한 방 먹여주마.”

그녀가 피처럼 붉은 눈을 한 짐승을 보며 중얼거렸다.

“크르르르르르르르르.”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커지고 뿜어내는 살기가 짙어져 갔다.

철컥.

알 수 없는 불안에 티에라가 장전을 마쳤다.

그때였다.

그의 감겨 있던 한쪽 눈이 떠졌다.

흠칫.

짐승의 눈을 본 티에라가 어깨를 떨었다.

있어야 할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있어야 할 흰자위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를 대신한 건 붉은색과 어두운색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반짝이고 있는 둥근 구체였다.

눈알이라기에는 뭔가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짐승의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찢어지고 갈라졌던 녀석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고,

부러졌던 이빨과 손톱은 전보다 길고 단단히 자라났으며

타고 찢어졌던 갈기 역시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자라났다.

“오늘 사냥은… 좀 힘들겠군.”

티에라의 콧잔등으로 한 방울의 땀이 흘러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