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291화 (291/336)

291화

* * *

“후욱… 후욱….”

‘빌어먹을….’

물이 빠진 호숫가. 커다란 바위들의 틈 사이.

거친 숨소리에 지친 얼굴.

반쯤은 타버린 색이 바랜 갈기와, 안대로 가린 한쪽 눈.

투모르였다.

그는 은신으로 몸을 숨긴 채 숨을 헐떡이면서도

하나 남은 눈으로 호수의 전역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죽여야 할 뭔가를 찾는 것처럼

그의 눈에는 살의와 열망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몸에는 상처들이 가득이었다.

자상(刺傷)보다는 화상에 가까운 상처들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검게 익은 살점들은

뜯겨져 나가 환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심한 경우에는 수포가 일고 터져 진물이 새어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랄 건 상처가 불에 지져졌기 때문인지

환부로부터 더 이상 피가 새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해서 고통이 덜한 것은 아니었다.

움직일 때마다 상처는 벌어져 피가 왈칵 새어 나왔고,

타는 듯한 쓰라린 고통에 이를 악물 정도였으니까.

또한 무언가에 관통당한 듯

어깨와 허벅지에는 꿰뚫린 자국들도 여럿 보였다.

‘흡….’

그가 갑자기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였다.

푸욱.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가 날카로운 손톱을 이용해

제 상처를 헤집고는 상처 안에서부터 뭔가를 꺼냈다.

‘뭐지 이 철 조각은…?’

그가 제 손바닥 위에 철 조각을 올리며 이를 살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밖에 되지 않는 철 조각에는

희미한 화약의 냄새와 마력의 기운이 어려 있었다.

‘날 괴롭혔던 게 이 빌어먹을 것이었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어디 숨어 있는 것이냐. 네년은….

나와라. 모습을 드러내. 반드시 곱게 죽이진 않으마.’

그가 다시 호수로 눈을 돌렸다.

호수는 계속된 군의 폭격과 길드장들의 공격으로

붕괴되어 이제는 물웅덩이 몇 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남은 물웅덩이에는

마물들이 죽으며 흘린 피와 체액들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 때문일까.

호수 전체에는 피의 쇳내와 비린내가 가득했고,

이 역하고 끔찍한 냄새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냄새 한번 지독하군. 제기랄.’

투모르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찾았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프라는 종족이 가진 특성인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개인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녀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고 마력조차 탐지되지 않았다.

그녀의 은신은 투모르의 기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다.

뛰어난 후각을 이용해 그녀를 찾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엘프들 특유의 숲 냄새를 찾으려 해봐도,

풍겨오는 냄새는 피 냄새와 비린내, 내장의 냄새뿐이었다.

필시 그녀가 마물들의 체액과 피를

온몸에 발라 숲의 냄새를 지운 것이리라.

‘영악한 년, 지독한 년, 개같은 년, 찢어 죽일 년.’

중검 두 자루를 잡은 그의 손이 분노로 떨렸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뒤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칠고 화려한 자신의 검은 보여줄 기회조차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휘둘러보지조차 못했다.

게다가 자신의 특기인 은신도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기척을 감췄다 생각했건만,

어떻게 찾아낸 것인지 어딘가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거기다 호수의 밖으로 이동해

평지에서 싸우려 들어도 그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망치려는 그에게 철 조각을 쏘아내

호수의 아래로 계속해서 몰아가고 있었고,

호수의 밖으로 발을 내딛기라도 하면 언제 설치한 건지

함정으로부터 폭발이 일어 자신을 호수 아래로 내쫓았다.

마치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뿌득.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내 반드시, 네년을 잡아 죽이고

네년의 종족 전체를 노예로 삼아 유린하리라.’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늘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군림했고,

두려움에 도망하는 이들을 사냥하던 자신이었건만….

지금은 그녀의 눈을 피해 숨고 도망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그에게는 너무도 큰 치욕으로 다가왔다.

그랬다.

그는 지금 그는 사냥감이 되어 사냥을 당하고 있었다.

픽.

그의 귀가 쫑긋거렸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온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

‘또냐?!’

대번에 얼굴색이 변한 그가 검을 비틀어

검의 넓은 면으로 제 머리와 심장을 방어했다.

카각!!!!!!!!

정확히 이마 정 가운데에 위치한

검의 넓은 면으로부터 크게 불똥이 튀었다.

‘크윽…!’

2미터가 넘는 근육질의 그가 휘청일 정도의 충격.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땐,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던 그녀의 존재감은 사라져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쾅!!!!!

그가 앞에 놓인 바위를 후려갈기자,

제 몸보다 몇 배는 더 클 바위가 박살이 나 무너졌다.

몇 번째인지 세지도 못할 만큼의 반복.

계속되는 치고 빠지는 유격전에 화가 치밀어 솟았다.

“오냐!! 네년이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마.

기다려라. 이 개같은 년. 뼈까지 씹어 먹어주마.”

그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 * *

쾅!!!!!!! 콰콰쾅!

극도로 압축된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스노위 산의 전역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폭발음이 들려오는 범위와 장소는 일정치 않았다.

산의 정상에서 터진 소리에 시선을 그곳으로 돌리면

이미 산의 중간 자락에서 다시 소리가 터져 나왔으니까.

굉음이 들릴 때마다 산과 땅은 들썩였고,

묵직한 무게감으로 서 있던 절벽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뭔가가 부딪치고, 터지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 소리를 일으키는 원인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폭발음이 들린 지역 곳곳에 새겨진

난도질에 가까운 날붙이의 흔적과 뚜렷한 핏자국,

그리고 귀신처럼 스쳐 지나가는 붉은 선들뿐.

스노위 산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절반 이상의 절벽과 산지가 무너져 내려 있었고,

산의 등허리는 완전히 박살이 나 내려앉았으며,

군데군데가 뭔가에 의해 찢겨져 있었다.

화약이나 화기에 의해 생겨난 상처라기보단,

거대한 짐승이 짓밟고 발톱으로 할퀸 듯한 형상이었다.

“이거다!! 이거야!!!!!!”

쾌락에 젖은 남성의 굵은 목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졌다.

쾅!!!!!!!!

충격파와 함께 산등성이 한가운데에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맞대고 있는 한성과 투르바가 바로 그것.

까가가각…각….

투르바의 여섯의 검과 한성의 두 단검이 맞부딪쳐

밀지도 밀려나지도 않는 팽팽한 대치 상태가 지속되자,

그로부터 듣기 어려울 정도의 날카로운 금속성을 냈다.

금속성이 울려 퍼질 때마다 불똥이 튀어댔고,

상대에 대한 살의와 살기는 더욱 짙어지고 커져만 갔다.

[경고 : 분노하는 자의 상태 해제 시간이 10분 남았습니다.]

한성의 눈가에는 분노하는 자의 기운이 붉게 넘실거렸고,

단검에 어린 포식과 흑월난무의 힘 역시 거칠게 일렁여댔다.

힘이 잔뜩 들어간 한성의 두 팔과 두 다리는

이제는 인간의 것이 맞나 싶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피부 위로 땀이 흘러내렸고,

혈관은 뱀처럼 도드라져 튀어나올 듯 솟구쳤으며,

양팔과 허벅지의 근육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바늘로 찌르면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

질량도 덩치도 한성에 비해 몇 배는 될 투르바의 힘에도

한성은 결단코 이에 쉽게 밀리지 않았다.

그의 힘을 버텨내는 것은 물론,

오히려 몇 번은 그를 밀어내기까지 했을 정도.

카가가각…… 쾅!!!!

팽팽하던 힘의 줄다리기를 끊은 것은 한성이었다.

순간적으로 단검을 빼며 땅을 박차 몸을 뒤로 뺀 그.

힘의 균형이 깨지자, 갈 곳을 잃은 여섯의 대검은

한성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쏟아져 내려 지반을 부숴댔다.

대검이 아니라 망치로 내려찍은 듯한 모습이었다.

폭발하듯 인 먼지를 걷어내고 나온

투르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재밌군. 아주 만족스러워. 하하하.”

투둑. 툭.

말과 함께 그의 턱에서 몇 방울의 피가 떨어져 내렸다.

그의 얼굴에 난 크고 작은 생채기로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뿐만 아니라 그의 여섯의 팔에도 역시 상처가 가득했다.

날카로운 원형의 무언가에 꿰뚫린 자국,

베여나간 자국, 그리고 뭔가에 씹힌 자국까지.

빠르게 아물고는 있었으나,

분명 그의 몸에는 여러 상처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후욱… 후욱….”

뚝. 뚝.

그를 노려보는 한성의 이마에서도 역시

한 줄기의 붉은 선혈이 땀과 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쉽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라면 해볼 만하다.

그림자의 힘도, 포식도, 흑월난무의 힘도 모두 통해.

분노하는 자의 힘 역시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한성의 눈이 반짝였다.

‘다만… 큰 데미지를 주지 못한 게 아쉽군.’

한성의 그의 목에 난 한 줄의 얕은 상처를 바라보았다.

꾸득.

단검의 끝이 놈의 목을 스쳤을 때의

그 서늘한 감각이 손에 아직도 남아 있었다.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한 치만 더 들어갔더라면….’

진한 아쉬움에 미련이 생겼다.

[경고 : 열광하는 자의 상태 해제 시간이 9분 남았습니다.]

[에너지 포인트가 80%에 도달합니다.]

“한 조각의 기대를 품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날 즐겁게 해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한낱 무지렁이에 불과하다 생각했건만, 범쯤은 되나 보군.”

그가 이빨을 드러내며 하얗게 웃었다.

“….”

“네놈이 부리는 그 어둠과 그림자들 역시 흥미로웠다.”

그가 한성에게 깃든 그림자들과 흑월난무,

포식의 힘을 차례대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단단한 육신을 꿰뚫고 벨 정도의 힘과

담지도 못할 신의 힘을 씹어 삼키려 드는 탐욕까지….

신이란 작자가 네놈을 내게 보낸 게 우연은 아니다 싶더군.”

“….”

“숨기고 있는 수가 있다면 어서 보여라.

그것이 내 마음에 들 정도로 흡족하고 재미있다면

조금이나마 죽음을 유예할 수 있게 해주마. 약속하지.”

“…우습군.”

“음? 뭐가 우습단 말이지?”

한성의 썩은 미소에 입가에 드리운 미소가 약간 줄어든 그.

“한낱 인간에게 살을 내어주고 피를 흘리는 신이라….

내가 아는 신 중에 가장 한심하고 무능한 신이다 싶어서.”

한성의 조롱에 그의 얼굴은 점점 싸늘해져 갔다.

“내가 네놈과 어울려주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나?”

“그런 것치고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다만.”

“…역시 여러모로 재밌는 녀석이군. 네놈은.”

말과 달리 그의 얼굴에 어린 미소는 점점 싸늘해져만 갔다.

“그런데 그 기분 나쁜 눈은 뭐지?”

그가 한성을 바라보다 넌지시 물었다.

“뭐?”

“그 기대에 차 반짝거리는 두 눈 말이다.”

“…?”

“설마… 내가 이깟 피 몇 방울 흘렸다고

네놈에게 지금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움찔.

한성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맞았나? 정말 그래? 이거 재밌어 죽겠군. 하하하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아주… 걸작이야.”

“….”

그의 얼굴에 다시 한번 쾌락이 어렸다.

“네놈의 희망을, 기대를 완전히 박살 내주마.

절망이 뭔지, 아픔이 뭔지, 고통이 뭔지를 알려주마.”

[경고 : 열광하는 자의 상태 해제 시간이 8분 남았습니다.]

“와라. 주제도 모르는 애송이여.”

뿌득.

단검을 잡은 한성의 손이 약간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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