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 * *
쾅!!!!!!!!!!!!!!!!
유성이라도 떨어진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맥의 허리 한중간에 뭔가가 묵직하게 떨어져 내렸다.
크게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언뜻 큰 구덩이가 보였다.
뭔가가 충돌하며 만들어진 흔적이리라.
쿠르릉.
충격이 꽤나 컸는지 구덩이의 지반과 암반들은
과자 조각이 부서진 것마냥 잘게 부서져 내려앉았고,
몇 안 되는 나무들과 녹음들 역시 찢겨져 나간 상태였다.
쩌적.
거기다 부서진 것만으로는 모자랐던 건지
불길한 소리와 함께 지반에 굵은 금들이 가
이내 빠른 속도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궁.
산의 규모만큼이나 큰 흙먼지가 일고 석산이 무너져 내렸다.
산사태라 봐야 할지, 산이 무너지는 과정이라 봐야 할지
토사와 함께 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그 광경은
영화에서나 볼법한 것으로 심히 비현실적이었다.
쾅!
무너져 내리는 암석들의 틈바구니에서 뭔가가 튀어 올랐다.
그것의 속도는 육안으로 보기 힘들 정도의 속도였고,
흘러내리던 암석들이 터져 나가며 비산한 것으로 봐서는
뭔가가 흘러내리는 바위를 받침대 삼아 도약한 듯 보였다.
쾅!!!
쾅!!!!!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분명 산등성이로부터
뭔가가 터지고,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들이 들려왔고,
그때마다 산은 제 모습을 잃고 형편없이 부서져 나갔다.
공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고깃덩어리를 두들기는 듯한 둔탁한 소리,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쳐 나는 째지는 듯한 쇳소리까지.
들려오는 소리는 다양했고 또 컸다.
사악.
어디선가 솟구친 수십의 검은 아지랑이가
순식간에 창의 형체를 이루어 산 중턱으로 쏘아져 갔다.
빛 한 점조차 투과되지 않을 것같이 검었고,
창의 끝은 그 어떤 것이라도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콰가가가가가각.
하지만 창은 허망하게도 꿰뚫어야 할 목표를 잃은 듯,
애꿎은 바윗덩어리들만 꿰뚫고 지나갔다.
단단할 법도 하건만, 바위는 두부처럼 쉽게 꿰뚫렸다.
“제기랄!!!”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고
울분이 담긴 그의 고함에 산 전체가 떨려댔다.
“이거나 처먹어라!!!!”
사악.
고함의 진원지로부터 시작된 검은 초승달 모양의 기운.
마치 산 전체를 뒤덮을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수십, 수백의 검은 초승달에 산은 금세 어두워져 갔다.
까가가가가강!!!
초승달이 나아간 곳으로부터 불똥이 튀었다.
초승달에 담긴 힘이 꽤나 강맹하고 난폭해
꽤나 큰 충격이나 후폭풍이 일 거라 생각했건만
들려온 것은 예상외로 금속이 맞부딪쳐 나는 쇳소리였다.
“칫….”
누군가의 혀 차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을 땐,
뭔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는 바람 소리들만 들렸을 뿐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쾅!!!!!!!!!
또 한 번의 큰 충격음.
이번엔 산의 정상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정상에도 큰 구덩이가 생겨났다.
화산의 분화구로부터 화산재가 피어난 것마냥
구덩이로부터 산을 뒤덮을 정도의 흙먼지가 피었다.
“쿨럭… 쿨럭.”
흙먼지가 서서히 걷혀갈 때쯤, 기침 소리가 들렸다.
흙먼지가 걷히자 그곳엔 구덩이로부터
힘겹게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는 한성이 있었다.
“후욱… 후욱… 후욱….”
그의 얼굴은 꽤나 지쳐 보였다.
비라도 맞은 것인지 땀으로 흥건했고,
그의 온몸은 흙과 먼지를 뒤덮어 지저분했으며
얼굴 군데군데에 난 생채기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단검을 쥔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고,
장갑 사이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이 보였다.
손아귀가 찢어진 것이리라.
[경고 : 누적된 충격의 정도가 높습니다.]
[업적 : 금강불괴가 발동, 충격이 반감됩니다.]
[경고 : 전체 체력의 60%가 남았습니다.]
‘쉽지 않을 거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좀 더 미친 듯이 날뛰어줬으면 좋겠군.
이 정도로는 운동조차 되지 않아. 애송이. 힘 좀 써봐.”
탁.
투르바가 모습을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빌어먹을.’
한성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한성의 눈동자에 비친 그는 너무나 태연해 보였다.
그 흔한 땀방울 하나 보이지 않았고,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 역시 편안해 보였다.
날뛰는 자신의 기운과는 달리 그의 기운은
정갈하게 갈무리되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제기랄….’
최후의 일격도, 흑월난무도 통하지 않았다.
칼의 노래를 비롯한 그림자의 힘 역시 놈은 쉽게 쳐내거나 가볍게 피하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놈에게 충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은 포식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제대로 닿지 않았다.
포식이 채 닿기도 전에 이를 쳐내거나
다가오는 포식을 그대로 찢어 산산조각을 내버렸으니까.
어쩌다 포식의 조각이 놈에게 닿는다 해도,
포식의 탐욕은 딱히 그를 괴롭히지 못하는 듯 보였다.
늘 갈증과 허기로 가득 차 있던
포식의 탐욕을 채우다 못해 터뜨려버릴 정도로
놈이 가진 마력은 방대하다 못해 크고 강했으니까.
[스킬 : 포식이 에너지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에너지 포인트가 80%에 도달합니다.]
똑. 똑.
장갑으로부터 흘러내린 붉은 선혈이
단검의 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씨익.
“벌써 지친 건가?”
그가 환하게 웃으며 한성에게 물었다.
“퉷. 그럴 리가.”
한성이 입안에 가득 고인 핏물을 뱉어내며 답했다.
“그래. 그래야지.”
한성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그가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아. 달군.”
“뭐?”
한성의 답에 그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놈에게서 느껴지는 고통이, 무력감이, 절망의 냄새가….
내게는 그 어떤 과실보다도 달콤하게 느껴진다. 하하하….”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귀에 닿을 듯했다.
“미친 새끼.”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쾌락에 몸을 떠는 그를 향해
한성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나로 인해 이 세계에 뿌리내린 고통과 슬픔,
무기력과 분노, 절망과 환란(患亂)들이 너무나 즐겁다.”
“….”
“버러지만도 못한 네놈들이 뿜어내는
그 어둡고 더러운 감정들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
“그렇기에… 그렇기에 너무도 사랑스러운 네놈들을
내 손으로 찢어 죽이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입이 찢어질 것처럼 웃는 그의 모습이
한성은 역겹고 징그러워 구역감이 올라왔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이 들어 토악질이 났다.
‘빌어먹을….’
“그나저나 괜찮겠나?”
“뭐?”
“나야 급할 것이 없다지만 넌 아니지. 안 그런가?”
그의 말에 한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다.
그 죽어가는 누군가가 내 아이들일 수도 있지만….”
“….”
“그게 네가 사랑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법도 없지.”
‘…빌어먹을.’
한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몸을 갖춘 만큼, 내 아이들 역시 강해졌다.
네 수하 녀석들이 과연 잘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틀렸다. 그들은 수하가 아니다.
내 등을 받쳐줄 동료이며, 나와 함께할 내 가족이다.”
한성이 즉시 으르렁거렸다.
“게다가 난 그들이 질 거라 생각지 않는다.
세상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한 녀석들이기에.”
“하… 역시 네놈은….”
그가 기가 찬다는 얼굴로 한성을 바라보았다.
“아네스 놈을 닮아도 너무 닮았군.”
한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곧고 강직한 성품이며, 말하는 본새까지.
순간적으로 녀석의 모습이 네 모습에 겹쳐 보였다.
아주 소름이 돋을 정도야. 이거 봐. 닭살이 돋았잖아.”
그가 웃으며 여섯의 팔에 돋은 닭살들을 보여주었다.
“뭐, 사실 누가 이기고 지든 상관은 없다.
어차피 결과는 하나로 귀결되게 될 테니까.”
“네 동료들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냐?”
“동료라? 하하하하. 우스운 소릴 하는군.
너는 키우는 가축에게도 동료라고 말하나? 그래?”
“…미친.”
진심인 것 같은 그의 말에 한성이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그저 내가 기르는 말이고 소일 뿐이다.
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
“자. 어찌할 테냐. 지금처럼 지지부진한 상태로
이렇게 대충 시간만 때우다 세상이 망하는 걸 볼 테냐?
아니면 화끈하게 붙어서 날 죽이고 그들의 곁에 갈 테냐?”
“….”
“물론, 네놈이 도망치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그리하도록 허락할 생각은 손톱의 때만큼도 없다.
난 네놈이 비탄에 잠겨 절망하며, 울부짖고 미쳐가는 걸
천천히 오래도록 음미하며 즐길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
“그러니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구하고 싶다면….”
그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날 죽여라.”
“….”
“그것들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그거 하나뿐이다.”
“….”
“뭐, 지금의 수준으로는 턱도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으득.
짓씹은 입술로부터 피가 흘렀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소화.”
[분노하는 자의 상태가 활성화됩니다.]
[공격력과 공격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획득한 스킬과 권능의 힘이 대폭 증가합니다.]
[경고 : 시전자의 역량 부족으로 인하여]
[스킬 : 포식의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분노하는 자의 상태가 해제되기까지 20분 남았습니다.]
들려오는 여러 알림들과 함께 한성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 * *
쾅!!!!!
“이런 씨발 새끼들이!!!!”
뉴욕 시내 한복판에서 제 몸만 한
대검을 휘두르며 욕지거리를 해대는 이가 있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라이언 나이트가 바로 그것.
그의 곁에는 역시 그의 형인 험프가 있었고,
꽤 지친 모양인지 특기인 은신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힘 아껴. 나이트. 벌써 지치면 곤란하다.”
“알아. 나도. 형이나 좀 쉬지 그래.
무슨 배터리 손전등마냥 계속 깜빡깜빡하네.”
콰득.
끄아아아아악…!
그가 데스나이트의 몸을 반으로 가르며 답했다.
데스나이트가 반으로 갈라져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림자보다 검던 그 형체가 한 줌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효과 죽이는군.”
험프가 나이트의 검을 보며 중얼거렸다.
“형. 머리.”
“안다.”
그는 대답과 동시에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화살의 비를
단검으로 쳐내고, 이리저리 몸을 돌려 피하며 입을 열었다.
“신성의 힘이 없었다면 일이 힘들었을 거다.
요코하마 녀석. 일 처리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그러고 보니 그의 단검과 나이트의 대검에는
신성 마법이 인챈트된 것인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요코하마가 보낸 지원 계열 헌터들의 힘이었다.
“형. 간다.”
“그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허어어어어엉!”
나이트가 갑자기 사자의 울음과도 같은 고함을 토해냈다.
이에 데스나이트들이 움찔했고, 둘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처럼 한 마리 굶주린 사자가 되어
데스나이트들의 한가운데로 나아가 그들을 찢어발겼으니까.
끼야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수백의 연기가 사라져 공중으로 흩어졌다.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음에도 둘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들이 베어 죽인 마물들의 수보다
아직 남은 마물의 수가 더 많았기 때문이리라.
“후… 씨발. 징그럽게도 쏟아져 나오는군.”
“동감이다.”
쾅!!!!
담백하게 욕지거리를 남긴 나이트가
랜스를 꼬나 쥔 채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주파하는
창기병의 말과 데스나이트를 베어 넘겼다.
“다크 나이트의 수하 녀석들은 지치지도 않나 보군.”
쾅!!
둘의 시선이 마물들을 유린하고 있는 기사단으로 향했다.
아홉의 기사단은 마물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군이나 다른 헌터 녀석들 쪽은 어때.”
나이트가 곁눈질로 시가지를 보며 물었다.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인지 포격 소리가 요란했다.
거기다 헌터들이 질러대는 고함 소리와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들로 번쩍여 어지러웠고,
꽤 선전 중인지 데스나이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보다시피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다. 군도, 헌터도.”
카각.
험프가 데스나이트 다섯의 목을 그으며 대답했다.
“흠.”
“우리 애들도 군에 잘 협조해 주고 있고.”
“그래? 나나 형 말 아니면 들은 척도 안 하는
그 거친 양아치, 짐승 새끼들이? 그거 걸작이군.”
나이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뭐, 좋은 일이지. 뒤를 봐줄 동료가 생겼다는 건.”
험프가 품에서부터 언제 꺼냈는지도 모를
비도를 공중에 흩뿌려 데스나이트들의 미간을 꿰뚫었다.
“…동료라.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군.”
나이트가 입가를 씰룩였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이 모든 게 다 저 녀석 덕분이다.
녀석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우린 전멸했겠지.”
쾅!!!
쿠르릉….
험프가 저 멀리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수십의 건물들을 보며 말했다.
“…동감이야.”
나이트 역시 곁눈질로 그를 보며 대답했다.
“…이겨야 할 텐데.”
험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길 거다.”
쾅!!
나이트의 검에서 인 거친 기파가
세 갈래로 갈려 데스나이트들에게 향해 나아갔고,
이에 보병, 궁병, 기마병 할 것 없이 모조리 갈려 나갔다.
“음?”
꽤나 확신에 찬 나이트의 대답.
험프가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 압도적인 절망을 안겨준 존재가 바로 그다.
그런 그가 저런 한낱 마물 쪼가리에게 질 리가 없지.”
“…그도 마물이다만.”
“그는 단순한 마물이 아니다. 우리 뒤를 봐주는 빅 보스지.”
나이트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