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286화 (286/336)

286화

* * *

흠칫.

한성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뭔가가 기감에 포착된 것이리라.

“…왔나.”

어딘가를 바라보는 한성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고요하던 연무장에는 그가 뿜어낸 날카로운 기파와

적의와 살기로 가득 차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듯 일렁거렸다.

“끝내자. 이제.”

말을 마친 한성이 단검을 소환해 역수로 쥐어 잡았다.

‘최후의 일격.’

[스킬 : 최후의 일격을 시전합니다.]

[10분간 공격력 50%, 공격속도 60%, 관통력 30% 증가합니다.]

단검의 날에 보랏빛의 기운이 날카로이 어렸다.

‘포식.’

[스킬 : 포식을 시전합니다.]

[포식이 활성화됩니다.]

[대상 ‘이한성’과 동조를 시작합니다.]

[3…2…1.]

[동조가 완료되었습니다.]

한성의 그림자로부터 포식들이 솟구쳐 올라

그의 전신과 칼에 진한 매직을 그은 듯이 어렸다.

“으아아아아아!!!”

[스킬 : 왕의 함성을 발동합니다.]

[주변 아군에 고양감을 선사합니다.]

[아군의 공격력, 공격속도, 회복력이 증가합니다.]

‘마지막. 흑월난무.’

단검의 끝부터 솟구친 새까만 기파가 거칠게 일렁였다.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네놈의 죽음뿐.’

으득.

한성의 눈이 세상을 모조리 태울 것 같이 타올랐다.

“죽여주마.”

삭.

한마디 말과 함께 한성의 신형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 *

“그렇게 대놓고 기운을 흩뿌렸건만

생각보다 찾아오는 게 영 늦었군. 애송이.”

그림자로부터 피어난 한성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굵고 낮아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했음에도

말투만큼은 생각보다도 따뜻했고, 또 꽤나 정겨웠다.

또 약간의 장난기마저 어려 있는 듯한 그 태도는

어쩐지 오랜 친구를 맞이하는 이의 것과 닮아 있었다.

“…투르바.”

한성의 눈이 목소리의 흔적을 따라 어딘가에 닿았다.

그는 크고 널따란 바위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잠이라도 잤던 것일까.

한성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몽롱했고,

몸은 잠에 취하기라도 한 듯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긴장과 살기로 충천한 한성을 앞에 두고도,

그의 얼굴은 여유로웠고, 한가했으며 권태로웠다.

흉폭하고 거친 포식과 흑월난무의 기운을

바로 코앞에 두고서도 그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간만에 만나 반갑기만 하건만,

나와 달리 넌 딱히 그렇지는 않은가 보군.

그리 날 세우지 말고 이리 와서 이야기나 나누지 그래.”

그가 바위를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마치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달래기라도 하는 듯이.

한성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오늘부로 이 악연을 끝내자. 투르바.”

한성이 씹어뱉듯 대답했다.

그에 대한 한성의 태도는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그를 바라보는 한성의 눈에는 명백한 적의가 어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그의 허벅지는 팽팽히 당겨졌고,

단검을 쥐어 잡은 그의 손은 얼마나 세게 잡은 것인지

손이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악연이라니. 참으로 서운한 말이군.”

그가 상처받은 얼굴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야. 인연(因緣)이라는 건 말이다.

결코 이유가 없이는 이어지지 않는 거란다.”

단지 몸을 일으킨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건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거친 기파와 마기에 숨이 막혔다.

“너와 난 어떠한 연유로 엮인 걸까? 참으로 궁금하구나.”

이제는 내려다보게 된 그가 한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길 수 있을까.’

짐승의, 괴물의 눈과 마주한 한성의 두 눈동자가 떨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뿌드득.

단검을 잡은 그의 손이 축축해졌다.

“너무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마라.”

반달같이 휘어진 그의 눈이 한성의 전신을 훑었다.

“당장이라도 그 희고 고운 목을 꺾어 버리고 싶어지니까.”

흠칫.

폭발적으로 일었다 사라진 살기에 한성이 얼었다.

“킥킥킥. 농담이다. 농담. 겁먹기는.”

그가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일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나?”

“무슨 말.”

“네놈이 마음에 든다는 말. 나와 함께하자는 말.

세상 모든 것을 뒤엎을 나의 대업에 동참하라는 말.”

“불행하게도 기억한다. 너무나 불쾌했던 말이었기에.”

“하하. 여전하군. 그 혀는.”

그가 빙글빙글 웃었다. 즐겁다는 듯이.

“그래서 그 말에 대한 네놈의 대답은?”

“한 치의 변화도 없다.”

“아쉽군.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씹어뱉듯 내뱉는 한성의 대답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좀처럼 굽혀지지 않는 강직한 그 마음을

부러뜨리고 무너뜨리는 것만큼 즐거운 건 없으니.”

“변태가 따로 없군.”

“그저 취향의 차이일 뿐이란다. 아이야.

아네스를 닮은 네가 무너지는 걸 보고 싶었다.

그것이 눈엣가시인 네놈을 이제껏 살려둔 이유란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 참으로 재밌는 녀석이로고. 즐겁구나.”

진정으로 즐겁다는 듯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지금부터 너를 그리고 네놈의 권속들을,

그리고 네놈이 지키려 노력했던 그 모든 것들을

짓밟고, 씹고, 파괴하고, 찢고, 부수고, 터뜨릴 거다.”

“….”

“그 과정에서 넌 그 누구도 지키지 못하게 될 거다.

그들의 따스한 숨결을 다시는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며,

정답던 그들의 목소리 역시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겠지.”

“….”

“널 제외한 모든 이가 죽어가는 그 상황에도

네놈은 그저 스러지는 그들의 생을 바라만 보게 될 거다.”

“….”

“그리고 그런 너를 보며 난 즐길 거다.

네놈의 처절한 절망을, 네놈이 느끼는 무기력함을.

네놈이 뿜어대는 그 악독하고 지독한 증오와 분노를.”

생각만 해도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얼굴의 그는

쾌감과 광기의 극에 달한 이의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

“하지만, 기회를 주마.”

“기회?”

담담하던 그의 목소리가 속삭이기라도 하듯 은밀해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개처럼 엎드려 빌어라. 그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벌레처럼 구차하게 두 손을 비비며 빌어라. 구해달라고.

그 말 한마디면 너와 네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살 것이다.”

으드득.

달콤하게만 들리는 놈의 말에

한성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내게 굴종하겠다, 굴복하겠다. 당신의 종이 되겠다.

뭐든 좋다. 그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을 잊고 널 받아주겠다.”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한 그의 끈적한 목소리에

한성은 순간적으로 아찔함을 느끼며 정신을 놓칠 뻔했다.

[경고 : 대상 ‘투르바’가 대상 ‘이한성’에]

[‘매혹, 혼란, 공포, 위협’의 상태 이상을 가(加)합니다.]

[스킬 : 왕의 위압이 발동, 저항에 일부 성공합니다.]

[업적 :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가 발동, 저항에 성공합니다.]

[업적 : 신살자가 발동, 투르바의 권능에 저항합니다.]

업적과 스킬의 힘으로 정신이 맑아지자,

한성의 귓가에 스쳐 지나갔던 시스템의 알림이 번뜩 떠올랐다.

‘투르바? 마신도, 화신도 아닌…?’

한성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분명 시스템은 놈을 더러 화신이나 마신이라 칭하지 않았다.’

‘이는 놈의 혼과 아네스의 육신이 하나가 됐으며,

아직 신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의혹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하아. 저번에 이어 이번에까지.

혹시나 하고 시험해 봤건만… 역시나였나.”

그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단순한 운이나 우연은 아니라는 뜻이군.

두 눈으로 직접 봤건만 믿기지가 않아. 너의 힘은.”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한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매서웠다.

“무엇이 말이냐?”

“아네스 녀석조차 힘겨워했던 내 힘과 권능을

네놈은 어찌 이리 쉽게 밀어낼 수가 있는지 궁금하구나.”

“글쎄.”

“왕이 된 하나… 역시 예언의 존재는 다르다 이건가.”

흠칫.

“…예언을 알고 있었나?”

“이 몸이 모르는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

투르바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섯의 기사와 왕이 된 하나.”

“….”

“내 아이들과 맞닥뜨리고 있는 다섯의 망아지,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네놈 하나를 말하는 거겠지.”

“….”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너와 네놈의 망아지들이 어쩌면….

날 막기 위한 신의 한 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입가에 어린 미소가 점점 진해져 갔다.

“그런데 이를 어쩌지? 나라는 마(魔)는

신이 짜놓은 놀이판 따위에 어울려 줄 생각도,

네놈 따위들에게 멸해지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는데.”

“크윽….”

그의 전신에서부터 살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네놈에겐 날 멸할 만한 힘도, 능력도 없음을.”

“…대보기 전에는 뭐가 긴지 모르는 법이지.”

“어리석은 녀석.”

투르바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져갔다.

* * *

지휘소 안이 시끄러웠다.

증원과 지원을 요청하고 확인하는

요원과 군인들의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필요한 자원과 병력의 존재 여부를 묻는 말들로 시끄러웠다.

그리고 이 모든 고함들의 끝에 요코하마가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업무 때문인지

그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보기 좋을 정도로 탄탄하던 그의 몸은 수척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너머 게이트를 바라보는

그의 안광만큼은 먹이를 노리는 짐승마냥 날카로웠다.

“미 뉴욕에는 동원 가능한 모든 헌터와

군 병력 전원 게이트 인근에서 대기 중입니다!

헌터 전원의 무기에 성(聖)속성 마법을 부여했습니다!

동일한 수준의 무력이라면 우리 쪽이 훨씬 유리합니다!”

“인도, 뉴델리는 신성 계열의 마법을 쓸 수 있는 헌터들과

고위급의 힐러들을 급파해 언데드에 대한 대비를 완료했고,

네크로폴리스의 해제를 위해 마법 계 헌터들을 급파했습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현재 몽마들의 인식 저해 마법과

유혹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하는 광역 버프를 펼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누르술탄은 마물의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이나,

무력의 대부분이 완력과 힘에 기초한 단순한 수준의 것이라

육, 해, 공 가릴 것 없이 군의 규모를 가장 크게 배치하였고,

전사, 탱커 등의 물리 계열의 헌터들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아프리카, 말라위에는 인근 해역에

이지스함과 전함, 핵 잠수함 등의 대규모 해상 병력을 배치,

언제든지 헌터들을 도울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통신라인 확보 완료 및 모든 채널이 열려 있습니다!”

“모든 언론과 미디어와도 연결을 끝마쳤습니다!”

“연합군 전원 및 세상이 지휘관의 말을 기다립니다!!”

지휘소의 안이 열기로 후끈했다.

병사와 요원들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인한 두려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걱정과 그들에 대한 그리움.

증오스러운 적에 대한 분노와 살의.

이 모든 감정들이 뒤엉킨 것이겠지.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진 것은

그들의 지휘관인 요코하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아. 잘 들립니까?”

마이크를 잡은 그의 손과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 역시 조금은 떨렸다.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에 통신병이 요코하마의 목소리와 모습이

모든 채널과 미디어에 정상적으로 송출되고 있다고 손짓했다.

“연합군 총사령관 요코하마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자질구레한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현 상황은 결단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인류의 멸망이 바로 앞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허나 우리는 생존이라는 기치 아래 모였고,

역사상 단 한 번도 유례가 없는 연합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수많은 생을 구해낼 수 있었고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은 여전히 강건합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한 것 그 이상으로 강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기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를 쟁취해내기 위해.”

“그러니 나아갑시다. 저 마물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그러니 함께 발버둥 칩시다. 이 빌어먹을 세상 속에서.”

“갑시다. 세상을 구하러.”

“예!!!!!!!!”

그의 말과 함께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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