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 * *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다섯의 디멘션 게이트 중 규모가 가장 큰 게이트가 있는 이곳.
그래서인지 도시의 곳곳에 인 전화(戰火)는
다른 게이트가 있는 도시들보다도 훨씬 거셌고 또 격렬했다.
바닥에는 물웅덩이 대신 피가 한가득 고여 있었고,
죽어가고 있거나 죽어버린 이들의 시체가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은 것일까.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건 다른 게이트들에 비해
군의 화포와 함포들의 소리가 현저히 적다는 것이었다.
들려봐야 간헐적인 수준이었고,
그조차도 도시의 외곽이나 더 멀리에서 들려왔으니
이는 도시를 벗어나려는 마물들을 제압하는 소리로 보였다.
그런 무기들의 소리를 대신한 건
마물들이 질러대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와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요란한 금속성의 소리들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인간과 마물의 격돌로 인한 소리는 아니었다.
“쿠와아아아아악!!”
눈이 벌게진 오크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허공을 향해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
“쿠왁… 쿠왁!!!!”
그러나 뭔가를 보고는 안색이 파랗게 질렸고,
이내 휘두르던 도끼를 멈추고는 손을 덜덜 떨어댔다.
“쿠와아아아악!”
카각.
던지다시피 한 도끼는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눈이 벌게진 오크는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은 비단 오크 하나에게만 국한되어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모든 마물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으니까.
오크들 몇은 스스로의 눈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코볼트와 고블린들이 무리 지어 오크들에게 달려들기도 했으며,
라이칸스로프 몇은 꼬리를 말고 웅크린 채 덜덜 떨기도 했으니까.
콰득.
도망치려던 오크의 대가리가 한 짐승에 의해 터져나갔다.
2미터가 넘는 키에 무식하리만치 큰 근육을 지닌 오크였건만,
짐승의 손에 쥐어지자 그저 귀여운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3미터가 넘는 키에 오크 네다섯은 뭉친 듯한 덩치.
황금빛 털과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까지.
짐승의 정체는 해밀턴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짐승의 태도가 이상했다.
당장이라도 마물을 향해 달려들어 베고, 찢고,
짓씹어 대가리와 뼈를 부술 것 같은 생김새와 달리
마물을 죽이는 그의 손길은 매우 신속하면서도 절제되어 있었다.
마치 최대한 상처 없이 깨끗하고 조용히 죽이려는 것처럼.
게다가 육중한 덩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고양이가 움직이는 듯 어떤 소리도 없이 움직여
정신이 나간 마물들의 곁으로 가 그들의 목을 베거나 터뜨렸다.
정신이 나간 듯한 그들의 상태를 일깨우지 않으려
애를 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짐승뿐 아니라,
주위 모든 헌터들과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블린, 오크, 코볼트 같이 하위 마물들은
일반적인 근력을 가진 군인들도 처리가 가능했기에
소음기를 낀 총으로 머리를 터뜨리거나 검으로 목을 벴다.
헌터들 역시 조용히 다가가 목을 돌려 죽이거나
검을 들어 그대로 머리를 베는 등 조용히 처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헌터들 가운데 러시아의 콘스탄틴도 끼어 있었다.
그들도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른 게이트들을 맞이한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미친 듯이 달려드는 마물들을 상대로 포격을 쏟아부었고
검기를 뿌리고 마력을 뿜어내는 등 제 힘을 발휘했으니까.
그러나 마커스가 온 뒤로부터는 전황이 확 달라졌다.
그가 전장에 나타나 우산을 바닥에 내려찍자,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서 있던 디멘션 게이트 전체가
크게 일렁거리며 공간이 왜곡된 것마냥 이리저리 뒤틀렸다.
그 뒤부터 마물들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고블린, 코볼트, 오크, 트롤, 오우거 등의 중하위 마물은 물론
라이만스로프와 미노타우르스 등 A급 게이트에서나 볼법한
마물들까지도 모두 그의 힘에 허우적거렸다.
이에 더해 마커스는 헌터들과 군에 소음과 충격으로
마물들이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게 최대한 빠르고 조용하게
처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에 군은 도시를 빠져나가는 마물들에게만 포격을 가했고,
도시의 안에 위치한 헌터와 군 역시도 이 말에 따랐다.
덕분에 바닥에는 인간들의 시체들보다도
마물들의 사체가 압도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했고,
인간 측의 피해는 전무한 상황이 되었다.
심지어 무방비한 상태의 마물들을 제거하는 데
드는 힘조차도 딱히 드는 편이 아니라 여력이 있을 정도였다.
“후… 거 참.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콘스탄틴이 수건으로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노인장 능력이 대단한 건 들어 알고 있었지만은
이렇게까지 대단위로, 강력하게 작용할 줄은 몰랐수다.
나라고 해도 저 힘에 쉽게 대항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환상에 사로잡힌 마물들을 보며 그가 혀를 내둘렀다.
“별거 아니네.”
마커스가 가슴팍의 행커칩을 꺼내 땀을 닦으며 말했다.
“괜찮은 거요?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데?”
“크르르….”
콘스탄틴이 가까이 다가가 마커스의 안색을 살피려 하자
어느새 다가온 해밀턴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살벌하구만.”
당장이라도 자신의 몸을 헤집을 것 같은
날카로운 짐승의 손톱과 이빨을 보며 콘스탄틴이 중얼거렸다.
“괜찮다. 해밀턴. 그는 날 해치려는 게 아니야.”
마커스가 창백한 얼굴로 사람 좋은 웃음을 해 보였다.
그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 콘스탄틴 역시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고
해밀턴에게 자신은 그를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내보였다.
“…킁.”
이에 해밀턴이 그를 바라보다 다시 마물들에게로 나아갔다.
마치 ‘너 따위가 건드릴 존재가 아니다’라는 눈이었다.
“좋겠수다. 든든한 보디가드가 있어서.”
“든든하지. 암.”
마커스가 다시 한번 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창백한 얼굴일지언정 어린 미소는 진짜였다.
“정말 괜찮은 거 맞는 거요?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인데?”
콘스탄틴이 투박한 어투로 그를 걱정했다.
“괜찮네. 안 괜찮아도 해내야만 하고.
그리고 죽을 각오로 왔네. 여기가 내 마지막 전장일 거야.”
“거. 참….”
진심인 듯한 마커스의 말에
콘스탄틴이 입맛을 다시더니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종횡무진 전장을 돌아다니며
마물들의 목을 베거나 찢어 죽이는 해밀턴이 보였다.
“저 친구 때문이오? 세상을 지켜야 저 친구도 지키니까?”
그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렇네. 그리고 이한성 헌터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함이기도 하고.”
그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아.”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밀턴의 변화 뒤에 한성이 있다는 것은
이미 헌터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한성이 그와 마커스의 숙소에 출입한 뒤부터,
이제껏 세상에 제힘을 내보이지 않았던 그가
당당히 제힘과 제 능력을 내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는 던전 브레이크로 대회가 중단되고 난 뒤,
고국으로 돌아가 헌터로서의 역할을 해내기 시작했다.
수천의 마물을 죽였고, 수십의 게이트를 닫았으며
그로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내고 지켜냈다.
숨기기 급급했고, 두려움의 대상이자
영국 정부에게 있어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던 그가.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늘 어둡게 살아가던 그가.
그렇기에 늘 마커스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그가.
이제는 존경받고 사랑받는 영웅이 되었으며
자신의 뒤를 이어 조국을 수호하는 가디언이 되었으니
마커스로서는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리로 온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한성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그리고 제 아들과도 같은 해밀턴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뭐… 나도 비슷하긴 합니다. 빚이 있긴 마찬가지니.”
콘스탄틴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러시아에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 말인가.”
“예.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 당시에 그가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들로만 그것들을 막았다면 붕괴됐을 거요. 러시아는.”
그가 그때를 회상하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압도적인 힘 덕에 우리 측 피해가 적었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죽을 뻔했던 내 형제들과 조카,
그리고 사랑하는 내 부모님들까지 그에게 구원을 받았지.”
“음….”
“하물며 짐승도 감사를 표할 줄 아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이리 나섰지.”
“의외로군. 그런 생각을 할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
“러시아인은 은혜도, 원한도 반드시 갚지.”
그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세상이 있어야 러시아도 있는 거 아니겠수.
노인장이 저 친구를 생각하듯 나도 내 가족을 위해 왔수.”
그가 쑥스러운 듯 코를 슥 닦았다.
“투박하지만… 고운 심성이군.”
“그런가. 하하.”
콘스탄틴이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자, 쉴 만큼 쉬었으니 나도 다시 가보겠수.”
“그러시게.”
“자. 여기.”
턱.
그가 마커스의 곁에 병 하나를 두었다.
“상급 마력 포션이오. 먹어 두슈.”
“고맙군. 요긴하게 쓰지.”
마커스가 포션을 마시던 그 순간.
【뭐냐. 이 얄팍한 힘은.】
푸훕.
마커스가 삼키던 포션을 뱉어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마물의 언어와 함께
왜곡되어 일렁이던 게이트 주변의 마력 파장이 흔들려댔다.
건너편의 뭔가가 뒤흔드는 것이리라.
【별 시답잖은 게 귀찮게 하는군.】
쾅!!!!!!!!!!!!
쩌적.
충격음과 함께 일렁이던 마력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환상을 부순다고…? 그것도 완력으로?”
콘스탄틴의 목소리가 떨렸다.
꾸득.
짓씹어 찢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피가
비릿한 향을 풍기며 마커스의 마른 입안을 적셨다.
안 그래도 새하얗던 그의 안색은 더욱 희게 질려갔다.
무너지려는 환상을 유지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더는 소용이 없는 듯 보였다.
쾅!!!!!!!!!!!
“…무너진다!!!”
마커스가 짜내다시피 외친 고함과 동시에
깨진 유리창의 조각들처럼 그의 환상이 무너져 내렸다.
“쿠억…?”
환상이 무너져 내리자 마물들 역시
쏟아져 내리는 마력장의 조각들을 보며
하나둘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제기랄….”
크르르르….
어느새 다가온 해밀턴이 마커스의 앞을 막아서며
게이트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가라. 가서 취하고, 마시고, 먹어라.】
“쿠와아아아아아악!!!”
말과 함께 마물들의 눈이 붉어졌다.
게이트 너머 뭔가의 힘인 듯했다.
“발포!! 발포하라!!!!”
게이트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던 군이
가장 먼저 게이트를 향해 집중 포격과 공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광포화 상태가 된 것인지
마물들은 자신의 살을 찢고 꿰뚫는 탄환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달리며 군인과 헌터들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마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제기랄… 아직도 저만큼이나 남아 있었나.”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을 보며 콘스탄틴이 중얼거렸다.
후웅.
빛 무리와 함께 미노타우루스와 인간을
반쯤 섞은 듯한 마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미노타우루스, 트롤 등의
마물들에 비해 키도 덩치도 압도적으로 작은 수준이건만
그에게서 풍겨져 오는 기운과 힘은 비교할 수 없이 강했다.
해밀턴 역시 그의 기도를 읽은 것인지,
으르릉거림의 강도가 강해졌고 털을 바짝 세워 경계했다.
“네놈인가. 이런 같잖은 짓을 꾸민 게?”
그가 단박에 마커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힘의 파동을 읽어낸 것이리라.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뭐. 어쩔 수 없지. 죽일 수밖에.”
“뭐라는 거냐. 소 새끼가.”
좋지 않은 예감에 콘스탄틴이 경계하며 도끼를 들어 올렸다.
중얼거리며 귀를 파던 그가
발아래에 굴러다니던 돌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는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다 마커스를 향해 가벼이 던졌다.
팡.
공기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던져진 돌조각.
분명 가볍게 던진 것이건만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쾅!
“커헉…!”
콰드득.
놀란 콘스탄틴이 도끼를 방패 삼아
날아오는 돌조각을 막으려 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충격을 받아내지 못한 도끼는 그대로 부서져 내렸고
그는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내고는 몸을 휘청거렸으니까.
“콘스탄틴!!”
“쿨럭… 괜찮수. 아직은 버틸 만해.”
콘스탄틴이 피를 뱉어내며 씹어뱉듯 대답했다.
“꽤나 강하게 힘을 줬건만 그걸 버텼나.
인간 중에도 꽤나 쓸 만한 근성을 지닌 녀석이 있었군.”
모르부스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크르르르르.
“크와아아앙!!!!!!!”
“해밀턴!! 안 돼!!!”
마커스의 만류에도 해밀턴이 뛰쳐나갔다.
울부짖음과 함께 순식간에 모르부스의 앞에 도달한
해밀턴이 모르부스의 몸만 한 제 앞발로 그를 후려쳤다.
쾅!!!
생명체가 생명체를 쳤다고는 믿기 힘든 소리가 들려왔다.
“…죽었…나?”
콘스탄틴의 말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사라지자,
그곳엔 해밀턴의 앞발을 붙잡은 모르부스가 있었다.
“이런?!”
“해밀턴!!!!”
“넌 애완견으로 키워주마. 꽤 쓸 만해 보여.”
해밀턴을 향한 모르부스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그 전에… 한 번쯤은 반쯤 죽여 놔야겠어.
새로이 주인이 될 이에게 이빨을 드러내면 쓰나.”
팡.
모르부스가 해밀턴의 앞발을 위로 쳐내자,
해밀턴의 복부가 훤히 드러났고 모르부스가 주먹을 쥐었다.
“안 돼!!!!”
“버텨라. 짐승.”
마커스의 외침에도 멈추지 않던 모르부스의 주먹이
해밀턴의 복부에 닿으려던 그때.
쾅!!!!!!!!!!!
단순한 주먹질에 불과한 그의 공격에 지반이 뒤흔들렸고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뒤따랐다.
“무슨…?!”
콘스탄틴과 마커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고,
그들의 떨리는 두 눈이 흙먼지로 뒤덮인 전장을 바라던 그때.
“이제 좀 쓸 만해졌군. 풍선 근육.”
해밀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방패를 들어 올린 채 씩 웃는 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