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 * *
콰득.
팽 린의 대부(大斧)가 은빛 털을 지닌
늑대의 두개골 뼈를 박살 내며 뽑혀져 나왔다.
그의 앞에 놓인 집채만 한 크기의 늑대는
은랑이라 불리는 A 최상급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였다.
“후우. 이 짓도 슬슬 지치는군.
많이 죽였다고 생각했건만 줄지를 않아.”
도끼를 잡아 쥔 그가 피곤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뒤로는 야트막한 동산 수준의 마물들이 쌓여 있었다.
“…휘유 아주 날아다니는구먼. 그래.
젊은 게 좋긴 좋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말야.”
그가 마물들을 학살하고 있는 샤오란을 보며 말했다.
그는 강하든 강하지 않든 보이는 족족
마물들의 대가리를 부수고 터뜨려 죽여대고 있었다.
몸을 돌볼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지,
그녀의 육체에는 전에 없던 생채기들이 꽤나 보였다.
쾅!!!!
“…우리 꼬맹이도 잘하고 있는 것 같고.”
그의 시선 끝에 제 소환수와 함께 싸우는 링 링이 보였다.
타우한에 의해 마기와 사기는 흩어졌지만,
살의와 공격성 같은 본능만은 흩어지지 않았는지
어린아이의 손속치고는 여전히 잔인하고 매서웠다.
마물들을 죽이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고,
피가 튀고, 살이 찢기고, 머리가 터지고, 내장이 새어 나와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착실히 마물들을 죽여 나갔다.
물론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실행하고 겪는 건
그가 아닌 소환수이기는 했지만 명령은 그가 내리는 것.
어린아이의 짓이라고는 믿기 힘든 잔인함이었다.
“쯧….”
마음 같아선 그만두라 말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리 말할 수 없어 입이 썼다.
손 하나라도 더해져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 쉬었으면 슬슬 다시 합류하시죠.
여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팽 린의 이어폰으로 샤오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묘하다니?”
“와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링 링 너도 와.
아무래도 이쪽 계통 관련해서는 나보다 네가 나을 테니.”
“네. 지금 갈게요.”
둘이 샤오란을 흔적을 좆아 도착한 곳은 게이트 근처였다.
그가 언제든 도끼를 휘두를 준비를 마치고 다가갔지만
어째서인지 게이트에서는 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었다.
“뭐가 이상하단 거요?”
그가 슬며시 도끼를 내리며 물었다.
“저기.”
샤오란이 게이트의 아래를 가리켰고,
그곳에는 검붉은색과 보랏빛이 뒤섞인 땅이 있었다.
땅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영역을 넓혀가며 색을 퍼뜨려댔고 주변 땅이
그렇게 조금씩 검붉은색과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저건…?!”
링 링의 눈이 커졌다.
“뭔지 알아?”
“네크로폴리스예요. 그것도 고위의….”
링 링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역시.”
샤오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크로폴리스면… 그 언데드…?”
“예. 맞아요. 누군지는 몰라도 누군가
여기에 죽은 자들의 도시를 세울 생각인 것 같아요.”
팽 린의 말에 링 링이 작은 입술을 앙다물며 대답했다.
“못 부숴?”
“이미 술식이 완성되었어요. 진행단계고.
이걸 깨부수려면 적어도 이걸 시전한 녀석과
동위의 힘을 가졌거나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와야 하는데….”
“하는데?”
“전 아니에요.”
“빌어먹을….”
팽 린이 중얼거렸다.
“놈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크로맨시에 정통한 흑마법사나 주술사일 거예요.”
“귀찮아졌군. 제기랄.”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의 군단.
시전자를 찾아내 죽이기 전까지는
무적에 가까운 언데드들을 상대하려니 골치가 아팠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우선 대피부터 해요. 우리.”
멍한 표정으로 네크로폴리스를 바라보던 링 링이
정신이 들었는지 샤오란과 팽 린의 팔을 잡아끌었다.
“얘가 왜 이래?”
“이제 이곳은 죽음의 도시가 될 거예요.
이제껏 죽였던 마물들 전부가 다시 몸을 일으킬 거고요.”
“그래봤자, 마물이야. 다시 죽이면 돼.
여차하면 못 일어서도록 찢어 버리면 그만이고.”
샤오란이 굳은 얼굴로 제 건틀렛을 매만졌다.
“맞아. 언데드 상대했던 게 한두 번이냐.
저번에 상하이 A급 게이트에서도 상대해 봐놓고 뭘.”
“아니에요. 이번엔 그때랑 차원이 달라요.
그때는 네크로폴리스도 펼쳐지지 않았었잖아요.”
별것 아니라는 투의 팽 린과 샤오란을 보며
링 링이 새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저건 흑마법을 익힌 지 얼마 안 된
어중이떠중이들이 대충 만든 게 아니란 말예요!!
여기 계속 있다간 우리도 저기에 영향을 받을 거고요.”
“제기랄.”
팽 린이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링 링의 말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여긴 더 이상 우리 땅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가서 놈들을 막아낼 방책을 마련하고 다시 와요.
하다못해 무기에 신성력이라도 인챈트 받고 와요. 네? 네?”
“…아니. 난 가지 않아.”
샤오란이 링 링의 고사리 같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누나!!”
“팀장이다. 누나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무슨….”
“더는 도망치지 않아. 난.”
그녀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불리하다고 내빼고, 힘들다고 외면하고,
상성상 상대하기 어렵다 합리화하는 것도 지겨워.”
“….”
“여기서 또 도망쳤다간 그땐….
정말로 나중에 이한성을 마주 볼 수 없어.”
“샤오란….”
그녀의 말을 이해한 팽 린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아직 난 굽타 헌터께 사과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도 갖추지 못했어. 그러니 안 가. 아니. 못 가.”
그녀의 눈에 전의가 떠올랐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떻게든
내가 막고 있을 테니 넌 가서 지원이나 요청해.
네가 말한 것처럼 신성 계열의 힘 쓸 수 있는 자들로.
전략 전술 부서로 연락을 넣으면 바로 조치를 취해줄 거야.”
“…누나.”
“팀장이라니까.”
그녀가 머리를 질끈 묶으며 대답했다.
“어서 가.”
“꽤 쓸 만한 정신머리로군. 계집.”
흠칫.
샤오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방에서
기분 나쁠 정도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름 끼치는 기운에 그들의 시선이 빠르게 뒤로 향했다.
몸이 떨릴 정도의 진득한 살의와 거친 마기였지만
이는 분명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는 익숙한 기운이었다.
후웅.
“이건…?”
링 링이 눈을 반짝였다.
이내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벨루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벨루몬 님!!”
링 링이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벨루몬을 맞이했다.
“너로군. 꼬마.”
벨루몬이 알은체하며 입을 열었다.
“벨루몬 님!! 여긴 무슨 일로…?”
“주군의 명을 수행하러 왔다. 단지 그뿐이다.”
벨루몬이 턱으로 게이트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아….”
“네크로폴리스라… 비록 조잡하기는 해도
어려 있는 힘은 확실히 진짜군. 역시 놈인가.”
벨루몬의 시선이 게이트와 거무죽죽한 색의 대지로 향했다.
“놈이라 하시면…?”
“있다. 기분 나쁜 흑마법사 놈이.
목소리조차도 듣기 거북할 정도로 재수 없는 녀석이지.”
링 링의 말에 벨루몬이 담담히 답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 이를 삼킨 샤오란과 팽 린이었다.
그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가라.】
흠칫.
게이트 너머에서 들려온 마물의 언어에 셋의 어깨가 떨렸다.
벨루몬의 말처럼 듣기 거북할 정도의 음성이었다.
“왔나.”
“키에에에에에에에엑!!!!”
게이트 너머로부터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윽….”
링 링이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고,
팽 린과 샤오란 역시 날카로운 소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둠의 족속이로군.”
벨루몬의 안광이 타올랐다.
휙.
벨루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게이트로부터 검은 형체의 뭔가가 빠져나왔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샤오란조차도 그 흔적을 놓칠 뻔했을 정도로
제 기척과 모습을 숨기고 이동하는 게 능숙해 보였다.
“감히.”
가장 먼저 벨루몬에게 달려든 뭔가가
그저 휘두르는 벨루몬의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크와아아악!”
쿵.
벨루몬의 손짓 한 번에 녀석은 보이지 않는
뭔가에 의해 짓밟힌 듯 터져 그대로 생을 마감했다.
검은 옷과 대비되는 창백한 피부.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붉은 안광과
길게 삐져나온 송곳니, 그리고 날카로운 손톱.
입가뿐 아니라 얼굴 전체에 뿌려진 피까지.
피에 미친 한 마리의 짐승과 같은 모습의 마물이었다.
“흡혈귀다. 특별한 능력이랄 것까지는 없으나,
빠르고 강하다. 저래 보여도 꽤나 고위급 마물이니까.”
“…예.”
담담한 그의 말에 샤오란들이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톱에 긁히게 되면 곧바로 피부가 썩을 테니 유의하고,
물리게 되면 권속이 되어 놈들과 같아질 테니 조심하도록.”
“예.”
달그락.
우워어어.
“그리고 지금부터는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군의 지원도 필요할 거고.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일어라.】
마물의 언어가 들려옴과 동시에 스켈레톤들과
좀비, 구울들이 네크로폴리스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내가 상대할 테니, 너희는 가서 놈들을 막아라.”
딱.
벨루몬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샤오란들의 육신에 그의 힘이 깃들었다.
“이건…?”
“네크로폴리스가 뿜어내는 마기를 막아줄 거다.”
“감사합니다.”
“됐으니 꺼져라. 귀찮다.”
벨루몬이 샤오란들을 향해 벌레를 쫓듯 손짓했다.
“예.”
쾅!!!!!!!!!!!
대답과 함께 샤오란들이 언데드들과 흡혈귀들의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왔나.”
쿵.
벨루몬의 말과 함께 게이트로부터 인비디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과 곧게 편 허리, 커져버린 키까지.
이제 그의 모습은 마법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간만이군. 벨루몬.”
커져버린 덩치 때문에 이제는 그를 내려다보게 된 인비디아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가 쥔 지팡이의 끝에는 지름 1m는 될 법한
크기의 마력석이 검붉은색으로 웅웅거리고 있었다.
“뭐냐. 그 돼지 같은 몸뚱이는?
마도의 길을 걷고 있는 자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군.
멍청한 투르바 년이 마력 대신 무력을 키워준 거냐? 그래?”
압도적인 육체의 차이에도 벨루몬은
그저 육중한 그의 몸을 훑으며 차갑게 비웃었다.
“뭐라 지껄여도 좋다. 네놈은 내게 무릎을 꿇을 것이고,
결국은 위대하신 어머니의 이름 아래 굴종하게 될 테니까.”
“해볼 테면 해봐라. 애송이 마법사.”
벨루몬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보여주지.”
쿵!
“불사의 군단이여. 죽음과도 같은 잠에서 깨어 내 명에 따르라.”
인비디아가 지팡이를 땅에 박으며 중얼거리자
지팡이 끝의 마력석이 검붉은색으로 빛나 퍼져 나갔다.
이에 분명 죽었던 마물들이 하나둘, 다시 몸을 일으켰다.
찢어졌던 마물들의 몸은 기워졌고,
잘려 나간 팔과 다리가 다시 돌아와 붙었으며,
터져 흩뿌려졌던 살점과 내장, 피 역시 복구되었다.
“리바이브(revive)… 귀찮은 걸 가져왔군.”
벨루몬이 중얼거렸다.
“이로써 내 군단은 완성되었다.
죽여도 죽지 않을 것이며,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자, 네놈은 이제 어찌하겠느냐. 벨루몬. 크하하하하하하!!!”
그의 광소(狂笑)에 대기가 떨려댔다.
“다 웃었나?”
벨루몬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불사의 군단이라는 이름은 네놈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뭐?”
벨루몬의 말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오직 나. 망자의 왕. 벨루몬에게만 허락된 이름이다.
그러니 보여주마. 진정한 불사의 군단이 무엇인지를.”
벨루몬의 안광이 붉게 빛났다.
“와라. 권속들이여.”
후웅. 후웅. 후웅.
벨루몬의 말과 함께 그의 아공간 안에 머물고 있던
아크 리치와 리치들이 공간을 찢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리치들인가…!”
리치들의 면면을 살피는 그의 눈이 날카로웠다.
“보여라. 진정한 불사의 군단이 무엇인지를.”
벨루몬의 말 한마디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던
그들의 두 눈에서 붉은 빛이 팍하고 터져 올랐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병기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