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 * *
이라가 등장하기 1시간 전의 인도. 뉴델리.
키에에에에에에엑!!
쾅!!! 콰가가가각!!!
“…옴 소마니 소마니 훔 하리한나.
바나야 훔 아나야 바아밤 바아라 훔 바탁….”
마물들의 흉폭한 고함과 비명,
그리고 터져 오르는 화염과 폭발음들의 사이로
늙수그레한 이의 독경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낡고 닳은 가사를 입은 그는 전장의 가운데에서
반가부좌를 한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경전인지, 법문인지를 외고 있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몸에
안색은 희다 못해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번뇌도, 고민도 없어 보였다.
사방에 득시글대는 마물들과
세상을 뒤집을 것 같이 쏟아붓는 포탄에도
그의 얼굴은 평화롭기 그지없었고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끼에에에에에엑!!!
그의 독경에 마력이 실려 있지 않았음에도,
마물들은 그를 듣고 싫다는 듯이 몸을 비틀어댔다.
분명 알아듣지도 못할 인간의 말이건만
독경에 어린 항마(降魔)의 말들을 알아챈 것일까.
놈들은 계속해서 그를 물고 찢으려 했다.
하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물과 굽타 사이의 뭔가가 그들의 접근을 막았으니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허공을 향해
계속해서 제 손톱을, 이빨을, 주먹을 들이미는 것뿐이었다.
약이 바짝 오른 마물들이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힘은 좀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마물들은 함포 수준의 폭격에 죽어 나갔으며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파편에 깔려 또 터져나갔기에.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 또한 마력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헌터.
무한하게 그 힘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독경을 외는 소리가 점차 작아져 가고,
그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의 주변에
어느 정도 불투명한 막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마물들의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 이빨이 닿을 수 있게 됐다.
끼에에에에에엑!
카가가가가가가각.
변화를 눈치챈 것인지 마물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사나운 그들의 공격에 아뿔싸 싶었던 굽타가
다시 힘을 끌어 올리며 진언을 외웠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를 감싸고 있던 방호인지 주술인지가
눈에 띌 정도로 불안정하게 흔들려대는 상태였으니까.
콰직.
‘여기까지인가.’
“아미타불.”
그가 멍한 눈으로 깨져가는 제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단 한 점의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미련, 닥칠 고통에 대한 불안 등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고요하고 또 평온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와작작.
이윽고 깨진 힘의 파편 사이로
마물 하나의 이빨이 힘을 씹고 그를 뜯기 시작했다.
그때.
“굽타 헌터님. 시민들의 대피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안심하시고 그곳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어서요!!!”
이어폰 너머로 들려온 누군가의 말에 그는 합장을 한 채
죽음을 앞둔 자가 지을 수 없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하는 바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리라.
‘참으로 고맙소. 그대.’
죽기 전, 한 번 더 자신의 힘이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도록
기회를 준 한성에게 그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쿠와아아아아악!!!
“아미타불….”
이제 자신의 힘을 부수고 서서히 다가오는
마물의 날카로운 손톱을 바라보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친 데다 더 이상 마력을 유지하기도 어려웠으며
원하던 바를 모두 이루었기에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아
조용히 그리고 겸허히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려던 것이리라.
“충격에 유의하세요! 굽타 헌터!!!!”
어디선가 공기가 우릉우릉 떨릴 정도의 큰 고함이 들려왔다.
씩씩하고 강건했지만 분명 그것은 여인의 목소리였고,
굽타는 그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생각했다.
쾅!!!!!!!!
큰 충격음과 동시에 천지가 뒤집히는 충격이 일었다.
굽타의 깨져버린 힘 역시 그 충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콰자작.
대지를 강타한 힘에 굽타의 힘은 거의 부서져 내렸고,
충격을 이겨낼 리 없는 그의 나약한 육신이 공중에 떠올랐다.
‘이렇게 가는 건가.’
공중에 떠오른 그가 순간이나마
중력에서 해방된 것 같은 느낌을 즐기던 그때,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그의 등 뒤로 뛰어올라 그를 받았다.
사내가 굽타를 품 안에 안아 충격을 최대한으로 줄이려
몸을 둥글게 말았고, 이내 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콰가가가가각.
그가 떨어져 밀려가자 콘크리트 바닥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바스러지며 부서져 내렸다.
그 덕분에 굽타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이 무슨…?!”
“괜찮으십니까? 굽타 헌터?”
“괜찮습니다. 음…? 당신은…?”
굽타가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귀에 익은 목소리인지
고개를 돌렸고 등 뒤의 곰(?)을 보며 아는 체를 했다.
“예. 팽 린입니다. 대회에서 뵀었지요.”
“아. 그래. 그랬었지요.”
그가 주름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고 지휘소로 돌아가십시오.
구호반과 의료반, 그리고 힐러들이 굽타 님을 돌봐줄 겁니다.”
“저희라 함은…?”
“저와 링 링, 샤오란을 비롯한 정예 헌터들을 말합니다.
중국 전역의 헌터들을 모으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원이 늦어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랬군요.”
그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중국에서의 일이 떠올랐던 것일까.
“굽타 헌터님.”
“네?”
“먼저 중국 정부를 대신해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
“더 많은 생명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우한 시민들의 수많은 생을 쓰레기 버리듯 버렸습니다.
또 본 적 없는 타국의 국민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당신의 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희롱하고 이용하려 했습니다.”
“….”
“이는 명백한 우리 측의 잘못이며 천인공노할 죄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주석이 직접 당신께 사과를 해야 하겠으나,
아시다시피 지금 주석은 이전의 그가 아니게 되었기에….”
“…음….”
한성의 수하가 되어버린 주석의 상황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던 것인지 굽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정부를 대신해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이해해달라는 말도, 용서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에겐 그럴 자격이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렇기에 저희 나름대로 자격을 갖추고
자격이 갖추어지면 그때 당신께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부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의 눈과 목소리에서 간절함을 읽은 굽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제게 사과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분명 그 자리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맞습니다. 없었습니다. 그 일도 최근에 알았고요.
허나 이 모든 건 내 나라, 내 조국이 행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사과하고, 이야기해야 할 일이지요.”
그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미타불.”
굽타가 불호를 외며 눈을 감았다.
팽 린의 말은 진심인 듯했다.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를 이 시점에
구태여 자신에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으니까.
한 차례 휘몰아치던 굽타의 감정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용서했다는 듯한 그의 말투에
팽 린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쾅!!
“곧 더 큰 위험이 닥칠 겁니다.
마물들의 움직임도, 그들의 강함도 이전과 달라졌어요.”
굽타가 게이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휘부 역시 이를 염려해
군과 저희를 비롯한 인근 국가의 헌터 자원을 보낸 겁니다.”
“그렇군요.”
“지금껏 해왔듯 우린 잘 해낼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요.”
굽타의 주름진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 * *
쾅!!
“으아아아아!!!!”
전장에 나선 샤오란은 닥치는 대로 마물들을 짓밟았다.
말 그대로 아가리를 찢어 반으로 몸을 갈라놨고,
발로 밟아 대가리를 터뜨렸으며, 주먹으로 복부를 꿰뚫었다.
제 몸 따위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었고, 마력의 분배 또한 생각지 않는 듯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는 거칠고 날카로워
마물은 물론 동료 헌터들조차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
지금의 그녀를 움직이는 건 자신에 대한 혐오와
이한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불같은 열등감이었다.
대의를 위한다는 달콤한 말로 당과 제 아비가
수백만의 생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도 묵인하고 침묵했다.
상대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을 속이고 합리화해 시도조차 않고 싸움을 포기했다.
그동안 국가를 대표하는 헌터로서
그 모든 명예와 부, 권력을 누릴 대로 누려놓고는
정작 국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이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다.
그러나 한성은 그러지 않았다.
당당히 맞섰고, 싸웠으며 이겨냈다.
그런 그가 자신을 향해 비겁하다 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이, 그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부터 그녀는 자신에 대한 혐오로
하루하루가 괴로웠고 속이 타들어 가 견디기 어려웠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찢어졌으며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은 무너져 내렸다.
또한 한성은 이겨낸 녹스를
그녀는 그의 수하 나부랭이조차도 이겨내지 못했다.
한성은 굴복하지 않고 굴복시키기까지 한 당을
그녀는 이겨내지 못해 굴복했으며 침묵했고 또 외면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제 나라의 수장을
완전히 제 수하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한 그였다.
자신이라면 꿈에도 떠올리지 못했을 일.
그녀는 한성에 대한 열등감으로 몸이 타는 듯했다.
그래서 다짐했다.
더는 자신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겠다고.
더는 나약해지지 않겠다고.
한성에게 빚을 갚아 무너진 자존심과 자존감을 드높이겠다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것이었다.
굽타에게 사과를 하고 그를 돕는 것.
그것이 그녀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막상 그에게 사과하려 하니
몸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제대로 사과조차 하지 못한 채 그를 지나쳐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는 타죽을 것 같았으니까.
도무지 얼굴을 들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가라앉히려,
몸 안 가득 들어찬 화를 풀어내려 날뛰는 것뿐이었다.
딸랑.
“누나! 진정 좀 해요!!”
종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지척에서
링 링이 앙칼진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어?!”
“적아도 구분 못 해서 어쩌겠다는 거예요!!!
마물들을 때려잡아야지 왜 애꿎은 내 친구를 때려요!!”
그의 말대로 그녀의 주먹 끝에는
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팔을 들어 올려
필사적으로 그녀의 공격을 막으려는 마물이 보였다.
그래도 엠페러급의 소환사가 소환해낸 마물이란 것일까.
생채기는 있었지만, 딱히 큰 상처는 없었다.
데스나이트와 강시를 섞은 것처럼 보이는 녀석은
링 링과 똑같은 노란색 치파오 계열의 옷을 입고 있었다.
“…미안하다.”
샤오란이 그와 링 링을 향해 사과하자,
그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링 링도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 좀 식혀요. 네?”
“…조심하지.”
그녀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휘유… 엉망이로군. 여기도 그리고 당신도.”
팽 린이 난장판이 된 그녀의 곁을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굽타 헌터님은 안전지대로 모셨습니까?”
“걱정 마시오. 이미 옮겨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니.”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걱정 하덜 마쇼. 몸도 마음도 강한 분이오.”
“…그건 알지만.”
그녀가 안전지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마려운 개 마냥 그렇게 낑낑댈 게 아니라,
죄송하다 말을 하고 싶으면 빨리 가서 하고 오쇼.”
콰직.
팽 린의 말에 샤오란이 주먹을 강하게 쥐어 잡았으나
이내 힘없이 이를 풀어내며 답했다.
“아직은 내게 그럴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말씀을 드려도 적어도 놈들을 몰아내고 난 뒤에 해야죠.”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내 하나만 묻겠소.”
“…?”
“죄스럽다는 마음, 부끄럽다는 그 마음. 진짜요?”
“…예.”
그녀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팽 린을 바라보며 답했다.
“거짓은 없는 것 같군. 좋소. 그럼 내가 돕겠소.
이 개같은 일 빨리 끝내고 함께 가서 용서를 빕시다.”
“…하지만 당신이 왜…?”
“그게 팀이라는 거요. 이 사람아.”
그가 코를 쓱 닦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