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 * *
미국. 뉴욕.
“이거나 처먹어라!!!!”
쿠르릉.
라이언 나이트의 고함과 함께 건물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쾅!!!!
“쿠워어어어어억!!”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아래에 있던 마물들이
콘크리트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압사당해 터져나갔다.
“사자의 이빨!!”
콰가가가가각
성난 사자가 발톱을 휘둘러 사냥감을 찢듯,
그의 검으로부터 인 거친 검기가 마물들을 찢어발겼다.
“발포!!”
쾅!!!!!!!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마물들을 압박하는 건 나이트를 비롯한 헌터들만이 아니었다.
천조국이라는 별명답게 미국의 화력은 대단했다.
군인들이 쏘아 올린 박격포와 유탄들이
그들의 머리나 옆구리를 쳐 마물들의 시선을 빼앗았고,
이를 틈타 전차에서 쏜 철갑탄과 포환이 놈들의 머리를 쳤다.
전함에서부터 발사된 함포가 마물들을 가격했고,
전투기로부터 떨어진 미사일들이 그들을 강타했다.
도시 전역에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들과 함께
고통스러운 듯 마물들이 질러내는 비명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헌터들과 군의 합동 공격에도
상황은 생각보다 그리 낙관적이지 않아 보였다.
대로와 도로에는 10cm는 넘을 두께의 장갑차와 전차들이
종잇장 찢어진 것마냥 찢어져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거리마다 죽은 헌터와 군인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더 절망적인 건 수없이 많은 마물들을
죽이고 또 죽였건만 수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놈들은 여전히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고,
제집을 공격당한 벌들마냥 미친 듯 나다니고 있었다.
“허억… 허억… 끝이 없군. 제기랄.”
건물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지쳐 보였다.
늘 짜증과 권태로 가득 차 있던 그였건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도, 사람이 죽는 것에도
일말의 죄책감이나 조금의 거리낌도 느끼지 않던 그였다.
하지만 그가 갱스터일 때부터 함께 지냈던 제 사람들이,
피난 권고에도 나이트의 곁이 제일 안전하다던 그 사람들이
제 눈앞에서 죽어 나가자 그는 이성을 잃은 한 마리 짐승이 되었다.
눈앞의 마물들을 말 그대로 찢고 짓밟아 그 울분을 풀었다.
하지만 죽인 마물들의 수가 몇천, 몇만이 넘어가고,
체력이 줄고,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의 정도가 적어지자
그 감정들도 이제는 점차 옅어지고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옅은 분노와 피로뿐.
이제 그는 이 일련의 모든 것들이
얼른 끝나기만을 바라는 사람처럼 보였다.
“피곤하군.”
몇만의 마물들을 죽인 것일까.
그의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는 굳어 부스러져가는 핏자국과
얼마 되지 않았는지 새로 흘러내리는 피들이 가득이었다.
마물들의 것으로 보이는 체액과 살점들 또한
묻다 못해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의 대검, 아가멤논 역시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성과의 대결 이후, 잭 카메로를 감금하다시피 해,
자신의 대검을 수리 및 강화시켜 극에 다다르게 했었건만.
지금 그의 검은 전의 모습과 딱히 다를 바 없었다.
듬성듬성 날의 이는 빠져 있었고,
손잡이와 가드에는 날카로운 자국들이 가득했으니까.
“후… 형도 느꼈어?”
그가 땀과 함께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고위급 마물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을 말하는 거냐?”
기분 나쁠 정도로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이제 막 도착한 듯한 험프가 은신을 해제하며 답했다.
“어.”
“나도 느꼈다.”
“최소 A급 게이트 보스급에 달하는 놈들이야.”
게이트에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마물들을 노려보며 나이트가 이를 갈아댔다.
“그래. 그래 보이더군.”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저기서 나오는 마물 새끼들 수준이
끽해봐야 D급 게이트 보스 정도였어. 그게 다였다고.”
나이트의 목소리가 점차 거칠어져 갔다.
“그랬지.”
“그런데 이제는 C, B급 애들은 어디 가고
대뜸 A급 수준의 마물들이 뛰쳐나오고 있어.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거야?”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휘부 쪽에서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있고.
그리고 이런 현상은 우리 쪽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게이트에서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어.”
“제기랄…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군 쪽은 어때.”
“좋지 않다.”
“씨발.”
험프의 말에 그가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험프가 좋지 않다는 표현을 쓸 정도면,
괴멸되었거나 손도 쓰지 못할 정도로 당했다는 뜻이니까.
“정부와 상, 하의원들이 만장일치로 백린탄과 네이팜,
포스겐과 신경 가스탄 등 생화학 무기 사용을 허가했다.”
“어쩐지 불길이 거세다 했다.”
나이트가 공중에서 쏟아져 내리는
백린탄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덕분에 녀석들의 진군을 어느 정도 저지하고는 있지만….
그것도 곧이다. 놈들이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어.”
“적응?”
나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기.”
험프가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키자,
그곳에는 네이팜과 백린탄에 타들어 가는 마물들이 보였다.
또한 포스겐 가스를 들이마셨는지
고통스레 기침을 하며 피를 뱉어내는 녀석들과
신경 가스탄에 취해 술을 마신 것처럼 제멋대로
사지를 푸들거리다 종내에는 죽는 마물들도 보였다.
문제는 그들의 곁에 있는 마물들이었다.
험프의 말대로 옮겨붙은 불이 쉽게 꺼지지 않자
놈들은 아예 제 살을 뜯어내거나 팔을 잘라버리고 전진했고
자신들을 향해 꺼지지 않는 불을 쏘아낸 군 병력을 도륙해댔다.
게다가 포스겐 가스와 신경 가스탄에 적응을 해버린 것인지,
기침과 재채기 비슷한 걸 하더니 멀쩡히 움직여대기 시작했다.
“빌어 처먹을 괴물 새끼들.”
“동감이다.”
나이트와 험프가 마물들을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때.
흠칫.
둘의 시선이 동시에 게이트로 돌아갔다.
우웅.
분명 아무것도 없는 게이트이건만,
그들의 시선은 게이트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둘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의문이었다.
게이트 너머로부터 살이 저릴 정도의 살의와
기분이 나쁘다 못해 토악질이 날 것 같은 악의가 느껴졌다.
본능은 그들을 향해 도망치라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들은 그저 게이트를 바라만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둘은 ‘뭔가’가 뿜어내는 기운에 압도당한 것처럼 보였다.
꿀꺽.
“…온다.”
“그래.”
[물러나라. 인간.]
둘의 손이 자연스레 제 대검과 단검으로 가던 그때,
등 뒤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레그나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나이트의 말에 레그나토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네놈인가. 간만이군.]
레그나토르가 둘을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여길 어떻게?”
그를 바라보는 나이트의 눈이 반짝였다.
압도적인 무력을 갖춘 그라면 이 정신 나간 상황들을
별 무리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리라.
[놈을 막으라는 주군의 명이 있으셨다. 그뿐이다.]
“놈?”
그의 말에 나이트가 반문했지만
그는 게이트를 그저 바라볼 뿐 답하지 않았다.
[온다.]
레그나토르의 말과 함께 둘의 시선이
다시 한번 게이트를 향해 휙 하고 돌아갔다.
후웅.
게이트로부터 검붉은색의 빛 무리와 함께
중세시대에서나 볼 법한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척. 척. 척. 척.
검회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장착한 데스나이트들이
망토를 휘날리며 오와 열을 맞추어 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행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데스나이트…?”
험프가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나이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고,
그들에게서 인 죽음의 기운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이는 나이트만 느꼈던 감정은 아니었는지,
험프 또한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정지.】
오싹.
서릿발보다도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
알아들을 수 없는 마물의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이트와 험프의 전신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쿵.
수만에 달하는 기사단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추었다.
후웅.
게이트로부터 이라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대열에 선 데스나이트들의 갑주와는 다르게
그의 갑옷은 붉은색이 감도는 검은 색을 띠고 있었고,
여타 기사들의 비해 덩치며 키가 두 배는 될 법해 보였다.
‘지독한 악의를 뿌려댔던 게 저것이었나.’
그를 바라보는 나이트의 눈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치가 떨리는 악의였고, 구역질이 날 정도의 살의였다.
‘저들을 우리가 막아낼 수 있을까…?’
“또 보는군. 레그나토르.”
크게 고함을 지른 것도 아니건만,
그의 중얼거림이 옥상 위의 레그나토르에게 닿았다.
레그나토르를 올려다보는 그의 안광이 붉게 타올랐다.
[꽤나 강해졌군. 이라.]
레그나토르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
“보다시피.”
[투르바 놈이 준 힘이냐.]
“무엄하다. 신의 존함을 부르지 마라!!!”
이라가 고함을 내질렀다.
“크윽….”
거친 기파에 험프와 나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 존함? 개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남의 육신을 도둑질해 취한 놈이 무슨 신이란 말이냐.]
[비록 신이란 존재를 믿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나지만]
[그런 것이 신이라면 그 세계는 분명 잘못된 세계일 거다.]
레그나토르가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을 내뱉었다.
그의 녹빛 안광 역시 이라의 것과 다를 바 없이
크게 일렁였고 세상을 불태울 듯한 기세로 타올랐다.
“…모든 것은 그저 신의 뜻일 뿐이다.
네놈 따위가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라의 안광이 불안정하게 흔들려댔다.
[결국 네놈의 기사도도 거기까지인가 보군.]
“뭐라?”
[힘 앞에 굴복해 제 주인의 잘못을 외면하는 꼴이라니.]
[기사로서의 명예가 단 한 줌이라도 남아있었다면]
[그런 말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했을 것을.]
“닥쳐라!!!!”
이라에게서 거칠고 흉폭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원래대로였다면 내 직접 놈의 배를 가르고 목을 잘라]
[내 친우였고, 내 어버이였던 분의 넋을 기렸어야 했다.]
“이런 건방진….”
이라의 거친 기파에도 레그나토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허나. 그것은 내게 허락된 일이 아니다.]
“…뭐?”
[그것은 내가 아닌 주군께 허락된 일이며,]
[주군께서 친히 행하실 거룩하고 복된 일이시다.]
레그나토르의 안광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내게 주어진 일은 그저 네놈과 네놈의 졸개들을 베는 일.]
철컥.
레그나토르가 검을 들어 올려 이라를 겨냥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는 더 이상 지체 말고 와라. 베어주마.]
“같은 기사의 길을 걷는 자로서,
너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칼을 잡았던 자로서,
네놈을 그분의 종자로 추천하려던 내가 어리석었다.
네놈은 다룰 수 없는 칼이며,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이다.”
이라가 으르렁거렸다.
[첫째로 난 네놈과 같은 길을 걷는 자가 아니다.]
[네놈이 선택한 길은 내 길과 달리 이미 더럽혀졌다.]
콰득.
이라의 건틀렛이 묵직한 철제 소리를 냈다.
[둘째, 네 주인의 그릇은 내 주인의 그릇과 다르게]
[날 담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얕고 작으며 좁다.]
[그러니 날 다룰 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게 당연하다.]
“끝까지 나불거리는군. 죽여주지.”
[죽는 건 네놈이겠지.]
[와라. 기사단이여.]
레그나토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그림자로부터 아홉의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척.
그의 앞에 도열한 기사단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너희는 지금부터 이자들과 함께 놈의 졸개들을 베어라.]
레그나토르가 나이트와 험프를 보며 말했다.
쿵.
기사단이 가슴에 올렸던 손을 한 번 내리치는 것으로 대답했다.
[주군께서 우리 기사단 모두에게 내리신 첫 번째 명이다.]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 완벽히 이루어 내도록.]
[죽는 것은 물론이요. 다치는 것 또한 허용치 않겠다. 알겠나.]
쿵.
[가라.]
삭.
가벼운 목례와 함께 아홉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저들과 내 기사단을 헷갈릴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만]
[인간 측에 알려 내 기사단을 공격하는 실수는 않도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
그의 위엄에 짓눌린 모양인지, 나이트가 말을 더듬었다.
[그럼. 좀 있다가 다시 보도록 하지.]
쿵.
말을 마친 그가 건물의 아래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