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275화 (275/336)

275화

* * *

펑. 펑. 펑.

마물 연합군의 본대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폭죽이라도 터지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는지, 곧이어

발원지의 공중에 연달아 솟구친 붉은 빛이 보였다.

이는 정찰을 나간 이들이 쏘아 올린 것으로

적이 근접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왔나.”

하늘을 바라보던 테낙스의 시선이 주둔지로 향했다.

수성을 위해 급하게 만든 것이라고는 하나,

세계수의 가지들로 만들었기 때문인지 그 강도가

돌과 쇠로 만든 것들과 비교해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게다가 구조 또한 망루에 외벽, 내벽, 문, 해자와 도개교까지

갖춘 터라 여느 성들과 비교해도 부족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주둔지는 마물들이 북진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이곳에 지어졌다.

양옆은 깎아지르듯 가파른 절벽인데다,

절벽을 이루고 있는 암석과 바위들은 무르고 단단치 않아

함부로 만졌다간 무너질 염려가 있어 타고 오를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주둔지가 위치한 이곳을 거치지 않고는

마물들은 결단코 이 계곡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전략적 요충지인 셈.

전투로 인해 계곡이 무너질 수도 있음에도,

그들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이곳을 전장으로 택했다.

여차하면 이곳을 놈들과 자신들의 무덤으로 삼을 생각이었으니까.

놈들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다면

그들의 발걸음이라도 붙잡아 진군 속도를 늦출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마물들의 얼굴에는 결연함이 어려 있었다.

“전군 위치로!!”

“위치로!!”

테낙스의 고함에 마물 연합군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궁수 부대였다.

목책의 위로 활을 든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제 키의 반은 되고도 남을 장궁을 들고 있었고,

곁에는 다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화살 더미가 있었다.

언뜻 봐도 수만은 넘어 보이는 수의 화살.

언제 준비한 것일까.

목책의 아래 주둔지 사이에 난 구멍에는

제 몸만 한 크기의 석궁을 든 타우렌들이 있었다.

이들을 위해 애초에 주둔지를 만들 때부터,

전략적으로 석궁이 들어갈 구멍을 만들어 둔 듯했다.

그들의 곁에는 역시 그들이 사용할 볼트들이 가득했다.

엘프들의 활이 섬세하고 정확했다면

타우렌들의 석궁은 투박하지만 무식하리만치 강했다.

사정거리가 긴 장궁으로 다가오는 적을 견제하며

접근하는 적을 석궁으로 일격에 제압할 모양인 듯했다.

그런 그들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건 마법병단이었다.

저마다 오브나 지팡이, 혹은 마법서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엘프들의 뒤로 가

쉴드나 방호를 만들어 그들과 자신들을 방어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 목책에 강화 마법을 부여해 강도를 높였다.

정령과 원소력을 바탕으로 한 마법이 발전한 엘프,

회복과 강화 위주의 보조 계열 마법이 발전한 타우렌,

공격형 마법과 사령술 위주의 주술이 발전한 오크까지.

나름대로 그들의 역할은 잘 나뉘어져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호리병들 여럿이 매어져 있었다.

전사들에 비해 유난히 몸이 약한 그들을 위해

사전에 타우렌과 오크들이 공들여 만든 회복 포션이었다.

쿵. 쿵. 쿵. 쿵.

곧이어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철갑을 두른

오크와 타우렌 전사들이 위풍당당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제 몸만 한 크기의 방패를 들고 있었으며

허리춤과 등에는 도끼나 대검, 메이스 등의 무기를 매고 있었다.

방패를 든 전사들 일부는 엘프들의 앞으로 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수호할 방벽이 되었고,

나머지들은 목책을 타고 오를 마물들을 쳐낼 준비를 끝냈다.

쿠구구구구궁.

뒤이어 후방에서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퀴 자국이 바닥에 깊게 새겨질 정도로

무거운 발리스타들과 투석기가 소리의 정체였다.

발리스타에 장전된 화살은 화살이라기보다는

통나무를 깎아 만든 창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투석기에 담긴 돌은 거의 톤 단위 수준으로 보였다.

“궁수 부대 이상 무!”

“마법 병단 이상 무!”

“방패병 및 전사단 이상 무!”

“투석기 및 발리스타 작동 이상 무!”

총사령관의 직위를 맡은 테낙스에게로 보고가 들려왔다.

“대기.”

“대기!!!”

그의 말에 공기가 떨릴 정도의 복창이 뒤따랐다.

마물 연합의 기세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과도 같았다.

탁.

테낙스가 망루에 올라 병사들을 내려다봤다.

끝에서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병사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겠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는 테낙스의 눈길이 매서웠고 또 따뜻했다.

“우리는!!”

고요한 가운데 테낙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마력을 통해 전파되는 그의 목소리는

마물 연합군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에게 들렸다.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수준의 적과 싸우게 될 것이다.”

“….”

돌 조각 하나 구르지 않는 침묵이 이어졌다.

“적은 미친 듯이 몰아칠 것이고!

놈들의 시체로 수백의 산을 이룰 것이며

놈들이 흘린 피로 내를 지나 바다까지 이룰 것이다.”

“….”

“그 과정에서 옆의 동료가! 오랜 친우가!

그대들이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죽어 갈 것이다.”

“….”

전사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걸 원치 않는다면!!! 보고 싶지 않다면!!

그대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부딪쳐 싸우고 죽여라.”

“….”

“내 팔을 하나 내주어야만 한다면

적에게서는 두 팔 모두를 받아 가겠다는 심정으로.”

“….”

“내 다리 한쪽을 내어줘야만 한다면,

적에게서는 두 다리 모두를 받아 가겠다는 심정으로.”

“….”

“내 목을 내어줘야만 한다면….

적의 목 둘은 받아 가겠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싸워라.”

“….”

“나 또한!!!!”

잠깐의 침묵 뒤 그가 소리쳤다.

“그대들과 함께하겠다.”

“….”

“전선의 가장 앞에 나아가 칼을 휘두를 것이며,

최후에 최후의 순간까지 남아 칼을 휘두를 것이다.”

“….”

“그러니 형제들이여. 답하라.

나와 함께하겠는가? 나와 함께 죽겠는가!?”

칼을 쥔 손을 들어 보이는 테낙스의 물음에

전사들은 악을 지르듯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기꺼이!!!”

수백만은 될 이들의 대답은

단 하나의 틀림도 없이 정확히 동시에 울려 퍼졌다.

얼음보다 차갑던 전선의 분위기는 흥분과 분노,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감정으로 뜨거워졌다.

“맞이하자. 빌어먹을 저놈들을.

그리고 알려주자. 놈들이 상대하려는 자가 누구인지를.”

테낙스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주둔지는 고요해졌다.

* * *

“더 이상의 정찰은 불필요하다고 판단,

미약한 힘이나마 파수꾼들도 전장에 합세하겠습니다.”

언제 다가온 건지 모를 이디아가 테낙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테낙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소리도 기척도 듣지 못했건만… 언제…?’

풋내기 전사의 티를 벗고 이제는 완전히

날카로운 검이 되어 버린 이디아를 보며 그가 감탄했다.

“부탁하겠네.”

그래서일까. 이디아에 대한 그의 태도 또한 변해 있었다.

“예. 그럼.”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이디아가 망루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한낱 애송이인 줄 알았건만… 신궁을 이어받을 만하군.’

그의 흔적을 좇던 테낙스가

찾기를 포기한 듯 황무지 너머를 바라보았다.

쿠구구구구….

미약하게 땅이 떨렸다.

작은 돌조각들이 톡톡 튀었고, 흙먼지가 작게 피었다.

“온다.”

저 멀리 황무지를 보던 그의 눈에 모래 폭풍이 보였다.

“…빌어먹게도 많군.”

새까맣게 몰려오는 마물들의 모습에 테낙스가 이를 갈았다.

쿠구구구구구.

점차 녀석들의 발걸음 소리가 커져 갔고,

땅을 울리는 진동들 또한 이와 맞추어 커져 갔다.

놈들과의 거리가 점차 줄어듦에 따라,

녀석들의 형체와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코볼트부터 잿빛 갈기 늑대, 바이퍼, 보아, 맨티스, 하피,

하급 몽마, 트롤, 오우거 등 마물들의 모습도 종류도 다양했다.

게다가 그들의 행렬에는 만티코어나 코카트리스,

웨어 울프와 같은 고위 마물들도 몇몇 끼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반쯤 풀려 광기와 마기로 붉게 번뜩이는 눈과

피와 체액, 내장과 살점들로 뒤덮인 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었다.

나무가 있다면 찢거나 부딪쳐 박살 냈고,

바위가 있다면 그대로 뽑거나 깨부수며 돌진해왔다.

손톱이 부서지고 깨져 부술 수 없다면

이빨로 미친 듯이 물어뜯고 깨물어 부수려 들었고

그것마저 안 된다면 제 대가리를 박아서라도 부수려 했다.

비록 죽어 푸르던 제 색을 잃고 검게 물든 숲이었지만,

그들이 지나는 자리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아 있었다.

“지독하군….”

테낙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시선 끝에 약해진 마물의 살을 씹고

그들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어 피를 삼키는 마물들이 보였다.

녀석들은 장시간의 행군으로 지쳤는지

동료 마물들이 쓰러지거나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면

그대로 그들의 배를 갈라 피를 마시고 내장을 씹는 것으로

지쳤던 제 심신을 달래고 굶주림과 갈증을 해결했다.

방금 전만 해도 동료였을 바로 옆 마물들을 씹으면서도

그들에게는 한 톨의 죄책감이나 슬픔 같은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착실히 내장을 씹어댔고 바닥에 흘린 피를 기꺼이 핥아댔다.

마기에 미쳐 투르바의 꼭두각시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언데드가 아닌 엄연히 살아있는 생명체.

굶주림과 목마름을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으리라.

“우웨에에에엑.”

지옥의 한 귀퉁이를 바라보던 몇이 토악질을 해댔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통해 전쟁이라는 상황에

잔뼈가 굵은 테낙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광경.

목숨을 내걸고 나섰다고는 하나

평화만을 누리던 신출내기들이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악!!!!!!!!!!”

선두에 서 있던 마물들 중 하나가

그제야 마물 연합군의 존재를 눈치챈 건지, 소리를 질러댔다.

검붉게 물든 눈에 피범벅이 된 얼굴,

피 때문인지 입가에 붉게 물든 피거품까지.

한눈에 봐도 그들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구궁.

놈들이 다가올수록 땅의 울림은 점점 커져 갔다.

수만이 될지, 수십만이 될지, 혹은 수백만이 될지

모를 마물들이 파도처럼 휩쓸려 주둔지를 향해 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절벽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진동.

피와 살을 원하는 저들의 고함과 악다구니.

이를 바라보는 연합군들의 손은 땀으로 젖어갔고,

무기를 움켜쥔 손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사정거리 진입까지 10초 남았습니다.”

조악한 수준의 망원경으로 마물들을 지켜보던 관측병이 소리쳤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와라. 애송이들아.’

테낙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5초 남았습니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조금만 더.’

“놈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아직이다.”

“테낙스 님!!!”

테낙스의 말에 관측병이 놀라 소리쳤다.

“아직 아니다. 아직은.”

“하… 하지만….”

바로 코앞까지 몰려온 마물들을 보며

관측병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말을 더듬던 그때.

“이디아!!!!!!!!!!!!!!!”

팡.

테낙스의 고함과 함께, 고함과 땅이 흔들리는

소음의 틈바구니로 활의 줄이 튕겨지는 맑은 소리가 들렸다.

콰아아아아앙!!!!!!!!!!!!

주둔지로부터 피어오른 한 줄기의 푸른빛이

호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마물들에게로 나아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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