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274화 (274/336)

274화

* * *

“긴장되지 않으십니까?”

이티카가 꽤나 키가 큰 나무의 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본래는 파릇파릇한 잎을 틔워내고 있었어야 할 세계수의 가지.

나무의 잎은 다 떨어지고, 바짝 말라 검게 죽어 있었다.

그녀가 생을 다했기 때문이리라.

툭.

“오셨습니까.”

위에서 황무지 너머를 바라보던 테낙스가

이티카의 목소리에 힐끗 아래를 보고는 뛰어 내려왔다.

“내려오실 필요까지는 없는데요. 하하.”

“괜찮습니다. 어차피 내려올 생각이었으니.”

“그러십니까.”

“물음에 답을 해드리자면 긴장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전 긴장이 돼서 원.”

그가 장난치듯 엄살을 부리며 대답했다.

“여긴 어쩐 일로.”

“대화나 할까 해서 왔습니다.

좀 있으면 이런 소소한 대화들이 그리워질 테니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좀 걸으실까요?”

“예. 그러시죠. 그럼.”

고개를 끄덕인 테낙스가 걸어 나가다,

나이가 들어 걸음이 느린 이티카가 마음에 걸렸는지

이내 발걸음 속도를 줄여 그와 걷는 속도를 같이 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아직도 다른 종족들의 존재가 거북하십니까?”

이티카가 다른 종족들의 막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뇨.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가 씁쓸하게 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편해 보이시던데요.”

이티카가 회의 때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죄스러워 그렇습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답했다.

“그런 답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의외로군요.”

이티카의 눈썹이 올라갔다.

“함께 살자고, 함께 싸우자는 저들더러

이종족이라며 더럽다는 미친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저들이 알지 못했다 해도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지요.”

“….”

“그런 제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저들과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미안하고, 죄스럽고, 부끄러워 편히 있기 힘들었습니다.”

“…많이 변하셨습니다그려.”

“이제야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겠지요.”

씁쓸한 웃음을 짓는 테낙스였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것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다행입니다.”

“예?”

이티카의 말에 테낙스가 되물었다.

“당신에게 등을 맡길 준비가 되어있는 저들과 달리

당신은 홀로 싸우려 들까 노파심에 걱정하고 염려했었습니다.”

“…그럴 리가요.”

“괜한 걱정이었다 싶군요. 하하.”

“….”

“저들은 이미 당신을 동료라 여기고 있습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며, 함께 나아갈 동료.”

“알고 있습니다. 느껴지니까요.”

“그러니 당신도 그 마음이 정말 진심이라면,

더 이상 죄스러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말고

그저 그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함께하시면 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요. 그거면 된 겁니다.”

그가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다.

또다시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이티카가 입을 열었다.

“다가올 전투는 쉽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당신이나 제가 겪어왔던 모든 전투들을 합친 것보다 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내야겠지요.”

“예.”

“얼마나 많은 이가 다칠지 또, 죽을지 두렵습니다.”

“….”

“하지만 나아가야겠지요.”

“예.”

“부디 세계수의 빛이 우릴 인도하길….”

“세계수의 빛이 우릴 인도하길.”

둘의 쓸쓸한 눈이 밤하늘을 향했다.

* * *

“결계의 준비가 완료되었나이다. 주군.”

한성의 허상 결계 앞에 선 벨루몬이 읍하며 말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삭.

땀으로 범벅이 된 한성이 상기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딱.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손끝에서부터 인

시원한 물과 바람이 한성을 땀을 식히고 몸을 씻어내었다.

“고맙다.”

“별말씀을.”

“조금 쉬셔도 될 텐데요.”

“몸도 풀 겸 겸사겸사. 분노하는 자도 시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계가 안정적이라는 뜻은….”

“어. 세계수가 내게 남긴 힘이 상당했던 모양이야.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근방까지는 다룰 수 있게 됐어.”

“경지가 한층 더 완숙해지심을 경하드립니다. 주군.”

벨루몬이 다시 한번 읍하며 말했다.

“별거 아니다. 준비는?”

“모든 것은 주군이 뜻하신 대로.”

“정말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역시 벨루몬이야.”

한성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말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제가 맞습니다만,

그를 생각해내신 것은 제가 아니라 주군입니다.”

“히이노 때 막아낸 걸 보고 거기서 착안한 것뿐이다.

생각은 누구나 한다. 그걸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지.”

“허나….”

“됐어. 낯 간지러운 소리 그만해.”

“예.”

“너나 타우한이나 무리한 건 아닌가?”

“마력석이 있었기에 저는 딱히 무리한 게 없었나이다.

다만 신성력은 마력과 달라서 그런 것인지 타우한 녀석이

조금 무리한 듯해 보였나이다.”

“그래?”

“마력과 심력을 회복 중이오니 너무 염려치 마소서.”

“미안하군.”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이시여.”

“…알겠다. 디멘션 게이트는 살펴봤나?”

“예.”

“…별말이 없다는 건 파괴가 불가하단 뜻이겠군.”

“아뢰기 송구하오나 제 힘은 물론,

주군의 힘으로도 파괴가 불가능할 것이옵니다.

제대로 힘을 갖추어 발호하기 전에 제가 살폈다면 모를까,

이미 모든 힘을 갖춘 채로 완전히 발호했기에….”

“그렇겠지.”

“섭리와 인과율마저 무시하고 만들어진 귀물입니다.

어지간한 신격을 갖춘 이가 아니라면 흠집도 못 낼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뼈아픈 실책이야.”

한성은 디멘션 게이트를 모두를 찾아

한 번에 제거하지 않았던 지난날 자신의 안일함을 탓했다.

“주군이 아니셨다면 하나조차 파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것을 마음에 두지도, 괘념치도 마소서.”

“그리 말해줘서 고맙다. 마물 연합군 쪽은?”

“북상하는 마물들을 막아낼 준비가 끝났나이다.”

“이에 대한 투르바 측의 반응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놈의 생각을 모르겠나이다.

별다른 반응이나 이렇다 할 움직임 하나조차 없었나이다.”

“흠….”

“그리고 바두르와 이티카 녀석이 중앙에서

저들이 있는 구역을 중심으로 수성(守城)을 할 것이라기에

인간계에 한 것과 같이 방호의 영역을 확장해 두었나이다.”

“잘했어. 수고했고.”

“예.”

“우리가 합세하지 않음을 서운하게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군.”

한성이 바두르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지 않으니 너무 심려치 마소서.

그들도 주군께서 더 큰 일을 행하려 하심을 알고 있나이다.”

“…음.”

“일전에도 말씀드렸듯 주군께서 저들과 함께하신다면,

분명히 빠르게 마물 놈들을 제거하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허나 그것이 투르바 녀석이 원하는 그림일지도 모르옵니다.”

“내가 없는 틈을 노릴 수 있다는 거겠지.”

“맞습니다.”

“그렇다 한들 나에겐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있다.

세계와 세계의 연결이라는 일을 숨 쉬듯 해버리는 네가.

놈이 무슨 짓을 하든, 문을 열어 저지하면 될 일이 아닌가.”

“…절 높게 평가해주심은 너무나 황송한 일입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놈의 방해가 없을 때 가능한 일이옵니다.”

“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물어보는 한성에 벨루몬이 입을 열었다.

“놈에게는 차원과 차원을 잇는 힘이 있습니다.

섭리와 인과율마저 무시하는 힘이 있음까지도 보였고요.”

“게이트와 디멘션 게이트를 말하는 건가.”

“예. 허나 진짜 문제는 그 두 힘 모두가

놈이 몸을 갖추지 못했던 때부터 보여 왔던 힘이라는 겁니다.”

“…음.”

“몸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놈이

완전히 몸을 갖춰 제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무슨 일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

“먼 옛날, 신이 그랬듯 차원 간의 연결을 끊을 수도,

차원을 이동하는 제 마력을 포착하고 이를 왜곡시켜

차원과 차원의 사이에 저희를 가둘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다못해 제 마력에 간섭해 연결을 방해할 수도 있나이다.”

“…그 생각은 못 했군.”

“그렇기에 더더욱 주군께서는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

“부디 왕께서는 저들을 믿으시어

저들이 스스로 맡은 바 일을 다 할 수 있게 해주소서.

저들은 제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전사들이지,

주군이 품에 안고 얼러야 할 젖먹이들이 아닙니다.”

“…후. 알겠다.”

한성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갑갑하군. 놈이 먼저 움직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대신 저희에게도 만일의 사태를 준비할 시간이 주어졌나이다.”

“…그건 맞지만.”

“너무 조급해 마소서.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벨루몬이 한성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한성의 심란하고 붕 뜬 마음을 다잡으려는 것이리라.

“고맙다.”

“별말씀을.”

* * *

사사삭.

숲에서 마른 풀잎 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무에서 잎들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고,

숲이라 부를 만한 덤불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쥐새끼 하나조차 보이지 않건만

풀잎 소리는 어디에서부터 들려온 것일까.

“대기.”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

목소리가 떨어짐과 동시에 검게 죽어가는

나무 기둥들 사이로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방어구는 염료를 칠한 것인지 온통 까맸고,

등에 맨 활과 화살의 깃대마저도 검게 칠해진 상태였다.

어디서 구한 건지 나무의 색과 꼭 닮은 잎사귀,

그와 같은 검은 나뭇가지들로 위장한 그들의 모습은

숲의 일부분이 걸어 다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쫑긋.

들리는 소리도 없건만 그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탁.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황급히 바닥으로 내려와

바닥에 귀를 대고 뭔가를 감지해내려는 듯 눈을 감았다.

으득.

“빌어먹을…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군.”

눈을 뜬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파수꾼들은 경계하도록.”

“예.”

그의 말에 그들은 작고 간결하게 답하며

각자의 구역으로 빠르게 흩어져 이내 모습을 숨겼다.

슥.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작은 마력석이 바로 그것.

콰직.

그가 화살을 꺼내 마력석을 내리찍었고,

마력석은 깨지며 폭죽처럼 붉은 빛을 뿜어댔다.

뿌드득, 퉁. 펑.

활시위가 당겨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하늘 위로 그가 쏘아 올린 화살이 솟구쳐 올랐고

이내 큰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지듯 붉은 빛이 터졌다.

“철수한다.”

“예.”

제 임무를 마쳤다는 듯한 그의 말에

엘프들이 순식간에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 * *

“…푸르르. 드디어 시작인가. 간만에 몸 좀 풀겠군.”

우드득.

리워르가 투레질과 함께 목을 꺾었고

제 종족들이 있는 진영으로 나아가며 소리쳤다.

“형제들이여!! 개전(開戰)을 준비하라!!!”

“무어어어어어!!”

그의 고함에 타우렌들이 소리 높여 소리쳤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군요. 놈들의 진군이.”

바두르가 멀리 공중에 떠오른 붉은 빛을 보며 말했다.

“놈들은 제 주인의 부름에 응할 뿐, 지치지 않으니까요.

제 주인의 명을 수행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을 겁니다.”

이티카 역시 하늘을 바라보며 바두르의 말에 답했다.

“대족장. 우리도 슬슬 준비하러 가 봐도 되겠소?”

네바다가 바두르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러도록. 허나, 돌발 행동과 단독 행동은 금한다.”

제 키보다 머리 두, 세 개는 더 클 네바다에게

하대를 하는 바두르의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고,

네바다 역시 그런 바두르의 하대가 당연하다는 듯했다.

이제는 바두르를 완전히 제 족장으로 인정한 것이리라.

“잘 알겠소. 걱정 마시오. 하하.”

바두르의 대답에 네바다가 씩 웃으며 나아갔다.

“간만에 피 좀 보겠구만. 하하하!!”

“내기할까? 누가 더 많이 죽이나?”

“좋지. 꼴등이 일등의 하루 노예가 되는 거다.”

“좋아.”

전투와 살육을 즐기는 오크들답게

대장군들은 유쾌하게 웃으며 자기들끼리 지껄였다.

“전군 준비!!!!!”

“우!!!!”

네바다의 곁에 있던 판의 외침에

오크 진영에서 기합에 가까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수십만에 가까운 그들의 고함은

단 하나의 어긋남 없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 소리만으로도 공기가 떨릴 정도.

“그럼, 저 또한 가보겠습니다.”

“세계수의 가호가 그대에게 닿기를.”

“세계수의 가호가 그대에게 닿기를.”

“몸 보중하십시오.”

“예. 당신도.”

이티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테낙스가

정령의 힘을 빌린 것인지 가볍고 빠르게 나아갔다.

텅 빈 지휘소에 남은 것은 바두르와 이티카뿐.

“바두르 님. 별동대를 움직여야겠습니다.”

“그럽시다.”

바두르와 이티카의 늙고 주름진 눈이 전의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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