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 * *
“서둘러!!!”
서울의 한복판, 트럭에서 마력석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삐 – 삐 – 삐”
쏟아진 마력석들은 하급부터 최상급까지 다양했고,
가치와 상관없이 한데 뒤섞여 바닥에 던져지다시피 했다.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얼굴에는
무슨 일인가 하는 궁금함보다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두 아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강건은 한성과의 대화 이후 빠르게 움직였다.
각종 SNS와 언론사에 연락을 해 방송을 시작했고,
지금의 상황에 대해 여과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더 이상은 숨길 수도 없고, 숨겨서도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구했다.
당신이 가진 마력석을 팔아달라고.
그것이 하급이든 상급이든 상관없으니 사겠다고.
이것으로 우리는 쏟아질 마기와 사기를 막아낼 것이라고.
전시 상황이라며 협회나 정부의 이름을 들먹이며
강제로 차출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간절하게 고개를 숙여 부탁할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반응은 즉각적이고 폭발적이었다.
헌터 개인에서부터 기업에 이르기까지
마력석을 팔겠다는 이들의 연락이 빗발쳤고,
몇몇 고위 헌터들과 기업은 무상으로 내놓기도 했다.
마력석은 곧바로 서울로 보내졌다.
필요하다면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비행기와 기차를 활용했다.
그런 소중한 이들의 마음이 더해졌기 때문일까.
마력석을 둘러싼 헌터들과 군인들의 경비는 삼엄했다.
군인들은 지금 당장 전장에 투입되어도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을 정도 수준의 무장을,
헌터들은 상위 게이트를 공략하는 수준의 무장을 한 상태였다.
쿵.
지축이 흔들리는 충격과 함께 아스팔트 바닥이 바스러졌다.
“이게 마지막일세.”
강건이 다섯 평 공간을 채우고도 남을 법한 크기의
마력석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협회의 마력 측정기에서 떼어내 온 듯했다.
“굳이 회장님께서 힘쓰지 않으셨어도 됐을 텐데요.”
요코하마가 강건을 바라보며 웃었다.
“뭐, 내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일이 바빠서 하고 있는 게 많은 것도 아닌데, 뭘.”
강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게다가 기계 장비를 쓰거나 다른 헌터들이 이를 옮기려면
하세월 걸릴 걸세. 그거 지켜보다 속이 터지는 게 더 빨라.”
“그랬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나저나 이 정도면 충분할지 모르겠군.”
“아마 충분할 겁니다.”
강건이 가져온 마력석을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다른 국가나 도시들의 상황은 어떤가?”
“7할 정도가 준비 완료됐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마력석의 준비가 미비하거나 없는 국가는 인근 국가에서
이를 조달하거나 미, 일, 중, 러에서 빌려 준비 중이고요.
이 속도라면 오늘이 가기 전에 모두 준비될 것 같습니다.”
“그거 다행이구만. 그들은 별말 않던가?”
“별말이 있은들 어쩌겠습니까?
이한성 헌터라는 거대한 산이 제 뒤에 있는데.”
그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본이고, 중국이고, 러시아고, 미국이고 바짝 엎드려서
알겠습니다. 드리겠습니다. 하는데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고마워해야지. 그러면 쓰나.”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속이 시원한걸요.”
요코하마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후… 잘돼야 할 텐데.”
“잘될 겁니다. 이한성 헌터가 하는 일이니까요.”
한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믿음을 보이는 그였다.
“거. 사람 참. 지휘할 때는 누구보다 냉철하더니,
한성 군 이야기만 꺼내면 눈에 하트가 생겨나니. 원….”
“동경하고 있습니다. 존경하고 있고요. 하하.”
요코하마가 간만에 유쾌하게 웃었다.
“이한성 헌터가 아니었다면 인류는….
그리고 세상은 이미 진즉에 망해 나자빠졌을 겁니다.”
“음.”
“가끔 하는 실없는 생각이지만,
저는 어쩌면 이한성 헌터가 신의 사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아니면 신의 은총을 한 몸에 받는 이 정도는 되겠죠.”
“실없긴.”
“그는 세상을 구할 겁니다. 반드시.”
“음. 그랬으면 좋겠군.”
강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겠죠.”
“그래. 그래야지.”
우웅.
강건과 요코하마가 농담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그때,
마력석이 펼쳐진 상공 위로 마력이 일고 공간이 일그러졌다.
흠칫.
철컥.
군인들의 총구가 일그러진 공간에 겨눠졌다.
헌터들 또한 이는 마찬가지였다.
긴장된 기색으로 각자의 무기를 들고 공간을 바라봤으니까.
“괜찮네. 벨루몬 씨가 오는 거니, 긴장들 풀고 내려놓게.
그렇게 총구를 들이대고 무기를 들고 있다가 혼날지도 몰라.”
강건의 말에 모두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정쩡한 자세로 총구와 무기를 슬며시 내렸다.
후웅.
이윽고 벨루몬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바로 곧이어 타우한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잘 오셨습니다. 벨루몬. 타우한.”
강건이 그들을 반가이 맞이하며 말했다.
“낯이 익은 녀석들 몇 보이는군.
덕분에 총구를 들이대는 멍청한 녀석들이 없어서 다행이고.”
벨루몬이 안광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잘 지냈소? 건강해 보여서 좋구만 그래.”
“덕분입니다. 타우한. 이제 다 나은 것 같습니다. 하하.”
안부를 주고받는 타우한과 강건의 모습이 친근해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 아니면 더 필요하실지요?”
요코하마가 벨루몬을 향해 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수고했다.”
“별말씀을요.”
벨루몬의 말에 요코하마가 황송하다는 듯 답했다.
“모두 물러나라. 시작할 테니.”
벨루몬의 말에 이를 지키던 군인들과 헌터들이 물러났다.
우웅.
벨루몬이 대충 손을 한 번 휘적거리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던 마력석들이 한데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마력석은 거대한 하나의 구체로 변해갔다.
“피로 물든 맹세여, 언약에 따라 이곳에 현현하라.”
벨루몬의 주문이 끝나자, 피보다도 붉은 색의 글자와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마법진이 그 위에 새겨졌고
기분 나쁠 정도로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저건…?’
헌터들과 강건, 요코하마의 눈이 번뜩였다.
빛으로부터 희미하고 옅지만 분명 사특한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나아가라.”
명령 같기도, 주문 같기도 한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빛은 하나의 막이 되어 세상을 향해 퍼져 나갔다.
마치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기세로.
“내 차례군.”
콰득.
타우한은 품에서 토템들을 꺼내
구체의 사방으로 제 토템들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는 주문인지 주술인지를 외던 그가
두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떼자 그로부터 황금의 빛이 새어 나와
토템들에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후웅.
토템에 새겨진 수많은 도형과 기호, 문자들에서
다시 한번 그보다 더 밝고 따뜻한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화악.
순식간에 피어오른 신성의 기운들이 구를 감쌌고,
공중에 떠오른 구체는 이내 정육면체의 빛 안에 안착했다.
“후.”
타우한이 한숨을 내쉬자, 그제야 강건과 요코하마도 숨을 내쉬었다.
순간 숨을 쉬는 것을 잊은 것 같은 모습.
“…엄청난 신성이군.”
강건이 중얼거렸다.
“벨루몬 님이 펼치신 방호도…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적어도 일본 근해와 중국 대륙의 일부까지는 닿을 수준이에요.”
태블릿 화면을 보던 요코하마가 혼이 나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벨루몬에 대한 말투나 태도가 더욱 공손해진 그였다.
“그러니까… 이걸 작게는 도시, 크게는 국가 수준으로 세워
방호를 확대, 연결해 결국은 지구 단위 수준으로 만든다는 건가?”
“이한성 헌터의 설명으로는 분명 그랬습니다.”
“반신반의했건만… 이게 가능할 줄은 몰랐군.”
“주군께서 행하시는 일에 불가능 따위가 있을 것 같으냐.”
벨루몬이 그들의 곁에 내려오며 입을 열었다.
“방호를 세우는 목적이 접근하는 마기와 사기를
소멸시키는 것이라면 이는 나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내겐 세계수가 가졌던 권능과 신성의 힘이 없으니까.
그것은 제아무리 타우한이라 해도 마찬가지이고.”
“…신이 아니고서야 그럴 테지.”
강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단순히 마기와 사기를 밀어내
이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가능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눈을 반짝이며 묻는 요코하마.
“별거 아니다. 나 또한 마물이며, 언데드다.
게다가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대마도사야.
마기와 사기를 다루는 것이라면 나 역시 놈 못지않지.”
“그건 확실히 그렇겠지.”
강건과 요코하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물론 놈의 것보다는 훨씬 옅긴 하겠지만.”
“곧 죽어도 약하다는 말은 안 하는구려. 군사.”
마무리를 마친 타우한이 다가서며 웃었다.
“닥쳐라. 소대가리.”
벨루몬이 으르렁거리자 타우한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하튼 다시 말을 이어서 하자면,
방호에 어린 마기는 놈의 것과 동류의 힘이다.
이는 놈의 힘과 방호가 충돌 시에 서로 반발치 아니하고
물이 물을 밀어내듯 비켜 가거나 자연스레 밀려남을 뜻한다.
물론 밀려나고 비켜나는 것에 마물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투르바 녀석이 피워낸 마기와 사기에만 통할 뿐이야.”
“혹시 놈의 마기와 당신의 마기가 뒤섞이거나
오히려 놈에게 당신의 마기가 흡수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요코하마가 물어왔다.
“아니. 저 힘의 근본은 마력이지 마기가 아니다.
마력에 마기를 덧댄 것일 뿐, 뒤섞일 수도 흡수될 수도 없다.”
“그렇습니까.”
“…그런 방법은 생각도 못 했거니와 가능할 줄도 몰랐군.”
요코하마와 강건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 또한 마력이 무한하지 않다.
이 정도나 되는 마력석이 있지 않았으면 불가능했겠지.”
“음….”
“여하튼 당분간은 방호를 쉽게 뚫지 못할 거다.”
“…당분간이라 함은…?”
“놈이 제대로 몸을 취하게 되고,
더 강한 힘을 내보이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제아무리 비슷한 힘이라 해도 짓누르면 그만이니까.”
“…역시.”
“허나 그를 위해 타우한의 신성이 있는 거다.
방호를 깨뜨리려거든 타우한의 신성부터 부숴야 할 거다.
놈이 직접 현현해 이걸 부수지 않는 한은 방호가 유지될 거고.”
“아이러니하네요. 마기를 보호하는 신성이라니.”
요코하마가 타우한의 신성을 보며 중얼거렸다.
“가자. 타우한. 아직 돌아야 할 곳이 많다.”
“그러지. 가겠소. 몸들 조심하시오.”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곳곳에서 피어오른
벨루몬의 방호들이 하나로 연결되어가기 시작했다.
* * *
성인 장정 사오십은 들어가고도 남을 천막 안.
늙은 엘프 하나와 날카로운 기세의 엘프 하나.
누가 봐도 전사의 표본과 같은 모습의 타우렌 하나.
늙은 오크 하나와 무식하리만치 큰 덩치의 오크 다섯.
도합 아홉이 탁상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홉만으로도 천막은 가득 차 보였다.
탁상 위에는 마물 세계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듯한 모형이 있었다.
계곡과 산, 평지 등의 지형마저 세세하게 표현된 모습이었다.
북쪽에는 투르바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세력들이,
중앙에는 마물 연합군의 것으로 보이는 푸른 세력들이 보였다.
그들의 아래로 북상 중인 검은 세력들이 보였다.
마물 군단이리라.
“오크들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늙은 오크가 입을 열었다.
오크의 지낭(智囊) 바두르였다.
“엘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타우렌 역시 모든 준비가 끝났소.”
이티카와 리워르 역시 그의 말에 대답했다.
“주군께서 뒤를 부탁하셨습니다.
함께하지 못함을 용서하라고도 하셨고.”
“투르바의 동향을 살피려 하심이겠지요.
그게 아니더라도 하실 일이 많으신 분이시고.”
“그렇습니다.”
바두르의 말에 이티카가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푸르릉.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
저따위 하급한 놈들쯤이야 우리만으로도 충분할 것을.”
바두르의 말에 리워르가 투레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이 맞다. 리워르.”
무식하리만치 큰 덩치의 오크가 입을 열었다.
“몇이 오든 갈아버리고 찍어버리면 그만이지.”
험상궂은 얼굴의 라우라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맞다. 하하!”
라우라의 말에 오크들이 호쾌하게 웃어댔다.
“자신감은 분명 중요한 것입니다.
허나 우리의 임무가 막중함을 잊지 마십시오.
이마저도 막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알고 있다.”
바두르의 말에 각자의 방식으로 답한 그들은
회의를 파한 뒤, 굳은 얼굴로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