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 * *
[괜찮으십니까?! 주군?!]
“괜찮나! 주군?! 어?!”
가장 먼저 달려온 레그나토르가 한성을 부축했다.
“난 괜찮다. 그보다 세계수는?”
한성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타우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소생은 어려워 보입니다.]
“역시 그런가….”
“주군 괜찮으십니까!?”
“주군 괜찮으세요?!
벨루몬과 티에라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걱정하지 마라. 이 정도로는 죽지 않으니.”
한성이 괜찮다는 듯 슬며시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가서 주변을 살펴라. 마물들이 미쳐 날뛸 거다.
세계수의 힘이 무너진 마당에 이곳도 더는 안전하지 않아.”
“…알겠나이다.”
“티에라는 일족들의 안전을 살피고,
레그나토르와 칸은 마물들의 침입을 막아줘.
벨루몬은 마물 연합과 지금 현 상황을 소상히 보고하고.”
“네. 알겠어요.”
[지엄하신 왕의 뜻대로.]
“알겠다.”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삭.
순식간에 넷이 모습을 감추었다.
“…제기랄.”
한성이 중얼거렸다.
으드득.
이빨이 갈리고 부끄러움에 몸이 떨렸다.
눈앞에서 투르바를 놓쳤다는 생각.
그녀의 힘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
그녀의 속내를 꿰뚫고, 마음을 뒤흔들었다 생각했건만,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건 그녀가 아닌 자신이었단 생각.
본신이 아닌 화신 하나에도 압도당했다는 생각.
여러 생각들이 한성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자신의 무능함이 분했고, 어리석은 자신이 화가 났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은 그저 한낱 장난감,
혹은 단순한 유희거리였다는 사실 또한 수치스러웠고,
그녀를 다 잡았다고 착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강하다 자만한 적은 없다. 거들먹거린 적도 없다.
쉽게 그녀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녀를 잡아두거나 적어도 상처를 줄 순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그녀를 잡아두지도, 상처를 주지도 못했다.
한성이 여러 생각에 번민하고 있던 그때,
귓가에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야….”
‘세계수?!’
한성이 황급히 세계수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성이 다가갔음에도 타우한은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치유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타우한의 온몸은 비라도 맞은 듯 땀으로 젖어 있었다.
주술인지, 뭔지를 중얼거리는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무리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의 곁에는 수 개의 토템이 꽂혀있었고,
그로부터 상서로운 기운들이 일어 그녀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타우한의 손에서 핀 환한 녹색의 빛도
그녀에게 쉼 없이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지만,
그녀를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인 듯했다.
“…아이야.”
“네. 세계수 님.”
세계수의 부름에 한성이 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대답했다.
“…네게… 미안하구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조금 더 너에게 힘이 되어줬어야 했는데….
그녀를 막아줄 방패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
“무겁고 많은 짐을 너 혼자 떠안게 해서….
널 홀로 저 짙은 어둠과 마주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그보다는 회복에 전념하십시오.”
한성이 입술을 짓씹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더 이상은 소용없을 거란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이 또한… 아마도… 그분께서 안배하신 것일 테지.”
“…네?”
그녀의 알 수 없는 말에 한성이 되물었다.
“그분의 뜻은 크고도 오묘하단다.
가끔은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릴 이끄시지.”
“….”
“이리 가까이 오렴….”
한성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파리해진 손으로 한성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세상을 구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너에게도… 너의 동료들에게도… 큰 부담이 될 테니까….
하지만… 고통받는 이들을 모른 척 외면하지는 말아다오….”
“네. 그리하겠습니다. 반드시.”
한성이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누구에게나 따뜻한 왕이 되어주렴.
늘 너의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자상한 왕이 되어 줘.”
“…노력하겠습니다.”
“노력이라… 그리 답할 줄 알았다. 넌 그런 아이니까.”
그녀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이건 내가 너에게 남기는 마지막 힘이란다.”
세계수의 손이 빛나고 한성의 손에 낀 반지가 빛났다.
언젠가 세계수가 주었던 그 반지였다.
[‘세계수의 반지’에 대상 ‘세계수’의 힘과 의지가 스며듭니다.]
“…이건?!”
반지로부터 느껴지는 충만한 힘에 한성의 눈이 커졌다.
[‘은신’의 숙련도가 MAX에 도달, ‘소멸’로 진화합니다.]
[‘왕의 위압’, ‘왕의 함성’의 숙련도가 MAX에 도달합니다.]
‘이건 또 무슨…?!’
우드득.
놀라움도 잠시 그녀의 몸이 조금씩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지탱하던 마지막 기운마저 스러졌기 때문이리라.
“세계수 님!!! 세계수 님!!!!!!”
세계수의 붕괴에 한성이 놀라 소리쳤지만
이미 시작한 신체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다.
“이익…!!!”
타우한이 혼신의 힘을 다해 회복의 술을 걸었지만,
그녀의 몸은 여전히 부서져 내렸고 변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걸….”
그녀의 손끝에서 씨앗 하나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내 후대가 될 아이란다… 부디… 잊지 말고….
때가 되었다 싶거든… 양지바른 곳에 그 아이를 심어다오….”
“…그리하겠습니다.”
“염치없음을 알지만 뒤를 부탁하마.
왕이 될… 아니, 이미 왕이 된 아이야.”
사악.
무너지기 시작한 그녀의 육체는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가기 시작했고,
이내 바람에 휘날려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
“…빌어먹을.”
한성이 아직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가슴 한 군데가 빈 것 같았다.
한성에게 많은 사랑을 주었던 그녀였고,
한성이 많이 의지했던 그녀였기에 더욱 그러했을지도.
“미안하오. 주군. 여기까지가 내 한계요.”
타우한이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의 힘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다.
이마저도 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
너의 잘못도, 자책할 만한 일도, 미안해할 일도 아니야.”
한성이 담담히 대답했다.
“…사자소생의 술을 시도하려 했었소.”
“음?”
타우한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술을 펼쳤다 해도 부족한 내 격으로 인해
제대로 펼쳐졌을지, 그녀를 되살렸을지는 모르겠소만….
애초에 그녀가 그리하기를 원하지 않았소. 거부하더군.”
“…왜지?”
“이 또한 운명이며, 신이 그린 그림의 일부일 거라 했소.”
“…역시 그랬나.”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생각한 한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언젠가 반드시 그 힘을 쓸 때가 올 거라고.
자신보다는 그것이 더 필요한 이를 위해 쓰라고 하더군.”
“….”
“내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얼마나 어질고 선한 분이셨는지는 알겠더이다.”
“그래. 분명 그러셨다.”
탁.
타우한이 토템들을 챙기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려고?”
“뒤를 부탁한다는 그녀의 말….
그 말은 단순히 주군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오.
주군을 비롯한 남겨진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
“그렇기에 난 그녀의 말을 따르려 하오.
연합군들의 진영에 가 방호도 살필 것이고,
다친 자들이 있는지, 죽어가는 자가 있는지 살필 것이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최선의 것이니까.”
“…괜찮겠어? 그 몸으로?”
“괜찮소. 조금 지쳤을 뿐이니.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 하고.”
그가 담담히 대답했다.
“알겠다.”
그의 사명감과 각오를 느낀 한성이 더는 말하지 않았다.
등을 돌린 타우한이 몇 걸음을 걷다 멈춰 섰다.
“…?”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 거요. 더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고,
더 많은 슬픔과 눈물, 절망과 아픔이 세상에 넘쳐나겠지.”
“….”
“그러니 주군께서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나아가 주시오.
그 숱한 감정들에 잡아먹히거나 매몰되지 말고 굳건하게.”
“….”
“그 외롭고 고독한 길에 내가 함께하겠소.
주군의 등 뒤에서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겠소.
그러니 이 슬픔과 절망들을 주군이 멈춰 주시오. 부디.”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물기가 어려 있었다.
“…노력하겠다.”
“그거면 됐소.”
대답을 끝으로 타우한이 성큼성큼 나아갔다.
* * *
“정황은?”
“좋지 않습니다. 왕이시여.”
한성의 말에 벨루몬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적으로 세계수의 신성이 사라진 후,
투르바의 마기에 미친 자들의 수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그럴 테지.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다.
이제껏 세계수의 보호 아래에서 살아온 그들이야.
갑작스러운 투르바의 마기를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지.”
한성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군에 속한 마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물들이
투르바의 마기에 노출되어 죽거나, 이성을 잃고 흉폭해져
서로의 피와 살을 탐하며 서로를 죽고 죽이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한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와 칸이 본 것 또한 그와 같았습니다.]
“맞다.”
레그나토르와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 마물들 모두가
북쪽을 향해 진군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옵니다.”
“북쪽이라 함은….”
“예. 아무래도 심연의 절벽으로 향하는 것 같았나이다.”
으득.
“모두 제 졸개로 삼겠다는 뜻이겠지.”
이를 문 한성이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후….”
“현재 우리 마물 연합군의 수는 전체 마물의 3할쯤 됩니다.
투르바의 군대 또한 전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는 비슷합니다.”
“그럼 나머지 녀석들이 투르바 쪽에 붙게 되면
전력 수준에 관계없이 머릿수는 두 배가 넘는다고 봐야겠군.”
“정확합니다.”
“….”
“물론 나머지 마물들의 대부분이 짐승형 마물들이고,
지능이나 그 힘이 대단치 못해 큰 전력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는 문제가 된다.
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측 힘을 갉아 먹거나
고기 방패로 쓰기엔 충분하니까. 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고.”
“제 생각도 같사옵니다.”
“일단 알겠다. 연합군의 방호는 어때? 부상자나 사망자는?”
“방호는 괜찮소. 별 무리 없이 막아내고 있소.
혹시 몰라 강화도 해두었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요.”
“음.”
“연합군 내에 부상자나 사망자는 없소.
다만 티에라 부족의 일원들이 죽거나 많이 다쳤소.
부상당한 인원들의 상태 또한 썩 좋지 않소. 아마도 곧….”
타우한이 뒷말을 흐렸다.
“…파수꾼들이겠군.”
“네.”
티에라가 슬픔을 억누르며 담담히 답했다.
“이디아는?”
“그는 괜찮아요.”
“…그런가.”
한성의 대답을 끝으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침묵을 깬 건 칸이었다.
“뭐가 말이냐?”
“그토록 원하던 몸을 손에 넣었건만,
놈이 어째서 지금까지 조용한 건지 알 수가 없군.”
“그리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아네스의 육신은 투르바의 것이 아니다.
새로운 육체에 적응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다.”
칸의 물음에 벨루몬이 답했다.
“음….”
“게다가 비록 죽고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 육신은 그의 강한 신념과 정신을 담았던 껍데기다.
투르바 놈의 사기와 마기를 거부할 가능성도 적지 않아.
그러니 투르바는 그를 지배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럼 불안정한 이때 우리가 먼저 치면 되지 않나.”
“멍청한 녀석. 그 생각을 놈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 같나?
분명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몸을 피해 있을 거다.
또한 주술이든 뭐든 모종의 대책을 세워 뒀을 거고.”
[내 생각도 같다.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
[군사의 말대로 침입을 대비, 뭘 준비했는지도 모르고]
[놈이 언제 몸을 완성해 우리를 압박할지도 모를 일이다.]
[놈을 치려다 오히려 우리가 낭패를 보게 될 수도 있어.]
조용히 관망하던 레그나토르가 입을 열었다.
“흠… 그렇군.”
“…연합군의 전투 준비는 끝났나?”
“예. 주군.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말단 병사 하나의 무장은 물론이고 훈련도 끝마쳤으며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별동대 또한 준비되어있습니다.
지원 물자며 식량 및 식수 또한 미리 확보해 두었나이다.”
물샐틈없는 벨루몬의 보고에 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이것부터 시작하지.”
한성과 벨루몬들의 회의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