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 * *
“…누구요?”
날카로운 고통에도 타우한은 담담했다.
목덜미로부터 흘러내린 피가 등을 적셔감에도
타우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등 뒤의 그를 향해 물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상황임에도,
당장에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임에도
타우한의 얼굴에는 긴장이나 두려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네놈 따위가 알 바 아니다.”
음성의 주인공이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세계수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마라. 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다면.”
음성의 주인공의 날 선 경고에도
타우한의 손은 여전히 환한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은 쉬지 않고 세계수를 향해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당신에게 해줄 말은 두 가지요.”
“뭐?”
타우한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첫째. 내가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소.
둘째. 검을 거두는 게 좋을 거요. 죽고 싶지 않다면.”
“뭐라는 것이…? 흡…!?”
타우한의 대답에 음성의 주인공이 의문을 표하던 순간,
기척도 없이 어디선가 나타난 칠흑과도 같은 색의 뭔가가
그와 타우한의 사이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짓쳐들어왔다.
카각!
당장이라도 타우한의 목을 벨 듯 섬뜩한 빛을 흩뿌리던
그의 검이 짓쳐 오르는 흑도를 향해 마주쳐 나갔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어 올랐다.
탁.
“너는…?!”
놀란 듯 그의 안광이 흔들렸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건만 또 보는군.]
레그나토르가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그가
아네스의 성에 왔던 때를 기억해내며 중얼거렸다.
쾅!!!!!!!
“윽….”
레그나토르의 말을 끝으로 이어진 묵직한 연격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타우한에게서 떨어져 몸을 피해야만 했다.
“오셨소. 레그나토르 경.”
타우한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탁.
레그나토르가 그와 세계수의 앞에 서며 입을 열었다.
[괜찮나?]
“덕분에.”
[목부터 치료해라. 꽤나 상처가 심해 보이는군.]
“괜찮소. 이 정도쯤은. 급한 건 그게 아니오.”
[알겠다.]
타우한의 대답에 그는 두말하지 않고
다시 검을 들어 올렸고, 눈앞의 대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를 베고 싶다면, 적어도 날 먼저 베야 할 거다. 이라.]
“…이름을 기억해주다니, 영광이로군.”
이라가 안광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다른 군단장들은 어디에 있나.]
“곧 보게 되겠지.”
쾅!!!!!!
별안간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지축을 흔들리는 충격이 일었다.
충격의 진원지는 한성과 투르바가 있는 그림자의 권역 안이었다.
“애송이 주제에 요란하게도 날뛰는군.”
권역을 보던 이라가 이죽거렸다.
[그러게. 몸조차 갖추지 못한 천한 마기 덩어리 따위가]
[주군과 합을 나눌 정도라니… 생각보다 제법이군 그래.]
레그나토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감히!!!”
쾅!
이라의 안광이 분노로 미친 듯이 타올랐고,
쏜살같이 짓쳐 든 이라의 검이 레그나토르의 목을 노렸다.
캉!!!!!
[얕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검을 쳐낸 레그나토르가 중얼거렸다.
“건방진!!!”
카가가각!
쏟아지는 수십의 참격에도 레그나토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쉬이 이를 막아냈다.
쾅!! 까가가각.
맞붙은 두 검으로부터 충격이 일었고,
힘겨루기로 인한 불똥이 쉴 새 없이 튀어댔다.
[겨우 이 정도의 검으로는 날 벨 수 없다. 이라.]
[예나 지금이나 네놈의 검에는 여전히 화가 많군.]
“…말이 많아졌군. 전과 다르게.”
[네놈 따위와 말을 나누기 싫었을 뿐이다.]
“그 건방짐과 오만함은 여전하고.”
[여전히 나약하고 멍청한 건 너 또한 마찬가지다.]
“….”
캉!!!!!!!
검을 밀친 이라가 저만치 멀어지자,
레그나토르 또한 검을 내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일전의 그 제안은 아직도 유효하다. 레그나토르.”
[투르바 놈의 개가 되라는 그 제안 말이냐?]
“…더 이상 그분을 욕되게 하지 마라.
네놈의 오만방자함을 참아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참지 않아도 된다. 이라.]
그가 검을 바로 잡으며 대답했다.
[아니지. 그 실력으로는 참을 수밖에 없을지도.]
콰득.
검을 쥐어 잡은 이라의 손이 분노로 떨려댔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레그나토르가 담담히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내 대답은 같다.]
[내 검과 내 혼은 주군을 위해 휘둘러질 것이다.]
[마기 덩어리 따위에게 내 충을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런 건방진…?!”
그의 분노한 음성이 숲을 가득 채우던 그때.
“거 봐요. 이라. 내가 그랬죠? 안 넘어온다니까요.”
이라의 뒤에서 포탈이 떠올랐고
머지않아 우르티카가 매혹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또 뵙네요. 레그나토르.”
그녀가 웃으며 레그나토르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왜 안 보이나 했다. 탕녀.]
“응하지 않겠다면 부수면 그만이다. 이라.
더 이상 꼴사납게 놈에게 매달리지 마라. 추하니까.”
쿵.
모르부스가 말과 함께 거칠게 콧김을 뿜어내며
무식하리만치 큰 도끼로 나무들을 베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 또한 그 말에 동감한다. 이라.”
투모르가 그의 뒤를 이어 유유히 걸어 나왔다.
‘미노타우르스 킹에 사자 왕까지.’
레그나토르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품은 기운이 대단하긴 하군. 탐나는 녀석이야.
내 꼭두각시로 만들어 데리고 다니면 든든할 것 같구만.”
기분 나쁠 정도로 음침한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검은 연기가 점차 트롤의 형태를 갖추었다.
인비디아였다.
[…네놈들이 5군단장인가?]
레그나토르가 그들을 바라보며 안광을 번뜩였다.
“그렇다.”
[생각보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군.]
“철 조각 따위가 뭐라 지껄이는 건지. 잘 안 들리는군.”
모르부스가 어깨 위에 도끼를 얹은 채
잔뜩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듣지 못했나? 별 볼 일 없어 보인다고 했다.]
[혹시 이제는 찔 데가 없어 귀 안에까지 살이 찐 건가?]
“이런 건방진.”
팡!
레그나토르를 향해 던진 모르부스의 도끼가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광풍을 일으키며 나아갔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그의 근육만큼이나
도끼가 쏘아져 나가는 속도 또한 탄환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레그나토르는 이를 바라만 볼 뿐,
이를 피하려 하지도, 막아내거나 도망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도끼가 레그나토르에게 닿기 직전,
저편에서부터 고함에 가까운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누가 우리 귀여운 막내를 건드리나!!!!”
어디서 나타난 건지 레그나토르의 앞으로
제 몸보다도 큰 방패를 든 새빨간 오크 하나가 뛰어왔다.
칸이었다.
쾅!!!!!!!!!!!!!!!!!!!
귀가 먹먹할 정도의 굉음과 함께 도끼가 방패에 부딪쳤다.
칸은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방패를 손쉽게 막아 내고는
날아온 속도와 힘의 배는 될법한 힘으로 이를 도로 쳐냈다.
“좋구나!!!!!!”
“제법이군.”
칸을 바라보던 모르부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쾅!!!!!
“흡…?!”
되돌아온 제 도끼를 잡아낸 모르부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뻐근함과
타는 듯한 통증에 순간 도끼를 놓칠 뻔했기 때문.
자존심이 상한 것이리라.
‘대단하군.’
칸을 바라보는 투모르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단순히 완력만으로는 자신조차도 이길 수 없건만
그런 모르부스의 완력을 손쉽게 막아낸 것도 모자라
이를 배로 되던지기까지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강자와 싸워보고 싶다는 호승심이라도 인 것인지
그의 손은 어느새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가 있었다.
투모르의 눈이 번뜩이고 검이 발하려던 그때.
쾅!!!!!!!!!!
함포 수준의 굉음과 함께 투모르에게로 포격이 가해졌다.
‘분명 아무런 기운도 기척도 느끼지 못했거늘!?’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쏘아져 온 뭔가를 향해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그것을 반으로 갈라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것으로부터 인 폭발까지는 막아내지 못했다.
쾅!!!!!!!
“크아아악!!”
푸른 화염에 휩싸인 그가 고통스러운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휘두르자, 검압에 불은 금방 진화되어 사라져갔다.
“이까짓 잔재주를!!!!”
노한 사자의 고함에 숲이 쩌렁쩌렁 울려댔다.
“목청 한번 좋은 고양이로고.”
칸이 씩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흥분을 가라앉혀라. 투모르. 적은 아직 건재하다.”
“빌어먹을….”
인비디아의 말에 그는 녹고 찢어진 방어구 일부를
거칠게 뜯어내며 중얼거렸고 보이지 않는 적을 찾았다.
또다시 그 끔찍한 고통을 겪고 싶지는 않았기에.
[왔나.]
“그래. 내가 왔다. 막내야.”
레그나토르의 앞에 선 칸이 씩 웃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
[…아직도 그 소리인가.]
“한번 막내는 영원한 막내지. 하하하!”
[군사와 티에라는 어디 있나.]
“군사는 연합군의 방호를 점검하러 갔다. 곧 올 거다.
티에라는 봤다시피 놈들을 요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고.”
‘동부 벌목 지대의 지배자… 칸이었던가.’
칸을 바라보는 모르부스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자신의 힘을 쉽게 막아내고 쳐낼 정도의 힘이라면,
제 오른팔로 쓰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싶어서였으리라.
레그나토르와 칸을 유심히 바라보는 건 그만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품은 기운이 범상치 않다.
모르부스, 이라, 투모르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아.
게다가 숨어 있는 녀석의 화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고.’
둘을 바라보는 인비디아의 눈이 매서웠다.
‘품을 수 있고, 찍어 누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내 생각이 틀렸군. 놈들은 위험해. 대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인비디아의 눈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더 성가셔지기 전에 손을 쓰는 게 나을 것 같군.’
생각을 마친 인비디아가 결심한 듯 몰래 힘을 끌어모았다.
독인지 아니면 부식인지, 혹은 둘 다인지
녹색과 회백색이 섞인 듯한 기운이 손끝에 맴돌기 시작했다.
[우르티카. 너도 합세해라. 여기서 하나는 제거하고 간다.]
인비디아의 텔레파시에 그 진의를 알아챈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기운을 끌어 올렸다.
곧 우르티카의 손끝에도 새빨간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네놈부터 처리해주지.’
인비디아의 손과 눈이 완전히 검게 물들고,
우르티카의 손끝에 어린 기운이 완전히 붉어졌으며
레그나토르들을 향해 둘 모두가 손을 뻗으려던 그 순간.
“허튼짓할 생각하지 마라. 애송이들아.”
공간이 찢어지며 벨루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벨루몬. 망자의 왕…!”
“그래. 그게 바로 나다. 또한 마도사이기도 하지.”
딱.
파직.
말을 마친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 이런?!’
인비디아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리기 시작했다.
인비디아와 우르티카의 손에 모여들던 기운들이
벨루몬이 피워낸 작은 마력에 깨지며 흩어져 사라졌다.
“우윽….”
디스펠의 반동인지 우르티카와 인비디아의 내부가
마력의 뒤틀림으로 들끓었고 그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 짧은 순간에 우리 둘의 힘을 파악하고
그를 역산해 파훼까지 했다는 말인가? 이런 미친…?!’
“별 어설픈 저주 조각 따위에 당할 녀석들도 아니거니와,
녀석들에게 그따위 장난을 치도록 가만히 둘 나도 아니다.”
붉게 타오르는 그의 안광이 우르티카와 인비디아를 향했다.
“해볼 테면 해 보아라. 뭘 하든 파훼하고 배로 갚아주지.”
“…으득.”
“그리고 그런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닌 것 같군. 그래.”
벨루몬이 인비디아의 가슴팍 언저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가슴팍에는 보지 못했던 붉은 점 하나가 보였다.
“우리 측 사수가 네놈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다.”
“…놈인가.”
투모르가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네놈이 힘을 쓰려 했다면 배에 구멍이 뚫렸을 거다.
단순히 아픈 걸로 끝나진 않았을 거라고 내 장담하지.”
말을 마친 벨루몬이 손을 들어 올리자 붉은 점이 사라졌다.
“경고는 여기까지다. 지금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천 갈래 만 갈래로 몸이 찢겨 피가 마르고 싶지 않거든.”
벨루몬의 말을 끝으로 두 진영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