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263화 (263/336)

263화

* * *

“주군…?!”

[이런….]

턱.

쓰러지는 한성을 어느새 다가온 레그나토르가 부축했다.

한성의 어깨를 감싼 그의 손이 꽤나 부드러웠다.

[괜찮으십니까? 주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침착하던 그의 음성이 그의 안광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난… 괜찮……ㄷ”

풀썩.

말을 마친 한성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놀란 레그나토르가 벼락같이 고함을 질러댔다.

[타우한!! 주군을 살펴라!! 어서!!!]

“호들갑 떨지 마라. 레그나토르.

단순한 탈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

주군의 혼은 여전히 웅대하고, 강인하시며 건재하시다.

이는 나보다도 네놈이 훨씬 더 잘 알 텐데? 멍청한 녀석.”

벨루몬이 다가와 한성의 안색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군사의 말이 맞소. 단순한 탈진일 뿐이니 걱정 마시오.

내가 손대지 않아도 주군께서는 이미 스스로 회복하고 계셨소.

거기다 회복의 술도 걸어두었으니 곧 있으면 깨어나실 게요.”

한성의 몸을 어루만지던 타우한의 힘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무후후. 이럴 때 보면 경과 군사는 참 많이 닮은 것 같소.”

[뭐?]

“뭐라는 거냐?”

타우한의 말에 둘의 안광이 동시에 번뜩였다.

“아니. 뭐, 그렇잖소. 둘 모두 주군을 대하는 게

어린 제 자식을 대하는 것마냥 소중하고 조심스러우니 원.

실제로 제 자식을 낳아도 그렇게 대할지 궁금할 정도요. 난.

어차피 낳지도 못하겠지만. 안 그렇소?”

“그러네요.”

타우한의 농담에 티에라가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이 깡통과 내가 닮다니 재수 없는 소리 마라. 죽고 싶으냐?”

[신하 된 자로서 주군을 걱정하는 것뿐이다. 닮다니.]

[내 칼이 너에게 향하는 걸 원치 않는다. 입조심하도록.]

“알겠소. 거참.”

살기를 뿜어대는 둘을 보며 타우한이 머리를 긁었다.

“여하튼 주군은 우리가 걱정할 정도로 약한 분이 아니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봤지 않소. 우리 다섯을 쉬이 누르는 걸.”

둘을 바라보던 타우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그건 그렇지.]

‘묘한 데서 닮았군.’

이를 말없이 지켜보던 칸이 코웃음 치며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

타우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소. 음….”

“뭐라는 것이냐. 똑바로 말해라.”

벨루몬이 짜증을 내며 물었다.

“비유를 하자면 방금 전 주군의 몸은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마른 천과 꼭 같았소.

정확히는 억지로 물기를 짜낸 것 같았다고나 할까?”

“…뭐?”

[모든 것을 쏟아부으셨기 때문일 거다.]

타우한의 말에 레그나토르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뭐라…?”

“음. 나도 경과 그 생각이 같소.

제아무리 단단한 주군의 몸이라고 할지라도

그 힘은 쉽게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거요.

몸이 버텨내지 못할 것 같으니 무리하며 쏟으신 거겠지.

주군마저 버텨내지 못할 정도라… 참으로 무서운 힘이구만.”

타우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군사의 결계를 깨뜨릴 정도면 말 다 했지.”

칸이 질린다는 얼굴로 한성을 바라보았다.

“다만 문제는 아직 힘을 제대로 통제 못 하신다는 거요.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이신 적이 없었거늘.”

“…음.”

한성을 바라보던 벨루몬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우한의 말대로 한성은 그 어떤 싸움에서도

피투성이가 된 채로 탈진한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힘의 사용자이자 주인인 한성조차도

그 힘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뜻이겠지.

게다가 힘을 사용한 시간은 5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그 짧은 시간 만에 멀쩡하던 사람이 걸레짝이 됐으니 놀랄 법도.

얼마나 큰 힘이 한성에게 주어진 건지

벨루몬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 타우한이 우스갯소리로 했던

한성이 신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그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벨루몬들이었다.

벨루몬은 피투성이가 된 한성의 몸과 옷을

따뜻한 물로 닦아내고 따뜻한 바람으로 말려냈다.

“으…음….”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이 눈을 떴다.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드시옵니까? 왕이시여.”

“괜찮아요? 주군?”

“괜찮나?! 주군?”

“어허. 주군은 아직 환자요. 자자 물러나시오들.”

한성에게로 몰려든 벨루몬들을 타우한이 물렸다.

“음… 괜찮다. 좀 무리를 했어.”

한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리하지 마시오. 주군. 아직 몸이 성하지 않소.”

“괜찮다. 이 정도는. 쓰러진 지 얼마나 됐지?”

“채 십 분이 지나지 않았나이다. 왕이시여.”

“그래? 그건 다행이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별일 없었어. 그저 내 힘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을 뿐이야.”

“역시.”

타우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았어.”

한성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중얼거렸다.

“그림자를 부리는 힘은 점점 더 강해질 거고,

그 능력이나 활용 방법 또한 더욱 크고 다양해질 거다.

소화의 힘 역시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역량을 키울 거고.”

[더욱 강인해지심을 축하드리옵니다.]

“그런 인사를 받긴 이르다. 아직 멀었으니까.”

한성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지.”

한성의 말에 벨루몬들의 눈 모두가 흔들렸다.

“너희들이 강해진 것도, 성장한 것도 사실이지만

투르바 녀석에게 대항하기엔 아직은 많이 부족해.

한동안 쉬었던 훈련을 재개할 거다. 모두 각오하도록.”

“하… 하지만 불과 1시간 전에는 잘했다고….”

“그래. 분명 그랬지. 그래서 그에 걸맞은 상을 주려고.”

“…무슨?”

“목숨만은 살려주마.”

벽력같은 한성의 말에 현기증이 인 벨루몬들이었다.

* * *

“어떻게 돼가고 있나?”

피곤한 듯 눈가를 꾹꾹 누르며 강건이 물었다.

깔끔하고 단출하던 그의 집무실이 어지러웠다.

집무실은 복잡한 숫자와 글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서류와 종이들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가득 차 있었고,

벽면 스크린에서는 전 세계의 상황이 중계되고 있었다.

마물들의 목을 베고 배를 가르며 나아가는 헌터들의 모습,

군과 합동해 마물을 제거하고 게이트를 닫는 헌터들의 모습,

무너진 건물 속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구해내는 이들의 모습,

시체들의 산에서 제 연인, 가족을 찾으며 우는 이들의 모습 등.

다양한 모습들이 비치고 있었다.

게다가 꽤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모양인지,

강건의 상태 또한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퀭한 두 눈에 추레한 몰골,

깎지 않아 덥수룩한 수염에 떡진 머리.

제대로 된 밥조차 먹지 않고 대충 때우고 있는 것인지

책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빵 봉지와 샌드위치 포장지까지.

폐인이 따로 없었다.

“보고드린 대로 모든 국가들이

빠른 속도로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래?”

“국가 존속 기능을 잃었던 몇몇 국가들 역시도

우리 연합의 물자와 군, 헌터들의 도움으로 기능을 되찾았고

이 덕분에 자립할 수 없었던 국가들도 이제 스스로 자립하게 돼

자국을 방어하는 것은 물론, 타국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소식이군.”

찰칵.

강건이 시가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이 때문인지 각국의 정치권과 수뇌부도

우리와의 연합을 진심으로 기꺼워하는 모양새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협조 중이고요.”

“음.”

강건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않아 전쟁이 시작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이제 각국의 군 당국 역시 헌터들과 연대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또, 새로이 생겨나는 게이트들 역시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고요.”

“그 또한 다행이고.”

강건의 굳어 있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마지막으로 다가올 마물들과의 전쟁에 대비해

각국에서 차출된 헌터들과 병력들을 바탕으로 군대를 만들고

전략전술을 활용한 전투 훈련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병력이든, 헌터든 쉽게 내어주지 않을 텐데?”

“내어주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저희 뒤에 누가 있는지 잊으셨습니까?”

강건의 말에 박 실장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한성 군 말인가? 사람 그리 안 봤는데, 꽤나 영악해졌구만.”

강건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세상이 절 이리 만들더군요. 후후.”

“군은 됐고, 헌터들의 무장 수준은?”

“주 전력이 될 중상에서 최고위급 헌터들은 이미

손댈 것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음.”

“중상급 이하 수준의 헌터들에게는

여력이 있는 국가에서 무상으로 이를 대여하거나,

싼값에 무기와 방어구들을 공급해주고 있습니다.”

“좋아. 지휘부는 누가 맡기로 했나?”

“일본의 요코하마 헌터가 이를 맡고 있다 합니다.”

“그래? 폐인이 됐을 줄 알았건만 그건 의외로군.”

“생각보다 유능한 편인 것 같았습니다.

병력의 분배며 상황과 경우에 따른 공수의 전환도

꽤나 자유롭고 유연해 창의적인 지휘관이란 소리도 듣고요.”

“흠….”

“게다가 이한성 헌터가 대놓고 그를 두둔해서인지,

그의 임용을 못마땅해하거나 불만을 가진 이도 없었습니다.

또 지휘관을 따르지 못하겠다면 동맹에서 나가도 좋다는 말에

모두 아무 불평불만 없이 요코하마 헌터의 말을 따르고 있고요.”

“그건 다행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한성 군은 어디서 뭘 하고 있던가. 연락도 안 받던데.”

“저 또한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대답이나 별다른 입장 표명은 없었습니다.”

“…흠.”

“그렇다고 해서 하던 일을 멈춘 것은 아닙니다.

엠페러급 헌터들이라 할지라도 손대기 쉽지 않은

고위급 게이트나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기색이 보이면,

곧바로 이한성 헌터의 동료분들이 나타나 이를 해결 중입니다.”

“한성 군이 바쁜가 보군. 어쩌면 나보다 바쁠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후후.”

근래에 웃음을 보인 적 없던 박 실장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나저나 한성 군이 부탁했던 게이트는 찾았나?”

“죄송합니다.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어렵습니다.”

“…흠.”

“서버를 통한 탐색뿐 아니라 각국의 헌터 협회와

수색과 탐색에 능한 헌터들에게도 이를 의뢰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놓고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역시 그렇겠지… 쉽게 찾을 수 있는 거였다면,

천하의 그 벨루몬이 이제껏 찾지 못했을 리가 없지.”

강건이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어찌 됐든 탐색은 멈추지 말고 계속해주게.

비용이 얼마나 들든, 시간이 얼마나 들든 말이야.

지금 현 상황에서 그를 찾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

찾기만 한다면 한성 군이 이를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아.”

“알겠습니다.”

“후우. 피곤하군.”

얼굴을 쓸어 올린 강건이 커피를 원샷 하듯 들이켰다.

“아. 그리고 방금 전 아프리카에서

알파 길드장을 비롯한 길드장들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음? 아프리카에서? 무슨 연락? 구조 신호던가?”

강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럼?”

“현 시간부로 이한성 헌터께서

자신들에게 내주었던 숙제를 끝마쳤다고 전해왔습니다.”

“오. 그래? 드디어 아프리카의 공략이 끝났나.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뭐 아무렴 어때.

다친 이들은 없다던가? 하긴 쉴드장이 갔는데 별일 있으려고.”

후.

강건이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예. 다행히도 부상자는 없었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다행이군.

그나저나 왜 이렇게 공략이 늦었다고 하던가?”

“그게 게이트의 주인과 그 수하들이 수중에 포진해 있어,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답니다.”

“…흠.”

“그래서 무식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호수 곳곳을 부수고 터뜨려 물길을 만들고 물을 뺐답니다.

물이 하도 많다 보니 이를 빼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구요.”

“보나 마나 장성용 생각이겠지.”

단순무식이라는 단어가 그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성용을 떠올리며 강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게이트를 지키고 선 녀석들의 힘이

수하들조차 보통의 S급 게이트 우두머리와 같은 수준이라

이를 제압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고 시간이 걸렸다 했습니다.”

“…고생들 했겠군.”

“예.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압은 성공했나?”

“예.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합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언론에

아프리카의 탈환이 끝났다고 대대적으로 알리게.

안 그래도 삭막한데 고무적인 소식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게 아직 탈환이 끝난 게 아니랍니다.”

박 실장이 머뭇거렸다.

“무슨 말인가 그게?”

“아직 처리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처리하지 못한 것?”

강건의 눈이 날카로웠다.

“그게… 제우스 길드장의 말로는

강한 마기와 사기가 어린 물건이 호수 밑바닥에 있다고 합니다.”

“물건이라…? 그래서?”

“정체를 파악하려 해도 그것이 가진 힘 자체가

워낙 크고 강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합니다.”

이에 그를 감싼 방호 수 겹을 파괴했다고 합니다만….

여전히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파악에 어려움이 있답니다.”

“흠….”

“그래서 일단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낸 다음

파괴 혹은 정리 후에 그때 복귀하겠다 알려왔습니다.

또, 며칠 내로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흠. 일단 알겠네. 필요한 게 있거든 언제든 말하라 전해주게.”

“예.”

‘고위급 아이템이라도 되려나. 흠….’

길드장들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강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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