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 * *
한성은 다른 그림자의 힘은 쓰지 않고
포식과 소화, 천라지망의 힘만을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거냐며 욱할 법도 했지만,
한성의 말에 불만을 제기하거나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이미 그림자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맛봤고,
그조차도 한성이 많이 배려하고 봐준 것임을 알았기에.
만일 그림자의 힘에 한성의 공격까지 더해진다면,
정말로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으리라.
벨루몬들 전원이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한성이 가볍게(?) 노래하는 자를 시전했다.
벨루몬들은 한성의 공격을 생각보다 잘 막아냈다.
성장한 건 한성만이 아니었다는 말이 맞았던 셈.
단 4초 만에 한성에게 뒤를 잡혔던
예전의 무력한 그 모습들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한성은 역시나 가장 먼저 티에라와 타우한을 노렸다.
제거할 수만 있다면 원거리 딜러와 힐러를
먼저 제거하는 것이 전략전술의 가장 기본이니까.
거기다 둘의 방어력이 가장 낮기도 했고.
이에 한성은 천라지망을 사용해 그들의 뒤를 점한 뒤
빠르게 공격을 감행했으나, 칸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짐승의 감인지, 아니면 위험을 감지하는 전사의 본능이랄지.
그것도 아니라면 칸과 티에라를
한성이 최우선으로 공격할 것이라 예상이라도 한 건지.
레그나토르와 벨루몬조차 감지해내지 못한 천라지망의 힘을
칸은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차렸고, 이를 막아냈다.
게다가 단순히 막아내는 것을 넘어,
한성의 힘을 흡수한 뒤 빠르게 방출해 반격까지 하고는
방패를 날려 그 둘로부터 한성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그리곤 타우한과 티에라의 곁을 지키며
사수와 힐러, 버퍼로서의 직무를 온전히 다할 수 있게 했다.
칸에게 뒤를 맡길 수 있게 되자,
거리낄 것이 없어진 벨루몬과 레그나토르는
정말 한성을 죽일 기세로 살벌하게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스탯 자체가 한성보다 높았던 레그나토르는
자신이 가진 자체 버프에 타우한의 버프까지 더해지자,
노래하는 자의 상태가 된 한성에게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한성 또한 그를 쉽게 제압할 수 있다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는 한성의 생각보다도 그 능력치가 훨씬 고강해져 있었다.
한성의 공격을 맞받아치고 반격을 가하는 건 물론,
오히려 먼저 치고 들어와 한성의 목을 노리기까지 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한성이었다.
레그나토르의 힘은 녹스와 비교해도
조금도 떨어지거나 부족함이 없었을 정도였고,
그 빠르기 또한 한성과 비슷하거나 약간 낮은 수준이었기에.
벨루몬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성을 집요하게 괴롭혀 댔다.
권속들을 소환해 숫자의 우위를 점하고,
점진적인 압박과 스트레스를 줘 빈틈을 노릴 줄 알았건만
예상과 달리 그는 단 하나의 권속도 소환하지 않았다.
권속들이 레그나토르에 걸리적거릴 거라 생각한 모양인 듯했다.
벨루몬은 허를 찌르는 공격과 저주, 약화 등의 디버프로
한성을 약화시키고 레그나토르를 보조하는 걸 목표로 둔 듯했다.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나 왕의 위압 등의 업적과 스킬,
그리고 벨루몬 때문에(?) 생겨난 높은 마법 저항력 덕분에
디버프 대부분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벨루몬 또한 타우한의 버프를 받아,
전보다 강한 마법 관통력과 데미지를 얻게 되었으니까.
근력 약화나, 이동 속도 저하 등의 디버프 때문에
순간적으로 레그나토르의 일격에 당할 뻔하기도 했고,
그를 해주(解呪)하느라 꽤나 시간과 마력을 허비해야 했다.
거기다 중간중간 약간의 허점이라도 보일라치면,
한성으로서도 짜증 날 정도의 아픈(?) 마법들이 쏟아지니
벨루몬 쪽을 신경 써야 했고 이는 한성을 신경 쓰이게 했다.
포식을 둘러 틈틈이 그 힘을 흡수하긴 했지만,
제아무리 포식이라 해도 고통마저 씹어 삼킬 순 없었으니까.
게다가 빈틈을 노려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티에라의 탄환들 또한 한성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한서불침의 영향으로 최후의 보루가 가진 화염의 힘이
한성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데다,
그 힘 또한 포식의 먹이가 될 수 있음을 봤기 때문인지,
그녀는 쉽게 최후의 보루를 사용하지 않았다.
최후의 보루의 힘을 응축해 발사하는 것 대신,
버프로 강해진 그 힘을 이용해
자신의 탄환이 더 빠르고 더 강하게 발사될 수 있도록 했다.
내쏘아진 탄환이 가진 운동 에너지나, 터질 때의 폭발력은
한성으로서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은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천라지망으로 도망가거나 억지로 쳐내야만 했다.
게다가 티에라는 조금도 한성을 봐주지 않았다.
사냥이라도 하듯 쏘는 족족 미간이나 목, 심장 등
한 번이라도 맞았다간 위험할 법한 급소만을 노렸고,
한성이 레그나토르들에게 반격을 가하려 힘을 끌어 올리면
그때마다 최후의 보루와 수류탄을 사용해 거리를 벌려댔다.
타우한 또한 버프와 힐은 물론, 방호에까지 신경을 쓰며
혹시나 있을 한성의 기습에 철저히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한성이 레그나토르나 벨루몬에게
접근하려 하거나 멀어지려 할 때면 불같이 벼락을 내려
딜러로서의 역할 또한 톡톡히 해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벨루몬들을 바라보는 한성의 눈이 기뻐 보였다.
노래하는 자를 쓴 자신을 이겨내는 건 물론,
압박하며 오히려 밀어내기까지 하고 있으니 흡족했으리라.
거기다 녹스의 힘을 이어받고 레벨 역시 오른 덕분인지,
10분이 지나도 전과 같은 시스템의 경고가 떠오르지 않았다.
소화가 요구하는 역량에 충족하게 된 모양.
한성은 이로써 기뻐하는 자에 이어,
노래하는 자의 페널티로부터도 자유로워진 듯했다.
“후욱… 후욱… 후욱… 후우. 잠깐 휴식.”
지상에 발을 내디딘 한성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굵은 땀방울과
슈트 아래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그의 근육들이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전투에 임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노래하는 자의 상태를 해제했는지
피처럼 붉던 그의 눈가도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한성에 비해 벨루몬들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본래라면 하나가 부담했어야 할 것을 다섯이 나눴고,
힐러의 지속적인 회복과 버프가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후우… 이제 쉽게는 못 이기겠네. 대단해. 정말.”
한성이 땀을 닦아내며 흐뭇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그랬지 않나. 우리 모두와 싸우는 건 힘들 거라고.”
칸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가슴을 치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쯧쯧쯧. 멍청한 녀석 같으니.
우리 다섯이 전력으로 덤볐음에도 비등한 수준이었다.
그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운 일이더냐? 기쁘다 웃을 만큼?
이는 기뻐해야 할 게 아니라 창피해하고 슬퍼해야 할 일이다!”
“아니. 뭐… 워낙에 주군이 강하니까….
그리고 예전에 비해 우리가 강해진 건 사실이기도 하고….”
벨루몬의 핀잔에 칸이 머쓱한 얼굴로 얼버무렸다.
[군사의 말이 맞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우리는 약간의 우위만 점했을 뿐 주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이것을 가지고 이겼다고 말하기에는 낯부끄러운 일이지.]
레그나토르가 벨루몬의 말을 거들었다.
“후. 아직 이겼다는 말을 입에 올리기엔 이르지.”
숨을 돌린 한성이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뭐요?”
타우한이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그 말씀은…?”
“지금부터는 힘 조절이 안 될 거다.
정확히는 아직 제대로 힘을 못 다룬다고 봐야겠지.
그도 그럴 게 이번이 겨우 두 번째 사용하는 거거든.”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고…?’
‘이제껏 힘 조절을 했다고? 우리 다섯을 상대로?’
모두 같은 생각이었는지 벨루몬들의 안광이 심하게 흔들렸다.
“…녹스를 참했던 때의 힘을 쓸 생각이십니까?”
짧은 침묵 끝에 벨루몬이 입을 열었다.
“맞아. 다만 그때와는 조금 다를 거야.
너희들 생각보다도 내가 조금 많이 쓸 만해졌거든.”
한성의 뜻 모를 미소에 소름이 돋는 벨루몬이었다.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는 힘들 거야.
날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덤벼. 살고 싶다면.”
흠칫.
알 수 없는 한기에 벨루몬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소화.”
[열광하는 자의 상태가 활성화됩니다.]
[대상 ‘이한성’의 공격력과 공격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한성의 눈이 다시 한번 붉게 물들었다.
한성에게서 피어오른 폭발적인 힘에
벨루몬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압도적인 힘, 압도적인 공포.
흉폭, 포악, 야성, 짐승, 괴물 등의 단어들을
총칭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이한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성에게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난폭한 힘들이 솟구쳤다.
“타… 타우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강화를 시전해라! 어서!!!”
벨루몬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아… 알겠소!!”
벨루몬의 고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타우한이
재빨리 품 안의 토템들을 꺼내 버프를 걸기 시작했다.
벨루몬은 혹시나 있을 한성의 공격에 대비해
타우한과 티에라를 향해 절대 방어를 겹겹이 시전했다.
‘제기랄… 차라리 마물 놈들 수천과 싸우는 게 낫겠군.’
벨루몬이 이제껏 꺼내 들지 않았던 제 스태프를 꺼내 들고는
한성에게 언제든지 고위급 마법을 쏘아낼 수 있도록 준비했다.
모두가 눈앞의 한성을 경계하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을 때,
때마침, 타우한의 주위에 떠올라 있던 수십의 토템들이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벨루몬들에게로 스며들어 갔다.
“칸! 철의 벽을 세워라. 주군께서 작정하신 모양이니까.”
“…알겠다.”
“티에라! 레그나토르! 너흰….”
쾅!!!!!!!!!
“칸!!!!!!!!!”
벨루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인 바람과 함께 칸이 사라졌다.
이윽고 들린 굉음에 고개를 돌리자 결계의 끄트머리쯤에
처박힌 채로 널브러져 신음하고 있는 칸의 모습이 보였다.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레그나토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칸이 자랑하던 철의 벽은 산산조각 나 흩어지고 있었고,
칠흑의 방패는 흡수할 수 있는 충격의 정도를 넘어선 듯 보였다.
방패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칸의 강한 집념 때문인지,
두 방패는 간신히 그의 팔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내상을 입은 건지, 아니면 충격을 받아내지 못한 건지,
칸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기침과 함께 피를 뱉어내고 있었다.
한성이 강해짐에 따라 벨루몬들 또한 함께 강해졌고,
수많은 전투와 한성과의 훈련 덕에 경험이 쌓였다고는 하나
신격을 가진 녹스조차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한성의 힘을
벨루몬들이 쉽게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칸!!”
“제길…!”
티에라와 벨루몬의 고함 소리가 이어지고
벨루몬이 칸의 곁으로 몸을 옮기려던 그때.
벨루몬의 귓가에 사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가 너무 길어.”
깡!! 카가각!!
레그나토르가 섬전과 같은 속도로
벨루몬과 한성의 사이에 끼어들며 검을 휘둘렀다.
“…제법이군.”
[….]
여유로운 한성과 달리 레그나토르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고작 제 검의 반도 되지 않을 크기의 단검을 밀어내는 데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
그그그.
그의 갑옷이 맞물리며 비명 소리를 질러댔다.
[가라. 군사. 칸을 부탁하지.]
“금방 다녀오겠다.”
워프로 벨루몬이 몸을 숨기자 곧이어 총성이 들려왔다.
탕!
“이런.”
쾅!!!
[…큭.]
칠흑의 저격수가 불을 뿜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한성은 레그나토르의 가슴을 걷어차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반발력에 레그나토르는 볼품없이 나뒹굴었고,
그녀의 탄환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한성을 빗겨나갔다.
탕!
탕!
탕!
티에라가 계속 탄환을 쏘아냈지만,
한성은 이를 겨우 피하거나 억지로 쳐내던 전과 달리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지는 탄환들을 피해냈다.
마치 탄환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쾅!!!!!
레그나토르가 다시 달려들어 한성을 압박했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쳤음에도
들려오는 것은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고,
맞부딪칠 때마다 레그나토르의 몸은 삐걱거렸다.
한성의 무지막지한 힘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리라.
[…제길….]
“피해요! 레그나토르!!!”
쾅!!!!!!!!!!
티에라로부터 발사된 눈부시게 시린 화염이
한성과 레그나토르의 사이로 파고들었고 터져 올랐다.
이와 동시에 레그나토르의 전면에는
절대 방어가 빠르게 덧씌워져 그를 보호했고,
한성은 자신을 향하는 화염에 포식을 소환해 그 힘을 먹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후의 보루를 모두 집어삼킨 포식이
한성의 그림자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고맙군.]
어느새 곁에 나타난 벨루몬을 보며 레그나토르가 중얼거렸다.
“지금부터는 내가 나서도록 하지.”
[방해나 하지 마라.]
한성을 바라보는 레그나토르와 벨루몬의 안광이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