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 * *
한성과 벨루몬들 덕분에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게
악의 대지와 수호 마물들, 고위 마물들이 제거되어 갔다.
또 강건 측으로부터 지원들도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의료, 건축, 식량, 자원, 병력 등
지원의 종류와 폭은 다양했고 규모 또한 꽤나 상당했다.
웬만한 도시 하나 정도는
수일 내로 복구 가능한 수준의 규모였으니까.
덕분에 군, 항만, 발전소 등의 국가 주요 기반 시설 및,
도로 등의 제반 시설들 또한 하나둘 빠르게 복구되었다.
이에 마비되었던 국가 존속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일 정부는 그제야 숨을 돌리며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갔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 보였다.
하지만 부러지고 찢어진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고 쉽게 녹을 생각을 하지 않아 보였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있었고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진한 그리움과 슬픔,
남겨진 이들의 고통과 아픔, 마물에 대한 분노,
최강이라 생각했던 자국 헌터들의 무력함에 대한 실망,
무능한 정부 기관에 대한 원망 등으로 온통 어두웠다.
이러한 어둡고 깊은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싹을 틔워낸 것은 한성이었다.
그는 그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언제든 손을 내미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전선의 최전방에 먼저 나아가 마물들을 베어냈으며,
죽은 이들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하고 슬퍼했다.
심지어는 벨루몬에게 부탁해 혼을 달래고 위로해주었고,
인사를 나누지 못한 이들에게 잠깐의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또 끈질기게 자신을 취재하려는 취재진들에
한성은 이럴 시간 있으면 제 나라, 제 가족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헌터들과 군인, 의료진들을 취재해
그들의 희생과 노고에 감사하는 기사나 쓰라며 화를 냈다.
제 나라, 제 고향도 아닌 곳.
오랜 옛날부터 정치적,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반목하고 갈등해왔던 곳.
자신에게 뭐 하나 준 것 없이 비웃고 조롱하기까지 했던 곳.
그런 곳에 와 자신의 부귀와 영리를 택하기보단
목숨을 걸고 자신과 관련 없는 타인을 위해 싸웠고
진심을 다해 그들이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이제 겨우 소년티를 벗은 타국의 청년 하나가,
살라고, 힘내라고, 버티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를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보고만 있을까.
더군다나 언론에 의해 한성 역시 어린 나이에
마물들에게 부모 모두를 잃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같은 아픔을 가진 청년의 그 행동들이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이 때문일까.
절망과 슬픔만이 가득 차 있던 일본 내부에 변화가 생겼다.
작고 약하지만 선명한 나비의 날갯짓은
이내 태풍이 되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절망과 아픔이 가득했던 만큼 희망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후….”
길드로 돌아온 한성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환송식 한번 요란하군. 피곤할 정도야.”
중얼거린 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의 말대로 요란한 환송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한성이 돌아가겠다고 하자,
정부 고위층과 요코하마를 비롯한 고위 헌터들 모두가
하나같이 은인을 이렇게 보낼 순 없다며 정색을 했었다.
보상도 받지 않겠다고 하고,
술자리나 식사 자리조차도 거절하는 한성이 서운했던 모양.
한성은 괜찮다며 한사코 이를 거절했고,
그가 관저에서 나왔을 땐 어떻게 알고 온 건지
거리에는 온통 일본 국민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정부 관료가 TV와 라디오로 긴급 방송을 내보낸 것이었다.
그들은 ‘고마워요.’ ‘사랑해요.’ ‘당신은 우리의 영웅.’ 등의
그려져 있다시피 한 한글이 쓰여 있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고
북을 치며 정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한성의 이름을 연호해댔다.
이 모든 게 귀찮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던 한성이
천라지망으로 모습을 감추려 하자 마사키가 웃으며 다가와
모두 당신을 보러 온 거라며 손 한번 흔들어 주라고 말했고
한성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다.
“후… 그나저나 골치 아프군….”
많은 것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모든 골렘들을 동원했음에도,
여전히 찾지 못한 나머지 다섯의 디멘션 게이트.
본신이 아닌 화신의 몸으로 나타났음에도 강했던 투르바의 힘.
이 모든 일이 생겨나게 된 원인.
신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그녀의 탐욕.
날로 많아져 가는 게이트들과 강해지는 마물 등.
한성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너무 안일했나.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한성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벨루몬.”
“예. 주군. 하명하소서.”
“나머지 디멘션 게이트들의 행방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나이다.”
“왜지?”
“디멘션 게이트의 마력 파장 자체가
일반 게이트나 강한 마물이 가진 마력 파장과
그리 큰 차이가 날 만큼 특별하거나 독특하지가 않나이다.”
“…음.”
한성과 벨루몬들이 막아내고 있다고는 하나,
지금 이 순간에도 게이트와 마물들은 계속 발생하고 있으니
그 틈바구니에서 디멘션 게이트의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려우리라.
“게다가 주군께서 디멘션 게이트를 파괴하신 이후로,
대규모의 거짓 마력 파장이 무작위로 생겼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게이트 위치의 발각을 막기 위해 수를 쓴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그래. 그렇겠지.”
한성도 예상했던 모양인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디멘션 게이트가 가동되어
마력 파장이 눈에 띌 정도로 드러나지 않는 한,
저로서도, 골렘들로서도 발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부디 무능력한 신(臣)을 용서치 마시옵소서. 왕이시여.”
한성의 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뼈밖에 남지 않은 그의 손이 굳게 쥐어졌고 떨렸다.
“아니다. 디멘션 게이트가 더 있다는 소릴 들었을 때,
나머지 게이트의 위치도 찾아 한 번에 제거했어야 했다.
이건 내 생각이 짧았던 탓이지. 네 탓이 아니다. 벨루몬.”
한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자신의 실책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
“…송구합니다.”
‘…어찌 이리 자애로우시단 말인가.’
한성의 말에 벨루몬이 힘없이 답했다.
“병력 쪽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
“모든 것이 주군께서 뜻하신 대로 흘러가고 있나이다.”
“그래?”
“우선, 공방장과 타우렌들이 꽤나 심혈을 기울여
각 종족의 대장장이들을 가르쳐 그 숙련도를 높였고,
이에 전체 병력의 8할 이상이 완벽히 무장을 끝냈습니다.
나머지 병력의 무장 또한 빠른 시일 내로 끝낼 것입니다.”
“좋아.”
한성이 흡족하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저번에도 말씀드렸듯 전쟁이 장기화할 것을 대비,
식량 및 식수의 보존 또한 종족별로 철저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버틸 수 있어?”
“하루 세끼 기준 반년은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끼만 먹는다고 하면 9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이고
한 끼만 먹는다고 한다면 최소 1년을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상당한 양인데?”
“혹시나 저마저도 부족할 것을 대비해
정벌로 얻은 마물들의 사체를 아공간 안에 보관 중이오니
그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하옵니다. 왕이시여.”
“음… 알았어. 수고했어.”
“거기다 종족별로 지도자를 보내
기본적인 단련과 모의 전투 훈련을 실행하고 있고 이로써
그들의 정신력과 전투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종족별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는 전투법과 전략전술을
가르쳐 실제 전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지도자라면…?”
“저를 비롯한 칸, 티에라, 레그나토르, 타우한입니다.”
“내가 부탁한 일들만으로도 피곤할 텐데… 괜찮겠어?”
한성이 약간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혹여나 투르바, 그녀가 신이 된다면
피곤이라는 두 글자가 죽음이라는 두 글자로 바뀔 겁니다.
죽음을 잊고 살아온 저라고는 하나 죽음보단 피곤이 낫습니다.”
피곤해 보이는 제 주군을 위한 나름의 유머인 것이리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벨루몬.”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리고 넌 농담은 하지 마라.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예.”
어쩐지 그의 얼굴이 시무룩해 보였다.
* * *
“후욱… 후욱… 후욱….”
연무장의 한 편. 한성이 널브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몸을 풀기로 한 것이었다.
주변에는 톤 단위의 쇳덩어리들이 가득이었고,
꽤나 격렬히 운동을 한 건지 주변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투르바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강해진 지금의 힘으로도 본신을 상대하는 건 어렵겠지.’
비록 파편의 힘이라 할지라도
그때 느꼈던 그 아찔한 느낌은 잊기 힘들 정도였다.
‘만일 아네스의 몸까지 찾게 된다면 더욱 상대하기 어렵겠지.
벨루몬들 모두가 덤벼도 승리를 쉽게 장담하진 못할 거고.’
살아생전 투신이라 불린 아네스였다.
늙고 노쇠한 채로 죽었다고는 하나,
투르바가 가진 힘은 그의 육체를 다시 젊고 강하게 할 것이고
이는 전성기 때의 아네스가 보여준 무력을 뛰어넘을 게 분명했다.
‘모든 건 준비 되었어. 나만 준비되면 될 일이야.’
“후우….”
[분배되지 않은 스탯 포인트가 있습니다.]
‘아. 그렇지.’
한성이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일본에서의 일 덕분에 3레벨이 올랐던 게 떠올랐다.
한성은 상태창을 열어 힘에 스탯을 분배했고,
전과는 달라진 업적들과 스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많은 일이 있었다 싶었으리라.
그러다 문득 그림자 지배와 영원의 그림자의 설명에 가닿았다.
여유가 생겼으니 제대로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슥.
‘우선, 그림자 지배부터.’
한성의 손짓에 따라 자연스레 그림자들이 피어올랐다.
그림자를 지배하고 제어한다는 그 설명처럼
그림자들은 한성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꿨다.
누가 봐도 액티브 스킬에 가까운 그림자 지배는
스킬 사용 시에 MP를 조금도 소모하지 않았다.
그림자를 부리는 데 사용되는 건 MP가 아닌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왕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뿐.
또, 순리를 거스른다는 ‘영원의 그림자’의 설명처럼
한성의 명이 있지 않는 한 그림자들은 빛이 비춘다 할지라도
그 모습이나 형태가 조금도 변치 않았고 스러지지도 않았다.
특이점이 있다면 그림자들이 한성에게로 오고 난 뒤부터
더 이상 빛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과
신성의 힘에도 녹아내리거나, 타격을 입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벨루몬은 이를 주인인 한성의 힘 때문이라 말했다.
그림자는 부림을 당하는 존재일 뿐 마물이 아니며,
속성이라 할 만한 것이 애초부터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마물인 녹스를 따르는 동안에는
그의 마기와 사기에 동화되어 언데드화된 것이었고,
이제는 모시는 자가 한성이 되었으니 이를 따르는 그림자들 또한
주인인 한성의 힘에 동화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즉 지금의 그림자들에게는 더 이상 속성이랄 것이 없는 상황.
뭐, 결과적으로는 한성에게는 득이 된 셈이었다.
또 하나 특이한 건 포식과 그림자의 관계였다.
포식은 이제 그림자들과 한 몸이 된 듯
한성이 따로 소환하지 않아도 함께 섞여 녹아 있었다.
애초에 힘의 근원이 같아서인지
둘은 아무런 부딪침이 없었고 서로 잘 섞였다.
자체적으로 이동할 능력이 없는 포식이었기에
어디든 이동이 가능한 그림자와 함께 있는 게 낫다 싶었으리라.
그림자들 또한 포식과 함께함으로써
더욱 강한 무력을 가질 수 있게 되니 좋은 듯했다.
한성도 이를 굳이 따로 떼어놓지는 않았다.
운용 면에서도, 활용 면에서도 이쪽이 더 편했으니까.
‘그림자를 좀 더 잘 활용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스킬을 연구했던 게이머로서의 본능이 되살아났는지,
그림자를 이용한 여러 다양한 전략들을 떠올린 한성이었다.
생각을 마친 한성의 눈이 포식과 소화에게로 향했다.
“시전자의 역량에 따라 스킬 지속 시간과
스킬 사용 후에 생길 페널티의 정도가 다르다….”
한성이 홀린 듯 소화의 내용을 중얼거렸다.
녹스와의 전투 때 처음으로 들었던
역량이 부족하다는 시스템의 알림이 떠올랐다.
분명 기뻐하는 자의 사용 때는,
단 한 번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알림이었다.
‘역량이라는 게 뭘 뜻하는 거지?
폭발하는 힘을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신체 능력을 말하는 건가?’
열광하는 자를 사용 했을 때 느꼈던 충만감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기분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열광하는 자의 힘이 그 정도라면….
분노하는 자와 미쳐버린 자의 힘은 얼마라는 거지…?’
강한 힘이 주어지는 만큼 페널티도 강할 터.
순간 힘에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하라던
세계수의 말이 떠올라 소름이 돋은 한성이었다.
노래하는 자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기에
열광하는 자나, 분노하는 자, 미쳐버린 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조차 안 했던 자신의 안일함을 후회했다.
“지금이라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어.”
한성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