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 * *
쾅!!!!!!!!!
‘…?’
아주 잠깐의 찰나라 할지라도
마땅히 느껴졌어야 할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대신한 건 폭탄이라도 터지는 듯한 큰 소리였다.
희미해져 가던 굽타의 의식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굽타의 귀에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한 감각이군. 분명 때린 감촉은 있었는데….”
‘…뭐지?’
분명 타국의 언어였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그 뜻이 정확히 전달되었다.
굽타가 눈을 떠 앞을 바라보자, 묘한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말끔한 수트를 입은 한성이 바로 그것.
“정신이 드십니까? 굽타 헌터?
극락 가시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만.”
정신을 차린 굽타를 바라보며 한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한성 헌터?”
“절 아십니까?”
한성이 의외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여기는 어떻게?”
“놈을 제거하러 왔습니다.”
“쿨럭….”
몸을 일으키려던 굽타가 기침과 함께 피를 뱉어내자,
한성이 급히 그를 말리며 편하게 누이며 말했다.
“중상이십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놈은 괴물입니다.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아요.
단순히 젊은 치기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왔지요.
전 단순히 치기만 가지고 덤비지는 않거든요.”
한성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벨루몬.”
“하명하소서.”
공간이 일그러지며 벨루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저자가… 리치 킹….’
벨루몬에게서 느껴지는 사기에 굽타의 눈이 흔들렸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기와 사기의 것들은
녹스에게서 느껴지는 것보다도 더 진하고 깊었다.
“이분을 안전지대로 모셔라.
타우한에게 치료를 부탁한다고도 전해주고.”
“예.”
“그것이 끝나면 내가 저놈을 상대하는 동안
저 아래에 있는 게 뭔지, 뭘 꾸미고 있는지도 알아봐 줘.”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대답과 함께 벨루몬이 그에게로 다가가자,
굽타는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줬던 한성이라면
어쩌면 저 괴물을 막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잠깐! 무… 문의 가동을 막아야 합니다!”
“…문이라 하셨습니까?”
한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예. 저 아래 있는 건 문입니다.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을 연결하는 문이요.”
“게이트를 말하는 겁니까?”
한성의 눈매가 날카로이 변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놈은 그것을 문이라 말했고,
자기 스스로를 문의 수호자라 칭했습니다.”
“…흠.”
“놈은 문을 가동하기 위해 많은 생을 제물로 삼았고,
그들의 피를 동력원 삼아 문의 가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의 저편에는 마신과 그의 군대들이….”
굽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림자로 일렁이는 검은 창 하나가
정확하게 굽타의 미간을 노리고 쏘아져 들어왔으니까.
카강!!!!!
팍.
‘…빠르다. 그리고 강해.’
언제 꺼내 들었는지 한성의 손에는 칠흑의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단검에 의해 튕겨져 나간 창은 바닥에 박혔고,
이내 푸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한성이 뻐근해진 손목을 가벼이 돌렸다.
[입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늙은이.]
[얼마 남지 않은 그 목숨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다면.]
검은 그림자 하나가 형체를 갖추며
천천히 한성과 굽타의 곁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를 부탁한다. 벨루몬.”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조심하십시오.”
굽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이따 다시 뵙겠습니다. 굽타 헌터.”
한성의 말이 끝나자, 벨루몬과 굽타는
애초에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녹스는 그런 그들을 막아설 생각이 없었던 듯
그들을 가만히 지켜볼 뿐 별다른 방해나 공격은 하지 않았다.
다만, 한성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가 조금 묘했다.
적대적이지도 그렇다고 호의적이지도 않은
그의 태도는 어딘가 애매한 그 무엇이었으니까.
[강하군. 네놈.]
“칭찬 고맙게 듣지.”
[…마물의 언어를 할 수 있었나?]
그가 약간은 놀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의지만을 전달하던 굽타와는 달리,
한성의 말은 분명 마물의 언어 그 자체였다.
놀랄 수밖에.
“엄연히 말하자면 마물의 언어를 하는 건 아니다만….
같은 말을 반복하려니 귀찮군. 그냥 동료 덕이라 해두지.”
[방금 전의 리치 킹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한참이나 침묵한 채 한성을 바라보던 녹스가 입을 열었다.
[네놈은 뭐지?]
“널 제거하러 온 자.”
[그런 뻔한 답을 원한 것이 아니다.]
[난 지금 네놈에게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묻고 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모르겠군. 난 나다.”
선문답 같은 그의 말에 한성이 짜증 내듯 대답했다.
[인간 같지도 않은 힘을 가진 것으로도 모자라,]
[리치 킹을 수하로 삼고 그를 수족처럼 부린다…?]
[애초에 인간이 맞기는 한가? 그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군.]
“뭐라 말을 하든 난 나다.”
[게다가 난 네놈에게서 ‘우리’를 느꼈다.]
[너라면 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테지.]
[다시 한번 묻겠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그림자 관련 스킬에서 비롯된
헤파이스토스의 그림자와 포식, 그림자 이동을 알아본 것이리라.
“글쎄.”
한성이 짧게 답했다.
‘우리라….’
[네놈이 쥐고 있는 그것 또한 그림자로 빚은 것일 테지.]
녹스의 오른손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하나가
점차 단검의 형태로 그 모습이 변형되어 갔다.
[이것처럼.]
이윽고 완연한 모습으로 손에 쥐어진 단검은
한성의 칠흑의 단검과도 그 모양과 모습이 비슷해 보였다.
“…힘의 유래에 대해선 모르겠으나,
이것은 분명 내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역시 그랬나. 그래. 그래야 말이 되겠지.]
[일반적인 금속 조각 따위로 내 힘을 쳐낼 수 있을 리 없으니.]
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신기하군.]
[네놈에게서 느껴지는 건 분명 ‘우리’의 힘이다.]
[그 누구에게도 그 힘을 허락한 적이 없거늘. 어찌 네놈이….]
“….”
[어쩌면 네놈에게 닿은 게 더 다행일지도 모르겠군.]
“…뭐?”
다시 한번 이어진 뜻 모를 그의 말에 한성이 되물었다.
제대로 모습을 갖추지 않았기에
놈의 얼굴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음에도,
왜인지 한성은 그에게서 씁쓸함과 슬픔을 느꼈다.
[날 막기 위해 왔겠지. 네놈은.]
“그렇다.”
[허나 늦었다. 애송이.]
[문은 가동되었고, 멈추지 않을 거다.]
[또한 날 막고 문을 멈춘다 해도, 그녀를 이길 순 없다.]
“투르바를 말하는 거냐?”
[…그래.]
‘…뭐지? 그녀?’
투르바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품을 물며 길길이 날뛰던 다른 마물들과는 달리
그는 투르바를 그녀라 칭하며 쉽게 이름을 불렀다.
일반적인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일.
게다가 한성은 그의 대답에서 알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뭘까.
‘…찝찝하군.’
[난 그녀의 의지를 이 땅 위에 세워야 하고,]
[네놈은 이런 나와 그녀의 의지에 반하려 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겠지.]
“….”
[와라. 애송이.]
[태초의 그림자로서, 모든 그림자들의 왕으로서]
[네놈에게 진정한 그림자의 힘이 무엇인지 알려주마.]
“할 수 있다면.”
한성이 씩 웃으며 답했다.
* * *
“뭔가 옵니다!!”
“전원 전투 준비!!!”
수도원이 한바탕 시끄러웠다.
갑작스레 포착된 고위급 마물의 사기와 마기 때문이었다.
이에 헌터들은 활과 창, 칼과 같은 무기로,
군인들과 요원들은 대마물용 화기들로 무장했다.
수도원의 한쪽에 위치한 레이더망과
여러 전자 장치들이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고,
전쟁이라도 난 것마냥 붉은 빛을 번쩍여대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위치는?!”
“수도원 상공 정방향입니다!”
“예상 도착 시간은!”
“5초 이내입니다!!”
급박한 상황 속 헌터와 요원 및 군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든 채, 긴장된 얼굴로 상공을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샤오란과 링 링도 있었다.
“게이트 생성됩니다!!”
병사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공에는 진한 녹색의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흠칫.
게이트를 유심히 살피던 링 링이 급히 소리쳤다.
“잠깐! 멈춰요!!!”
링 링의 앙칼진 고함이 수도원에 울려 퍼졌지만,
공격을 가하던 도중에 멈춘 건 샤오란 단 하나뿐이었다.
그 외 나머지 헌터들과 요원, 군인들의 공격은
이미 그들의 손을 떠난 뒤였고 게이트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쾅!!!!!!!!!!
가장 먼저 헌터들이 쏘아낸 화살과 검기가
게이트를 향해 날아들었고 강한 폭발을 일으키며 터져나갔다.
곧이어 유탄 발사기에서 발사된 유탄과
화기에서 발사된 마력 탄환들이 화려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가가가강!!
충격으로 대기가 떨렸고, 수도원 또한 크게 흔들려댔다.
그 때문인지 수도원의 벽면 한쪽은
이를 견뎌내지 못했고 결국 무너져 내렸다.
“….”
폭격에 가까운 공격 때문인지,
화약의 연기와 흙먼지가 수도원 상공을 가득 채웠다.
“공격하지 마세요!! 이한성 헌터의 동료분이에요!!”
맑고 또랑또랑한 링 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공격이 멎고, 요란하던 소리와 폭발이 사라졌다.
5초쯤 지났을까.
“다 했나?”
“…?!”
후웅.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연기와 매연이 걷혀갔다.
걷힌 연기와 매연 사이로
타는 듯한 붉은 안광의 해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헉…!”
“리치 킹!!”
맑은 링 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수든 고의든 만약 이 공격이 주군께 향했더라면,
네놈들은 뼈와 살이 분리된 채 죽지도 살지도 못했으리라.”
살이 찢어질 것만 같은 살기와 마기에
몇몇 일반 병사들은 총을 놓치거나 혼절해 버렸고,
요원들은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감추느라 애를 써야 했다.
이는 헌터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들에게로 쏟아지는 짙은 사기와 마기가
더는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인지 기운을 끌어 올려 막았고,
타는 듯한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고개를 돌려야 했으니까.
‘힘의 일부이긴 하지만, 분명 난 정타를 날렸다.
놈은 분명 마법 계열일 터. 어떻게 내 공격을 막아낸 거지…?
굽타나 저 그림자 녀석처럼 공격 무효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폭격 수준의 대단위 공격이 가해졌음에도,
그의 몸에는 상처는커녕 생채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놀랄 수밖에.
‘게다가 들리는 건 분명 마물의 언어이거늘,
머릿속에 입력되는 건 우리말이라니… 도대체가….’
벨루몬을 바라보는 샤오란의 눈이 날카로웠다.
“융숭한 대접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다짜고짜 공격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군.
네놈들은 도움을 주러 온 자에 대한 대접을 이딴 식으로 하나?
분명 네놈들의 지휘관이 우리가 여기 올 것이라 연락했을 텐데.”
“미안하오. 리치 킹. 그대의 말대로 연락은 받았소.
허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싸늘한 벨루몬의 말에 뒤에 있던 한 사내가 나섰다.
상무위원이었다.
“음?”
벨루몬의 시선이 병력의 뒤를 향했다.
“뭘 이해하라는 거지?”
“그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오니 겁을 먹어 그렇소.
당신을 그림자 놈의 수하나 동료라 생각해 일어난 실수요.”
“…그럼 지금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건가? 인간?”
서릿발같이 차가운 벨루몬의 말에
일순간 수도원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런.’
혹시나 벌어질 사태를 대비한 것인지
샤오란은 긴장된 얼굴로 근육을 팽팽하게 당겼다.
벨루몬의 공격에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일촉즉발의 상황, 긴장을 먼저 깬 것은 상무위원 쪽이었다.
“…그저 서로 주의가 필요하다는 뜻일 뿐이오.
부디 오해 없으셨으면 좋겠소. 이에 대해선 내가 사과하겠소.”
“쯧… 멍청한 녀석. 진즉에 그럴 것이지.”
벨루몬의 말에 팽팽하던 긴장감이 해소되었다.
“…말이 과하….”
“그만.”
샤오란이 벨루몬에게 대들 듯 입을 열었지만,
상무위원은 그런 샤오란에게 손을 들어 입을 닫게 했다.
“한 번은 용서해주겠다. 허나 두 번은 없으니 명심하도록.”
“…명심하겠소.”
벨루몬의 말에 상무위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꼬마.”
벨루몬이 링 링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많은 인간들 중에 이 몸을 알아본 건 너 하나였다.
그 안목만은 칭찬할 만하더군. 꽤나 똘똘한 녀석이야. 후후.”
“…고… 고맙습니다!!”
링 링이 그의 말에 기쁘다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해야겠군.”
딱.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기자,
후방에 있던 야전 막사와 침대가 날아왔고
그 위로 어느새 나타난 굽타가 조심스레 놓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