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241화 (241/336)

241화

* * *

“말씀들 나누시지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거기에는 네 명의 인물이 있었다.

대통령 박한진과 강건,

한성과 본 적 없는 낯선 얼굴 하나가 그것.

낯선 얼굴의 정체는 ‘중국의 2인자’라는 별명을 가진

중국 국무원의 총리이자, 주석의 오른팔인 원 허였다.

그는 일국의 대통령을 앞에 두고도

딱히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외교적 결례가 되지 않을 만큼의

기계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예의만 차렸지,

진심으로 박한진을 존중한다거나 위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제집 안방인 양 소파에 편하게 앉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었고,

꽤나 오만하고 거만한 얼굴을 한 채 대화를 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일까?

원 허는 애초에 이렇게 일을 키울 생각이 없었다.

원래의 계획대로였다면 모든 것은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됐어야 했고, 이미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하고자 했던 일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라는 건

중국 정부의 무능을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으면서도

우한 사태를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정부 몰래 은밀히 한성을 만나는 것이 바로 그것.

대내외적으로 헌터 강국이라 불리는 중국이었다.

또한 다가올 투르바와의 전쟁에서 타국의 원조 없이

자주적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던 중국이었다.

그런 중국이 이제 와서 실질적 전쟁도 아니고,

던전 브레이크 하나조차 해결하지 못해 타 국과 동맹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

자존심 강한 그들이 결코 허락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한성 개인에게 도움을 청해 자존심을 지킬 계획이었다.

물론 일을 수습한 후에는 돈으로 매수하거나 죽여서

그의 흔적을 지우고 중국 스스로 일을 해결한 것처럼

꾸밀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한국에 입국한 원 허는

한성과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했다.

애초에 연락이 닿지도 않았으니까.

입국 전부터 한성의 길드 대표 메일에

수백 건의 메일을 발송했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고

대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전화를 받은 여인은 원 허가 누구인지 듣고서도

정부나 동맹과 이야기되지 않은 의뢰는 받을 수 없다며

원 허의 접선 요청을 거절했다.

접근을 예상한 한성이 미리 교육한 것이리라.

이에 격분한 원 허는 첩보를 통해

한성의 길드가 남산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 남산을 찾았으나, 길드는커녕 한성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한성의 길드 산하에 있는 그의 헌터 마켓,

The Emperor를 찾아 점주에게 자신의 신분을 말하고

한성과의 만남을 원한다는 말을 했지만 딱히 소용없었다.

점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를 거절했으니까.

이에 격분한 원 허가 난동을 부리려 하자,

가게와 점주를 보호하는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거기 있던 헌터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 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헌터들에게 The Emperor는 이제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헌터 마켓이 아니었다.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무구를 살 수 있고,

헌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세상의 시선이야 어찌 됐든 편히 쉴 수 있는 아지트가 됐으니까.

원 허가 제아무리 중국의 2인자라 할지라도,

이곳은 그의 힘이 닿는 중국이 아닌 엄연한 타국.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고,

분한 마음을 안은 채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게다가 봉황이 통하지 않았다는 소식에

마음이 조급해진 그는 어쩔 수 없이 정부를 찾았다.

이에 놀란 정부 측과 강건은

급히 우한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알아냈고,

한성에게 이것을 알려주며 이를 거절하라 종용했다.

그러나 한성은 무슨 생각인지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며 자리를 마련해 달라 했다.

“…그래서 총리께서는 동맹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는 겁니까?”

“…흠흠…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이건 거래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재화를 제공하고 당신의 힘을 빌리는.

엄연히 도움을 요청하고 받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죠.”

원 허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한성의 말을 받았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제게 필요한 재화가 무엇입니까?

만약 그 재화가 돈이라고 한다면 그 값이 꽤나 비쌀 겁니다.”

‘이 애송이 놈이….’

제 나이의 반도 안 될 어린 녀석이

다리를 꼰 채,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걸 보고

원 허는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꾹 눌렀다.

어찌 됐건, 지금 도움이 필요한 건 자신이니까.

“여기 계약서입니다.”

팔락.

그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한성에게 내밀었다.

“보상금은 기본으로 드릴 것이고,

토벌과 관련해 발생한 모든 부산물들에 대한 권리 또한

이한성 헌터님께 한 치 어긋남 없이 모두 양도될 것입니다.”

“…흠.”

“S 최상급에 달하는 게이트입니다.

그로 인한 부산물들의 가치는 상당하겠지요.

이에 대해 저희는 조금도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원 허의 말에 별 관심 없어 하던 한성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예?”

아직 마물의 특성에 대해 말해주지도 않았고

이를 해결할 경우에 주어질 혜택을 이야기하기도 전이었다.

게다가 한성은 제대로 계약서를 읽지조차 않았다.

물론, 계약서에 조금의 장난질도 치지 않았지만

아무 스스럼없이 수락한 것이 그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듯했다.

“하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하심은?”

“공략은 오롯이 저 혼자 할 것입니다.

이러한 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해주십시오.

또한 이러한 내용을 여기 계신 두 분께서 공증해 주십시오.”

“알았네.”

“알겠습니다.”

강건과 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하… 하지만….”

“이의는 받지 않겠습니다.”

공략 도중 한성이 부상을 입게 되면 처리하기 편해지기에

웃고 싶었던 원 허였지만, 강건과 박한진이 있어 그러지 못했다.

“그 대신 제가 중국을 도운 것에 대해선 함구하겠습니다.”

“….”

“어차피 총리께서도 그걸 원하시고

한국 정부와 헌터 동맹이 아닌 제게 의뢰하신 거니까요.”

“…끙… 알겠습니다.”

속내를 들켜서인지 원 허의 입이 썼다.

“대통령께서도 협회장께서도 그리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알겠네.”

강건과 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공편을 준비해두겠습니다.”

말과 함께 원 허가 휴대전화를 들자 한성이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따로 가겠습니다.

그게 비행기보다 더 빠를 것 같기도 하고요.”

휴대 전화를 꺼내는 원 허를 보며 한성이 말했다.

“…그 리치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오해가 없도록 현장에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벨루몬의 능력을 알고 있던 그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사악.

한성이 그림자로 녹아들자, 강건이 입을 열었다.

“총리님.”

“…? 예. 말씀하십시오.”

“그럴 일이 없을 것임을 압니다만….”

“…?”

“한성 군이 마물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불의에 의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지 않길 바랍니다.”

“…예. 물론. 그럴 것입니다.

저희 또한 이한성 헌터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건의 타는 듯한 시선에 뜨끔하는 원 허였지만,

정치판에서 구를 대로 구른 그답게 쉽게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건 협회장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길 저 또한 바랍니다만….

만에 하나 그리된다면 중국은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만일 뜻하지 않는 사고가 일어난다면,

우리 정부는 마땅히 그것에 대해 조사를 착수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실들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는 말이지요.”

“….”

“예를 들면 중국이 우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국이 아닌 타국의 헌터에게 거래를 요청한 사실이라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그의 죽음을 계획했다든지의 사실 말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만, 조금은 협박처럼 들립니다.

전 이한성 헌터에게 의뢰를 요청하러 온 사람임과 동시에

대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의 총리임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원 허가 불쾌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협박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원 허 총리께서 중국의 대들보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에게 저희가 협박을 할 수 있을 리 없지요. 허허.”

한진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흠흠. 뭐 그 정도까지야.”

원 허가 얼굴을 바로 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한성 헌터의 가치는

당신과의 마찰로 인해 생겨날 국가 간 갈등보다도 큽니다.

필요하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요.”

이어진 한진의 말에 원 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작은 나라이고 보유한 무력이 크지 않지만,

국민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만은 그 어느 대국보다 크기에

조금 가시 돋친 말을 해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흠. 알겠습니다.”

“그럼, 바쁘실 텐데 가시는 길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한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좌관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와 원 허를 데리고 나갔다.

찰칵.

“후우.”

“잘하셨습니다. 대통령님.”

강건이 한진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조금은… 긴장했나 봅니다. 손에 땀이 나네요.

그나저나 제 말과 태도를 꼬투리 잡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먼저 불손한 태도를 취한 건 저쪽이니까.

그리고 저쪽은 우리와 접촉했다는 사실조차도 알리기 싫을 테니,

한동안은 그저 입 꾹 다물고 있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한진이 웃으며 답했다.

“그나저나 솔직히 다시 봤습니다. 대통령님.”

“무엇을 말입니까.”

“이제껏 대통령님을 자신의 위신과 제 권력기반만을

중시하는 닳고 닳은 정치인 정도로 생각을 했습니다만,

지금 보니 제 생각이 조금은 틀린 것 같습니다.”

“…뭐, 그 생각이 영 틀리진 않을 겁니다.

여전히 전 제 권력기반이 유지되는 걸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고,

제 위신과 체면을 중요시하는 작은 그릇의 정치인이니까.”

한진이 웃으며 차를 마셨다.

“그렇기에 이한성 헌터를 더 붙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를 놓쳤다간 제 정치 인생을 망치게 될 게 뻔하니까요.

또 매국노라는 소리도 듣기 싫었고요. 그저 그뿐입니다. 하하.”

“…현명하시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둘은 그 뒤로도 한동안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 *

“…즐겁구나.”

어두운 밀실.

권좌에 앉은 이가 권태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녹은 것인지, 아니면 찢어진 것인지

흘러내리는 피부를 가진 검은색의 오크가 그 주인공이었다.

권태로운 목소리나 섬세한 손짓과는 다르게

그의 몸은 근육으로 우락부락해 권좌가 좁아 보였다.

“…음? 우르티카. 무슨 일 있느냐? 표정이 좋지 않구나.”

권좌에서 다섯의 마물들을 내려다보던 그가 입을 열자

우르티카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닙니다. 신이시여.”

“어쩐지 불만이 있는 얼굴이구나. 후후.”

“….”

“저쪽 세상에 세워진 나의 의지들이 무너지고,

악의 대지가 사라져감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아서겠지.”

“…그러하옵니다. 신이시여.

거룩하신 당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들이기에….”

“모든 건 다 때와 이유가 있는 법이란다. 아이야.”

“….”

“내가 세운 의지와 죽음의 대지들이 사라진다 한들,

저들의 운명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단다.”

“….”

“그러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말려무나. 후후….”

“예.”

“다리의 준비는 모두 끝났나?”

“제물의 준비와 좌표의 설정,

수호 마물들의 배치까지 모두 끝났사오나

송구하게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듯하옵니다.”

4군단장이 빠르게 답했다.

“제물들로부터 충분한 힘을 얻을 수 있게,

부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길 간청하옵니다. 신이시여.”

“매사에 꼼꼼한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기다려 주마.”

그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다리를 이어 두 세상이 만나고 혼돈이 시작되면

그때… 난 비로소 세계수, 그녀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리고 내 몸을 찾아 두 반석 모두를 피로 적실 것이다.”

그의 눈이 붉게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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