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후우….”
…쿵.
숨을 크게 내쉰 한성의 등 뒤로 검은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 기둥의 도처에는 온몸이 검게 물든
오크와 고블린 무리들이 몸이 양단되어 흩어져 있었다.
“이걸로 통산 이백 개째… 인가?”
전장을 바라보는 한성의 눈이 깊었다.
한성은 일부러 군사력이 미천하고,
헌터 보유 수가 적은 국가들을 우선적으로 찾았다.
같은 수준의 마물들이라 할지라도,
강화된 마물들은 그들에게는 힘겨운 존재들일 테니까.
그러나 한성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었음에도,
수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죽었고 많은 것이 무너져 내렸다.
사체들은 형체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찢어지거나 짓이겨져 있었고,
그들의 곁에는 제 친구, 연인, 부모, 형제, 자식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제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어댔다.
아직 흩어지지 않은 악의 대지에서 마기들이 피어올랐고,
피어오른 마기들이 그들을 타고 오르며 잠식시키려 했지만
그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눈앞의 현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내장이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울음을 토해낼 뿐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을 마기들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자들의 고함 소리와
사람들의 울음소리, 마물들을 저주하며 욕하는 소리들이
모두 한데 뒤섞여 지옥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꾸드득.
“…빌어먹을.”
한성이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리도 많이 봐왔던 죽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물을 벨 때의 그 촉감,
비릿한 피 냄새와 썩은 내장의 역겨운 냄새,
짙게 드리운 죽음의 냄새들은 익숙해지지 않았고,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외침들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할 수 있기에, 그리고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누군가 또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한성이기에
익숙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호기롭게 칼을 내지른 것일 뿐.
그로서도 이는 결코 유쾌하거나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다.
거기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야 했던 인간들도,
제 의사와 관계없이 마기에 미쳐 죽어야만 했던 마물들도
한성에게는 모두가 다 똑같이 마음 아픈 존재들이었다.
“으드득.”
‘네놈이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 투르바.
도대체 뭘 원하기에 죄 없는 이들을… 이리도….’
한성이 주먹을 강하게 쥐며 전의를 다지던 그때,
그의 등 뒤로 맑고 어린아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 고맙습니다. 헌터님.”
남루한 행색에 빨지 않아 꼬질꼬질한 옷,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자라지 못한 키와 앙상한 몸.
이제 겨우 열 살은 됐을까 싶은 아이였다.
그는 닳을 대로 닳아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그대로 해어질 것만 같은 포대기를 들고 있었다.
한성이 제 말을 듣고도 답을 하지 않자,
알아듣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영어를 더듬거렸다.
“때… 땡큐.”
“너는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네. 다친 데 없어요. 어?”
분명 들려오는 말소리는 다른 나라의 말인데
머릿속으로는 자연스럽게 해석되어 들려왔다.
벨루몬의 마법임을 알 리가 없는 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놀라워했다.
“다행이네.”
“제 동생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포대기 안에 있는 게 동생이었나.’
“아. 아까 전에 그…?”
“네. 맞아요. 헌터님께서 구해주셨어요.”
한성의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는
오크들의 공격에서 한성이 구해낸 아이들 중 하나였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래도….”
“소파니!!”
아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보호자로 보이는 남자가 아이를 불렀다.
“죄… 죄송합니다. 헌터님.
저희 아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 아닌지.”
“아! 아파!!”
달리다시피 다가온 그가 아이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어쩐지 아이를 잡아끄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저 제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을 뿐입니다.
별다른 실례도 하지 않았고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한성의 힘을 봐서일까.
그는 한성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건가. 난.’
한성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을 때,
소파니라 불린 아이가 한성에게 다가와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이거… 배고플 때 드세요.”
흙과 먼지가 묻었는지 더럽고 꼬질꼬질했지만,
분명 손에 쥐어진 건 소담한 크기의 바나나 떡 한 덩이였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아이의 체온 때문인 건지 꽤 따뜻했다.
“맛있어요. 그래 보여도.”
아이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고맙다. 잘 먹을게.”
뭔가 울컥한 한성이 그 자리에서 떡을 씹었다.
우득.
돌 조각인지 모래인지가 씹혔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따뜻했고, 맛있었으니까.
기분이 좋았다.
그게 바나나의 단맛인지,
아니면 아이의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맛있네.”
“그렇죠? 헤헤.”
“잘 먹었어. 또 보게 될 때까지 건강하렴.”
“네. 헌터님도요!”
사악.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이에게
손을 흔든 한성이 일그러진 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 * *
“현 상황은.”
“현재까지 통산 591개가 파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 실장이 빠르게 답했다.
“…? 벌써?”
강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마물과의 전쟁을 선포한 지
나흘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저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해,
서버의 오류를 가장 먼저 의심했습니다만….
서버에는 딱히 문제가 생긴 것 같지 않았습니다.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고 지표 또한 정확합니다.”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빠른 것 같군.”
강건의 미간이 좁혀졌다.
“마신의 창을 호위하는 마물들 대부분이
A 최상급에서 S 최상급 게이트에 서식하는 놈들과
그 힘이 거의 유사한 수준이라고 보고 받았네만….
국가전력급 헌터들과 군 당국 모두가 합심해
놈들을 전력(全力)으로 저지하려 해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
“이 일의 배후에 한성 군이 있나?”
강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예. 현장에 파견된 각국 헌터들과 요원, 주민들의 증언,
현장 CCTV와 블랙박스 등 자료 모두를 종합해 봤을 때,
이한성 헌터의 외모와 인상착의는 물론, 공격 패턴, 능력
그리고 동료 마물 분들의 생김새까지도 모두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한성 헌터의 행보가 확실해 보입니다.”
“역시….”
“또한, 파괴된 마신의 창들 중에서 500개 이상이
이한성 헌터와 동료분들이 파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친.”
강건이 작게 중얼거렸다.
“게다가 한 가지 묘한 게… 있습니다.”
“묘한 거라…?”
“예. 이한성 헌터가 먼저 공략을 시작했던
국가들을 살펴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뭐지?”
“동맹에 가입은 했으나,
군사력이나 헌터의 수가 타국에 비해 부족해
국가 존속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국가들이라는 점입니다.”
“그 말은… 한성 군이 일부러 그런 국가만 골랐다는 말인가?”
“예. 하나같이 전력의 공백이 심한 국가들뿐이라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허….”
“만약 이한성 헌터가 그들을 돕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국가들은 지금쯤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거 참….”
“뿐만 아니라, 역시라고 해야 할지….
그는 단순히 마신의 창만 제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타우한 씨를 파견해 통칭, 악의 대지마저 지워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연합 측에서도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힐러들이나 헌터들을 따로 파견할 필요가 없어졌고요.”
‘도대체가….’
강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후… 일단 그렇다 하더라도, 구호 물품이나 지원 물자,
도시를 복구할 수 있는 인력과 자원들은 넉넉히 보내두게.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도록 돕는 일 또한 중요한 일이니까.
아마 이건 한성 군이 우리에게 남겨준 숙제일 것 같군.”
“이미 보내뒀습니다.”
박 실장이 웃으며 답했다.
“잘했네. 그나저나 우리가 할 일이 이리 없어서야….
연합을 만든다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줄 필요가 없었다 싶군.
애초부터 한성 군에게 일임했으면 될 일이었을 텐데 말이야. 허허.”
강건이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회장님. 한 가지 더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만….”
“…또 있나? 또?”
“세상은 이한성 헌터가 행했던 일련의 일 모두를
우리 연합에서 의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한 일이라니…?”
“그게… 이한성 헌터와 동료분들께서
자신들을 연합에서 파견된 연합군이라 말하고 다닌답니다.”
“…뭐?”
“용기 내어 동맹에 참여해준 고마운 우방국에 대해
연합은 그저 조금의 감사와 신의를 보이는 것뿐이라며,
감사할 것도 고개 숙일 것도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연합의 장인 회장님의 의도라고….”
“…하.”
강건은 기가 찬다는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또한 30분 전, 캄보디아에서
이한성 헌터가 보여줬던 일들이 전파를 탔습니다.
더 일찍 오지 못해서 미안해하고 분개하는 듯한 모습이나
꼬마가 건넨 흙 묻은 바나나 떡을 먹고 웃는 모습들이요.”
“….”
“이 때문인지 동맹 불참을 선언했던
이란과 파키스탄, 베트남마저 동맹 참여를 선언했고
이한성 헌터로부터 구명 받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
“또 이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이한성 헌터의 이야기가 급속도로 확산됨과 동시에
연합군과 스카우트에 자원하는 이들이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대단하군… 정말.’
강건은 한성의 행보에 할 말을 잃었다.
한성 개인이 가진 무력은
이미 국가 수준을 아득하게 뛰어넘었고,
그의 힘이 미칠 수 있는 영역은 세계적 단위가 되었다.
이제는 강건이 언젠가 농담처럼 했던
세계 정복에 관한 이야기가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된 셈.
뿐만 아니라 한성은 오롯이 제가 한 일들임에도
그 모든 영광과 명예를 협회와 연합으로 돌렸다.
이를 통해 연합이 이름뿐인 단체가 아님을 알렸고,
동맹이라는 기치 아래 인류가 단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게다가 연합의 병력이 닿기 어렵거나,
가기를 꺼려하는 개발도상국, 후진국에 먼저 가
그들을 구해내는 세심하고 다정한 배려까지 보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예상하고 판을 까는 건지….
그의 강함과 그의 행동 저변에 깔린 의도 및 생각들은
그 나이대의 헌터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헌터들도 보일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저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국가들은 어떻다던가.”
“모두 힘을 내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문제없이 모두 잘 막아내고 있습니다.
어쩌다 그들의 역량을 뛰어넘는 마물이 보일라치면,
바로 벨루몬 씨의 권속으로 보이는 이들이 나타나
헌터들을 돕고 시민의 피난을 돕는 형국입니다.”
“…거 참.”
“일본과 중국은 여전히 동맹 참여에 회의적입니다.
그래서인지 이한성 헌터와 동료분들도 그들의 영역에는
일절 다가가지도 않고 있고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함께하기를 선택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확실히 구분하겠다는 거겠지.”
“저도 그런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할까요?
한 번 더 요청을 보내 동맹에 참여하길 요구해 볼까요?”
“내버려 두게.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지 않는가.
동맹국과 우리 내부의 단속마저도 힘든 시점에 뭘 그렇게까지.”
강건이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계속 동향을 알려 주게.”
“예. 알겠습니다.”
철컥.
삑.
스크린 너머의 한성의 모습을 보며
강건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