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 * *
서걱.
“어…억….”
레그나토르의 신형이 그녀를 지나쳤고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늦은 듯 보였다.
그녀의 몸 좌하단에서부터 우상단까지
분명 전에는 보이지 않던 선 하나가 생겨나 있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선은 진해져 갔고,
선으로부터 스며든 다홍의 피가 흰 피부를 적셔갔다.
투둑….
이내 양단된 그녀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피와 내장으로 바닥이 흥건해졌다.
[…이상하군. 분명 베었거늘….]
레그나토르가 검에 묻은 한 방울의 피를 털어내며
뭔가 석연치 않다는 듯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그가 검을 거두자,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녀석. 정말로 네놈이 그년을 벴다 생각하나?”
사악.
한성의 곁에 모습을 드러낸 벨루몬이
레그나토르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라?]
“…나와라. 우르티카.”
한성도 이미 이를 알고 있었다는 듯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머. 이번에도 안 통하네? 진짜 대단한데. 꼬맹이 너?
내 특기가 은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 제법 하는 편인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날 찾아? 정체가 뭐야? 너?”
허공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힘을 찾아냈을 뿐이다.”
한성이 담담히 답했다.
“그게 된다고? 대단한걸…?”
[…허상이었나.]
레그나토르가 중얼거렸다.
터져서 엉망이 된 고치 위로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강한 데다, 똑똑하기까지 하고….
리치 킹과 다크 나이트마저 권속으로 부리기까지….
도대체 정체가 뭘까…? 우리 꼬맹이는? 누나가 욕심이 나네.”
그녀가 혀를 할짝이며 한성을 바라보았다.
둘에게 새겨진 한성의 힘을 읽은 것이리라.
“주군께 함부로 그 음탕한 혀를 놀리지 마라.
네년 따위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벨루몬이 그녀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어머. 설마 지금 관심 안 드렸다고 질투하시는 거예요? 리치 킹?
고귀하디 고귀하신 우리 귀공자께서 어쩌다 인간의 개가 되셨을까?”
벨루몬을 바라보는 우르티카의 눈이 반짝였다.
“많은 시간이 지났건만… 너희 서큐버스들은 변하질 않는군.
발정 난 암컷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닌 것도 여전하고 말이야.”
“하…?”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나마 네년이 전대의 퀸들보다 낫다 할 수 있는 건
음탕한 그 아랫도리만큼이나 입도 꽤 잘 놀린다는 것 정도군.”
벨루몬이 씹어 뱉듯 답했다.
“어머. 자존심 상하셨나? 입이 거치시네. 후후.”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내 군사다. 누구보다 든든한 동료이고.
험한 꼴을 당하기 싫다면 개라는 말은 취소해줬으면 좋겠군.”
한성의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어머. 우리 꼬마 기분 나빴구나. 누나가 미안해. 당신도요. 후후.”
“방금 전에 말했을 텐데. 주군께 함부로 혀를 놀리지 말라고.”
[이번엔 제대로 목을 따주마. 탕녀.]
벨루몬과 레그나토르의 안광이 타올랐다.
“어머… 두 분 다 질투가 심하시다. 정말.”
“꺼져라.”
벨루몬의 말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생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당신들을 찾고 계세요. 귀하게 써주실 겁니다.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을 것 같은데.”
“다시 말하지. 음탕한 분 냄새 풍기지 말고 꺼져라.
천박한 네년과는 단 한 줌의 공기도 나누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다. 내 주군은 한 분이시다. 탕녀.]
“저런 별 볼 일 없는 꼬마보다는 어머니께 속하는 게 나을 텐데?”
둘의 원색적 비난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별 볼 일 없다는 말은 주군에게는 어울리지 않소.
그런 말은 주군보다는 몸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마기 덩어리에게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말 같소만.”
“동감이에요.”
“그 말이 틀림없지.”
둥지 입구로부터 타우한과 티에라, 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어쩐지 쓸 만한 녀석들이 없다 했더니….”
그들을 바라보는 우르티카의 눈이 또 한 번 반짝였다.
“토템의 극에 닿은 자, 세계수의 수호자, 하이오크 대족장까지….
꼬마 네가 모조리 다 빼돌렸던 거구나. 대단한데? 정말?”
우르티카가 기가 찬다는 얼굴로 한성을 바라보았다.
“칭찬 고맙게 받아들이지.”
한성이 씩 웃으며 답했다.
“하… 대단하네. 대단해.”
“사라져라. 암컷. 죽고 싶지 않다면.”
벨루몬이 손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리자,
빙글빙글 웃던 그녀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졌다.
“어차피 당신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어요.
평소에 마음에 담고 있던 분이었으니까. 오늘은 물러가죠.”
“군사가 겁나서 떠난다는 말을 뭐 그리 길게 하시는 거요.”
타우한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조만간 다시 볼 날이 있을 거예요. 모두.”
“….”
“다시 만나 뵙게 될 때까지 몸 건강하시길.”
딱.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시종일관 담담하던 한성의 안색이 변했다.
흠칫.
이를 느낀 것은 한성뿐만이 아닌 듯 보였다.
가장 둔한 칸마저 살짝 어깨를 떨어댔으니까.
“무슨…?”
“그럼, 이만.”
사악.
말을 마친 그녀는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우르릉.
그녀가 사라짐과 동시에 지반이 떨렸고,
아라크네의 둥지는 빠르게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밖으로.”
“예.”
딱.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기자, 풍경이 변했다.
아라크네의 둥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심이었다.
[경고 : 해당 지역에 투르바의 권역이 생성됩니다.]
[경고 :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악의 대지가 활성화됩니다.]
[경고 : 악의 대지에 들어선 투르바의 권속들이 강대해집니다.]
‘…투르바의 의지라는 게 이걸 뜻하는 거였나.’
시스템의 알림을 보는 한성의 눈이 날카로웠다.
‘인간세계에는 투르바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 했다.
아마 세계수의 힘이나, 세계와 세계 사이의 거리 때문이겠지.’
아라크네의 말을 떠올린 한성이었다.
‘그래서 투르바는 이를 돌파해내고자 저것을 세웠고,
저것을 매개체 삼아 권속들에게 힘을 줄 생각이었다… 이건가.’
[퀘스트 발생 : 악의 창궐.]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시스템의 알림을 보며 한성이 쓰게 웃었다.
‘바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뜻인가.’
한성이 퀘스트 내용을 살폈다.
[퀘스트 : 악의 창궐.]
[퀘스트 내용 : 마신의 창을 제거하시오. (0/1000)]
[케스트 보상 : 경험치 + a]
‘마신의 창… 이라.’
우르릉
완전히 무너져 내린 아라크네의 둥지 아래에서
가로세로 10미터는 될 법한 검은 기둥 하나가 솟아올랐다.
[경고 : 모든 악의 대지가 활성화됩니다.]
[3.]
[2.]
[1.]
[완료되었습니다.]
알림과 함께 기둥 주변의 모든 것들이
검고도 검은 기둥의 색처럼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둠은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위 모든 사물들을 삼키고 검게 물들여댔다.
그것이 철근이든, 콘크리트 더미든, 마물의 사체든, 인간이든.
그 어느 하나 가리지 않고 삼키고 뱉어냈다.
“푸르르. 소름 끼치는군.”
흥분한 듯 타우한이 투레질을 해대며 중얼거렸다.
“…그러네요.”
티에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주군.”
“?”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벨루몬이 한성의 앞에 화면을 하나 띄우며 말했다.
화면에는 세계지도가 띄워져 있었고,
지도에는 붉은 점들이 한가득 빛나고 있었다.
“방금 제 골렘들이 탐지해 제게 알려온 것입니다.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이나 세기, 성질들을 분석해 보았을 때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저것과 동류의 것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역시.”
“게다가 이상한 건 하나 더 있습니다.
혹시 지난번 대량으로 발생했던 차원 간의 연결을 기억하십니까?”
“던전 브레이크를 말하는 거야?”
“예. 맞사옵니다.”
“그게 왜.”
“그때 포탈이 열렸던 지점들과
지금 저것이 생겨난 지점이 거의 일치합니다.”
“그 말은….”
한성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예. 그때 이미 저것을 심어 둔 듯합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항복을 종용할 생각은
애초부터 조금도 없었다는 뜻이겠지.”
뿌드득.
한성이 이를 갈았다.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그런 것 같습니다.”
“제기랄!!”
쾅!!!!!!!!!!
한성이 건물의 외벽을 내리치자 건물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맥없이 당해주지는 않겠다. 투르바.”
한성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 * *
“제2군단장 우르티카가 복귀했음을 알리옵니다. 신이시여.”
권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우르티카가 한없이 낮은 자세로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우르티카. 일은 어떻게 됐지?”
어두운 밀실.
미색의 목소리가 화려한 권좌로부터 들려왔다.
햇살 아래 졸고 있는 고양이 마냥 나른한 목소리였다.
“심었던 마의 씨앗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깨끗이 개화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신이시여.
저들은 당신의 위대한 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옵니다.”
“그래? 기쁜 일이군. 후후.”
“예. 신이시여. 참으로 기쁜 일이옵니다.”
“수고했다. 우르티카.”
“감당키 어려운 칭찬이옵니다. 신이시여.”
권태로운 그녀의 목소리에 우르티카가 몸을 떨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나?”
“…그것이….”
“무엇이든 좋으니 말해 보거라. 딸아.”
우르티카가 머뭇거리자 그녀가 대답을 재촉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간이 있었나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녀의 말에 밀실 안은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숨 막히는 긴장감과 압박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분명 그는 어머니 당신의 존함을… 알고 있었나이다.”
우르티카가 힘겹게 대답했다.
“나를…? 인간은 맞느냐?”
“예. 틀림없이.”
탁.
권좌로부터 그녀가 몸을 일으켰고,
우르티카를 향해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려왔다.
“헙….”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우르티카를 포함한
밀실의 모든 인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희미한 빛 아래 드러난 그녀는 서큐버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서큐버스들 중 하나로 몸을 갈아탄 것이리라.
그러나 그녀의 마기와 사기를 이겨내지 못한
서큐버스의 나약한 육체는 결국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죽였나?”
그녀는 자신의 육체가 흘러내리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말씀드리기 송구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나이다.”
“왜지?”
“그것의 힘을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두려워 도망친 것인가.”
“결코!!”
순간 자신이 그녀에게 언성을 높였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하게 들어 올렸던 고개를 처박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결코… 두려워서 피한 것이 아니옵니다.
당신께서 함께하심에 제가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나이까. 다만….”
“다만…?”
“한시라도 당신께 이를 빨리 알려야겠다 싶어 돌아온 것뿐이옵니다.
부디 어머니 당신에 대한 저의 충을 짓밟지 말아 주시옵소서.”
“흐음… 그래. 그랬겠지. 넌 그런 아이니까. 후후….”
탁.
우르티카의 앞에 멈춰 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해 보거라. 녀석은 어때 보였느냐.”
“그의 무력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었으며,
그가 거느리고 있는 마물들 또한 만만한 자들은 아니었나이다.”
“인간이… 권속을 거느린다…라…? 신기하군.”
그녀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맴돌았다.
“레그나토르와 리치 킹, 세계수의 수호자와
토템의 극에 닿은 자, 하이 오크 대족장까지….
모두가 그에게 진심으로 충을 다하고 있었나이다.”
“1군단장과 4군단장이 그들을 찾지 못했던 이유가 그거였나.”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예. 그런 듯하옵니다.”
“쉽게 허락하지는 않겠다는 뜻인가. 재밌군.”
그녀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와 벌레 몇이 달려든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니 불안해하지도 염려하지도 말아라. 나의 아이야.”
“예. 어머니.”
“약속의 시간이 온다.”
그녀의 눈이 광기로 붉게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