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225화 (225/336)

225화

* * *

“수고하셨습니다.”

모잠비크 공략이 끝나고 돌아온 길드장들을 보며 한성이 말했다.

“어….”

길드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성용이

좀비마냥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한성을 맞이했다.

지쳐 보이는 건 다른 길드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피곤하건 늘 꼿꼿한 자세로 앉아

명상을 하던 선우나 형우조차도 널브러진 채 쉬고 있었으니까.

“힘든 싸움이셨나 봅니다.”

“…죽다 산 게 열댓 번은 될 거여. 후….

미친놈들이 나 한 번 씹어보겠다고 얼마나 달려드는지….

아주 그냥 치가 떨린다. 아주.”

성용이 질린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거치고는 꽤나 멀쩡해 보입니다만.”

성용의 방어구를 살피는 한성의 눈이 날카로웠다.

“…애림 씨랑 재권 씨가 힐이랑 버프 안 걸어줬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적어도 수백 번은 뒈졌을걸?”

“저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길드장님.”

성용의 말에 선우가 동의하며 답했다.

“뭐가 됐든,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죽어라 고생하는 동안 넌 뭐 했어?”

“연설(?)도 좀 하고 연극 구경(?)도 좀 하다 왔습니다.”

“쳇. 팔자 좋군.”

한성의 말을 이해할 리 없는 성용이 툴툴거렸다.

“그런가요.”

성용의 투덜거림에 한성이 웃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오후에 러시아 측과 준결승전이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어. 그래서 그거 시간 맞추려고

일부러 모잠비크 공략하다가 관두고 튀어온 거야.”

성용이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그나저나 너 이번에도 안 나설 거야?”

“아마도요?”

“…그러다 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너 진짜?”

“안 질 겁니다. 여차하면 제가 나설 거니까.”

한성이 씩 웃으며 답했다.

“…그때까진 굴리겠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네가 나서는 일이 생기면….

벨루몬 싸부가 우릴 가만두지 않겠지?”

“아마도요?”

“…빌어먹을.”

성용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삐비빅.

“잠깐만요. 회장님 전화라.”

“어어. 받아.”

성용이 괜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회장님. 예. 예. 다행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삑.

“뭐래. 노인네. 경기 격려차 전화한 거여?”

“아뇨. 그것에 대해선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동맹 불참을 선언했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영국에 이어서 동맹에 참여하겠다 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래?”

“참여하겠다 말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빠르게 진행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커스 헌터의 입김이 유럽에서 꽤나 센 모양입니다.”

“…너? 설마?!”

“협박한 거 아닙니다. 삼촌. 제가 무슨 깡패입니까?”

한성이 웃으며 답했다.

“아니냐?”

성용이 진심을 담아 되물었다.

“제가 해밀턴 헌터 도와준 것에 대해

마커스 헌터께서 감사 표시를 하고 싶다 하시기에

유럽 국가들이 동맹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일 뿐이구요.”

“…그랬군.”

“이제 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는

중국, 일본, 러시아, 베트남, 이란, 파키스탄 6개국뿐이군요.”

“뭐… 딱히 달갑지 않은 나라들뿐이네.

그중 세 나라는 동맹에 참여해줬으면 하는 나라고.”

성용이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탐탁지 않기는 해도 손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으니까요.”

“그건 맞지.”

“그럼, 쉬시고 좀 있다가 경기장에서 뵙죠.”

말을 마친 한성이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 * *

“…뭐요??? 기권? 그걸 왜 지금 말해주는 거요?

기껏 준비 다 하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갑자기 이게 뭔 말이야.”

성용이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그게… 저희 측도 방금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정황상 본국에 발생한 일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뉴스 속보 못 보셨습니까? 1시간 30분 전,

모스크바에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아직 없으나 꽤나 고위급이라고….”

“…갑자기요?”

형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예. 자세한 사항은 저도 아직 파악된 바가 없는지라….”

“…흠… 알겠수. 가서 일 보슈.”

“예. 그럼.”

철컥.

“…이거 참….”

성용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갑작스레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가

비단 러시아의 일뿐만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기랄. 앞선 경기들에서 부전승할 땐 좋기만 하더만

이번에는 왜 이렇게 찝찝하고 기분이 엿 같은 거여. 칫….”

“…그러게 말입니다.”

“한성이는 이 사실 알고 있으려나.”

“…시간이 됐으니 이제 올 겁니다.”

철컥.

“아니. 한성 군은 오지 않을 걸세.”

“음…? 회장님?”

길드장들의 말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강건이었다.

“…뭐여. 노친네. 여긴 웬일이여?”

“못 올 데 왔나. 어디. 그나저나 러시아 쪽 이야기는 들었나.”

“방금 스탭이 얘기해줘서 알았수.

수도 한중간에 던전 브레이크 발생했다고.

그것도 꽤 고위급이라더만. 뭐 어떻게 된 거요?”

“…맞네. S 최상급 게이트인 모양이야.

협회 통합관리 서버에서 파악되는 수치도 꽤나 높고.

알아보니 아라크네가 서식 중인 게이트라고 하더군.”

“…아라크네면, 반은 인간이고 반은 거미인 그 마물 말입니까?”

“맞네.”

“…흠. 꽤나 골치 아프겠군요.”

형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왜. 그냥 때려잡으면 되는 거 아니오?”

“그리 쉽게 생각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

“육체 자체도 단단하고 강한 편이지만,

그것보다도 녀석이 가진 능력이 꽤나 골치 아픕니다.”

“…?”

“첫째로 거미 여왕이라는 별명답게,

그녀는 권속으로 수많은 거미들을 부립니다.

수가 많기도 하지만 거미들이 가진 능력이 다양해요.”

“…그래봐야 거미 아니오?”

“그 말씀은 옳습니다만….

철판도 녹이는 산성 독을 뱉어내는 녀석들부터,

주입되는 그 즉시 모든 신경이 마비되는 독을 품은 녀석,

제 몸에 있는 털을 쏘아 적을 마비시키거나 죽이는 녀석,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방심한 틈을 타 상대를 덮치는 녀석 등….

이런 녀석들이 한가득일 겁니다. 상당히 귀찮을 게 뻔해요.”

“별… 씨발 참.”

성용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게다가 그 권속들을 모두 처리한다 쳐도,

아라크네가 가진 매혹의 힘 또한 만만한 건 아니고

그녀가 가진 육체적인 능력도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제기랄… 불곰국 놈들 고생깨나 하겠군.

그나저나 한성이 안 올 거라는 말은 뭔 말이오?”

“러시아 측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네.”

“…에? 걔네가? 우리한테?”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이겠지.

미국과 중국, 일본 측에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바쁘다는 말과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거부했다더군.”

“…자국 헌터 자원을 아끼겠다는 거지. 뭘. 치사한 새끼들.”

“맞네. 그래서 떠오른 게 우리였다더군.

그래서 내게 연락을 해왔었네. 한성 군과 자네들을 보내달라고.”

“…그래서? 설마 영감이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수?

그거 때문에 한성이가 거길 가느라 여기 못 오는 거고?”

성용이 미간을 찌푸리며 강건을 노려봤다.

“그럴 리가. 난 가지 마라 말렸네.

그러나 한성 군이 괜찮을 거라며 간다 했지.”

“허 참….”

성용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일이 잘 풀리면 러시아에게 빚을 지울 수 있을 거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니

좋은 일이지 않느냐는 말을 하고는 그냥 가버리더군.”

“이한성 헌터답군요.”

선우가 중얼거렸다.

“근데 러시아에서 한성이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찾는다며?

그러면 우리도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오?”

“한성 군이 자네가 그리 말하거든,

올 생각 하지 말고 숙제나 하라고 전해주라더군.

자신 혼자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고.”

강건이 성용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하냐.”

“이거 받게.”

턱.

“이게 뭐요?”

강건이 던진 물건은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마력석이었다.

“모잠비크와 말라위로 갈 수 있는 포탈일세.

한성 군이 벨루몬에게 일러 그 자리에서 만들었고.”

“…하… 가끔 보면 얘 좀 무섭지 않수?

어떤 때는 얘가 앞을 내다보고 미리 준비를 하나 싶어.”

성용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대단하다고 할밖에.”

“후… 알겠수. 우린 그럼 숙제하러 가겠수.

한성이한테 연락 오는 거 있으면 우리한테 바로 알려 주슈.”

“알겠네. 고생해주게.”

“고생은 무슨. 한성이가 더 고생이지.”

열린 포탈로 길드장들이 사라지자,

포탈은 점차 그 크기가 줄어들다 없어졌다.

* * *

“a―15 구역 마력장 발생. 전 대원 위치로.”

스피커로부터 높낮이 없는 대원의 목소리와 함께

꽤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기지 내부에 크게 울려 퍼졌다.

이에 헌터들은 각자 자신의 무기를,

군인들은 총과 수류탄 등의 각종 화기를 장비하고

마력의 감지를 막아내는 방어구를 착용한 채

마력장이 발생한 위치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오는가 보군.”

코가 붉게 달아오른 중년 하나가

마력장이 발생 중인 구역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준비 완료.”

들려오는 무전 소리에 중년이 무전기를 잡았다.

“전 대원.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그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도, 기척을 드러내지도 마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뿐, 그는 제압의 대상이 아니다. 알았나.”

“예.”

기지를 울릴 정도의 대답이 한 번 들리고 난 후,

헌터들과 군인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기척은 사라졌다.

후웅.

옅던 마력장이 점점 선명해지자,

중년은 방의 문을 열고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오싹.

‘…강하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벨루몬의 힘이겠지.’

중년은 마력장으로부터 느껴지는 마기에 소름이 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성된 포탈로부터 한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드미트리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한성이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협회장님. 이한성입니다.”

코가 빨간 중년의 이름은 드미트리로,

러시아 헌터 협회의 회장이자, 엠페러급의 전사였다.

“…? 분명 우리말이 아님에도 우리말처럼 들리는군요.”

“예. 동료의 힘입니다. 괜히 통역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아… 아 예.”

“상황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당신이 강한 것은 알겠습니다만, 설마 혼자 오셨습니까?”

드미트리는 한성의 말에 제대로 답은 하지 않은 채,

닫히고 있는 포탈을 보고는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예. 그렇습니다.”

담담히 답하는 한성의 얼굴을 보며 드미트리는 얼굴을 구겼다.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런 치욕을….’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대충 알 것 같습니다만,

어중이떠중이 같은 엠페러들 몇보다는 저 혼자가 나을 겁니다.

20분 전에 협회장께 보고된 25장짜리 보고서를 제대로 보셨다면….

제가 가진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은 아실 텐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드미트리의 눈동자가 아주 약간 흔들렸다.

“당신에게 눈과 귀가 있듯이, 제게도 그런 비슷한 게 있습니다.”

한성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씩 웃었고,

그런 한성을 보며 드미트리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벨루몬의 골렘들이 알아낸 정보이리라.

‘어떻게 그걸….’

“….”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는 드미트리를 보며 한성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 친구들은 좀 치워주셨음 합니다.

전 당신들을 도우러 온 것이지 공격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협회장님께서 제게 느끼는 불안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제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한성이 고개를 돌려 기지 내부 곳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예.”

‘…괴물이군.’

탁탁탁.

드미트리가 손을 들어 올리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헌터들과 군인들이

본래 자신이 속해 있던 자리로 순식간에 되돌아갔다.

“이제 탐색전은 그만하시지요.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와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러실 건지요.”

한성의 일침에 드미트리가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 상황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순간 드미트리의 머리에 ‘어쩌면’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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