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 * *
“…그… 그게 가… 가능하오?!”
리워르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귀 안 먹었다.”
“미… 미안하오.”
한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어루만지자,
리워르가 황급히 목소리를 줄이며 사과해 왔다.
“대답부터 해라.”
“…그… 그게 정말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다시 한번 그들을 볼 수만 있다면… 내 뭐든 하겠소.”
“뭐든 할 수 있다고?”
리워르의 대답이 한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그 무엇이든 하겠소.
내 목을 필요로 한다면 당장이라도 베어 드리겠고,
내게 노예가 되라 하시면 내가 직접 목줄을 차겠소.”
“그래?”
쿵.
리워르가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소리쳤다.
“그러니 그렇게 해주시오. 제발!!!”
“리워르!!!”
울부짖음에 가까운 그의 고함에 족장들이 놀라 소리쳤다.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자존심마저 버린
그의 모습은 어쩐지 처절하기까지 해 보였다.
“…흠.”
한성은 그저 그를 바라볼 뿐, 별다른 답은 하지 않았다.
쿵!!!!!
“제발!!!”
리워르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소리쳤다.
“리워르!! 그만하시오!!”
족장들이 놀라 그를 말리려 했지만,
리워르는 막무가내로 미친 듯 바닥에 이마를 찍어댔다.
쿵!!!!
콰득….
돌부리에 찢어진 그의 이마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닥에 머리를 찧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몸 따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부탁드리오!!!”
쿵!!!!
“이리 빌겠소. 그러니 제발!!”
텁….
“…?!”
리워르가 힘차게 바닥에 머리를 박았지만
들려와야 할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간 타우한이
바닥에 제 손을 대 그의 이마를 대신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하시오. 리워르.”
그를 바라보는 타우한의 눈이 어쩐지 서글펐다.
“…주군. 이만하면 됐지 않소… 그만하면 아니 되겠소?”
타우한의 손이 빛으로 물들었고,
찢어졌던 리워르의 이마는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 타우한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한성이 씩 웃으며 답했고, 벨루몬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딱.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기자,
세상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족장들과 리워르가 무너지는 세상을 보며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자 타우한은 괜찮다 말하며
불안해하는 그들을 계속해서 안심시켰다.
깨진 창문의 유리 파편들처럼 세상이 부서져 떨어져 내렸다.
부서진 틈 사이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놀란 리워르들이 반사적으로 빛을 가렸지만,
가린 것이 무색할 정도로 빛은 여전히 밝고 환했다.
“윽….”
빛에 눈을 뜰 수 없었던 리워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때.
“족장…!”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족장!!!!!!!”
너무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리한의 목소리와, 죽었던 부족민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라이카, 릴테, 로난타, 티에타….’
“자. 눈을 떠라.”
흠칫.
들려온 한성의 목소리에 리워르들이 서서히 눈을 떴고,
그런 그들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눈앞에서 죽었던 리한과 부족민들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리워르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반파되거나 완파되었다고 생각했던
목책이나 발리스타와 투석기, 대포들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또한, 모두 불출했다 생각했던 대포 탄환이나 화살 등의
물자들도 여전히 창고에 그득그득 들어차 있었다.
꿈이라도 꾼 것일까.
“이게… 무슨…?!”
“리…한…?!”
족장들과 리워르가 놀라 소리쳤다.
“족장.”
“너희들…?!”
“족장!!!!!!!”
부족민들이 달려와 리워르를 감싸 안았고,
그를 일으켜 세우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환상일까 싶어 그들을 쓰다듬어도 보고 만져도 봤지만,
만져지는 감촉이며 냄새는 분명 진짜였고, 제대로 느껴졌다.
환상이라면 깨지 않길 빌고 또 빌었다.
허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모두… 괜찮으냐? 정말… 너희가 맞아?”
부족민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따뜻했고, 젖어 있었다.
“네!!”
“…다행이다… 다행이야….”
울음을 참아 내는지 입술을 굳게 다물었지만,
붉어진 눈가와 흘러내리는 눈물마저 막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울지 마십시오. 족장. 보는 눈이 많습니다.
우두머리는 함부로 울면 안 된다 하신 건 족장이십니다.”
리한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천 조각을 건네주었다.
“그래… 그래야지.”
리워르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지금의 그에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저 그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누구 하나 다치거나 죽은 이가 없다는 것에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내 요구를 말할 차례다. 리워르.”
한성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걸 말씀해주시오. 그 무엇이든 하겠소.”
리워르가 긴장된 표정으로 부족의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타우렌 연합의 지휘관으로서 앞으로 다가올 위험에 대비하라.
그것이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이다.”
한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 * *
“…그게 사실이오?!”
리워르와 족장들이 놀라 소리쳤다.
“…그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고…?”
생생하게 느껴지던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리워르가 소리쳤다.
“하지만… 어찌 그런 대단위의 환각을…?”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럼 주군께서 네까짓 것들에게 거짓을 말씀하셨다는 건가.”
벨루몬이 안광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그… 그런 뜻은 아니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리워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내 힘을 의심하는 것인가?”
“…그… 그것도 아니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힘이라 놀라 그랬소.
불쾌했다면 미안하오. 부디 용서해주시오.”
자신을 띄우는 듯한 리워르의 말에
벨루몬의 안광이 확 하고 순식간에 꺼졌다.
‘다루기 쉬운 녀석이라니까.’
벨루몬을 보던 한성이 씩 웃고는 말을 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일을 키울 필요는 없었으나,
타우한이 간곡히 청하더군. 네놈을 거두어달라고.
그리고 너의 그 고집을 꺾고 함께하게 해달라고 말이야.”
“아….”
“그런 말은 뭣 하러 하는 거요.”
타우한이 쑥스러운 듯 툴툴거렸다.
“그래서 벨루몬의 힘을 빌려 이런 귀찮은 일을 꾸몄다.
네놈이 가진 그 단단한 아집과 고집의 벽을 허물고,
너와 틀어진 타우렌들과의 사이를 다시 바로잡으려고.”
“….”
“결과적으로는 모두 성공했지.”
“….”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인지에 대해 깨달았고,
완고하고 단단하던 네놈의 고집과 아집의 벽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동료들과의 깊었던 갈등의 골은 빠르게 메워졌지. 그렇지 않은가?”
“…맞소.”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족장들 또한,
지난날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 수 있게 됐고
그를 말뿐만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지. 안 그런가?”
“…그렇소.”
한성의 말에 리워르와 족장이 차례대로 답했다.
“뭐. 이 내 말이 아니어도 모두 느낀 바가 많았을 테니,
잔소리는 이 정도까지 하고 내 요구에 대해서 말을 하지.”
“말씀하시오. 듣겠소.”
리워르가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표정이 좋아졌군.’
한성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듯 난 널 타우렌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세울 것이다.
그리고 향후 맞닥뜨리게 될 마신의 군대에 대항하도록 할 것이고.”
“…부족함이 많지만… 해 보이겠소.”
“좋은 대답이군. 그를 위해 필요한 준비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우선적으로 부족별 가용 전력과 비가용 전력을 알아보겠소.
그 뒤 전투에 참여할 이들과 뒤에서 이를 지원할 이들로 나누고,
각자의 자리에 맞는 훈련을 시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겠소.”
“좋군.”
“또한, 부족별로 필요한 물자와 자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들을 지원하여 혹시나 있을 부족에 대비시키도록 하겠소.”
“좋아.”
“마지막으로, 벨루몬에게 부탁해
부족마다 존재하는 워프 장치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유사시 모든 부족이 빠르게 기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소.”
“호오… 워프 장치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한성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리워르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소. 워프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서리 눈꽃 부족과 태양 불꽃 부족이 이리 빨리 올 수 없소.”
리워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두 부족과 우리 부족 간의 거리는
코모코를 타고 쉬지 않고 달린다 해도 며칠 걸릴 거리요.
그러나 그들이 이곳에 도착한 건 채 몇 시간이 되지 않았소.
그러니 워프 장치를 사용했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않겠소.”
‘역시 녀석을 택하길 잘했군.
정신없는 와중에 그것도 계산에 넣고 있었단 말인가.’
한성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부족에도… 흠흠… 워프 장치는 있소.
그… 십여 년 전에 내가 그 연결을 끊고 부수어서 그렇지.”
리워르가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벨루몬.”
“하명하시옵소서.”
“저들의 워프 장치를 손봐줄 수 있겠어?”
“간단한 일이옵니다. 주군.”
“그럼 부탁해도 될까?”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말을 마친 벨루몬이 사라졌다.
딱.
한성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그림자로부터
데스나이트 한 기가 빠르게 솟구쳐 한성의 앞에 나타났다.
“너에게 이 녀석을 붙일 거다.
벨루몬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녀석이다. 꽤 강하지.
혹시나 공격을 당한다 해도, 내가 오기 전까진 버텨줄 거고.”
“…알겠소.”
한성이 고개를 까딱이자 데스나이트는 즉시
리워르의 그림자로 다가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필요한 것이 있거나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를 통해 내게 연락하도록.”
“아… 알겠소.”
신기하다는 듯 제 그림자를 살피던 리워르가 빠르게 답했다.
“또 하나, 지금의 타우렌들이 가진 전력은
다가올 위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미약하다.
자칫했다간 너희들이 봤던 환상이 실제가 될지도 모르지.”
“….”
한성의 말에 리워르의 팔에 닭살이 돋았다.
“그렇기에 각 부족별로 존재하는 주술사들을 한곳에 모아
타우한으로 하여금 그들을 훈련시켜 그 역량을 끌어올릴 것이다.
전사들 또한 다른 종족 전사들과 합동 훈련을 하게 할 것이고.
이쪽의 준비가 되면 부를 테니, 너 또한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도록.”
“알겠소.”
“리워르. 조만간 다시 봅시다.”
일그러진 공간으로 한성과 타우한이 사라졌다.
* * *
“퀘스트 창.”
숙소로 돌아온 한성이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퀘스트 : 패왕(霸王)의 즉위를 위하여]
[퀘스트 내용 : 패왕(霸王)의 자격을 증명하시오.]
[퀘스트 조건 :1. 왕의 친위대 결성 (5/5) 2. 세계수의 인정(1/1)]
[퀘스트 조건 :3. 왕의 표식 획득(1/1) 4. 지지 세력 구축 (5/5)]
[퀘스트 조건 :5. 레벨 (75/100)] 6. 업적 ‘흑의 군주’ 획득 (0/1)]
[퀘스트 완료 보상 : 최후의 각성 퀘스트로의 연계.]
[퀘스트 실패 페널티 : 최후의 각성 퀘스트 연계 기회 박탈.]
“후… 저쪽의 발판은 모두 마련되었다.
남은 것은 나와 인간들의 준비뿐.”
퀘스트 창을 끈 한성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