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 * *
리워르의 절규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제 아비의 절규를 들은 것인지
리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힘겹게 입을 열어 뭐라 중얼거렸다.
떨리며 달싹거리는 입술.
멀어서 들리지는 않았지만 리워르의 눈에 보인
제 아들의 입 모양은 분명 아버지란 단어를 말하고 있었다.
푸확.
일시에 언데드들이 내지른 칼과 도끼가 거두어지자,
그로부터 피와 내장들이 쓸려 바닥에 쏟아져 내렸고,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리한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리한!!!!!!!!!!!!!!!!!!!!!!!”
피 맺힌 아비의 절규가 이어졌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들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만 갔고
그의 얼굴은 백지장마냥 창백해져만 갔으니까.
“이거지… 하아….”
절망과 좌절, 무력과 슬픔, 후회와 분노가 뒤섞여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되어버린 리워르의 얼굴을 보며
이요프는 환희에 찬 얼굴을 해 보였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제 몸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끝 마디마디마다 쾌락이 가득 차 있었고,
쾌락의 절정을 맛보았는지 눈은 이미 맛이 간 상태였다.
리한의 죽음을 기점으로
팽팽하던 힘의 줄다리기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주술사들의 마력이 다해버렸는지,
전사들의 무기에 깃들었던 신성의 빛이 약해져갔고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던 회복의 술도 점점 옅어져갔다.
이에 언데드들은 성난 파도가 되어
돛을 잃어버린 타우렌 조각배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제 전장에는 언데드들의 것보다
타우렌들의 비명과 고함 소리가 더 커져가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일방적인 살육뿐.
시간이 흐르자, 타우렌과 언데드들의 사체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 너머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는 해가 보였다.
칠흑 같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오고 있건만….
다시 밝아 온 광명은 철의 노래 부족을 위한 것이 아닌듯했다.
철의 노래 부족은 이제 3할도 채 남지 않아 있었으니까.
“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의 무능력함으로 부족을 지키지 못했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깟 자존심 하나 때문에
부족민들 대부분과 하나뿐인 아들을 잃게 되었다.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아….”
언제 쉬었는지 쉬어버린 그의 목에서는
쇳소리가 섞인 걸걸한 소리만이 들려왔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저 눈물로 뿌예진 세상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 뿐이었으니까.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그의 울음은 다친 짐승의 그것과도 같았고
그의 두 눈에서는 두 줄기의 굵은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부디… 날 용서치 마라… 이 죗값은….
다음 생… 그리고 그다음 생에서도 갚겠다.”
리워르는 이제는 완전히 피로 물들어
섬뜩하리만큼 붉어진 두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모습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하아….”
그제야 쾌락에서 벗어난 듯,
이요프가 입가에 가득한 침을 닦아내며 숨을 내쉬었다.
개운한 표정이 된 이요프가 생글거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때. 기분이. 아파? 짜릿해?”
“…내 절대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씹어 먹어주마.
결코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결코!!!!!!!!!
네놈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고 말 것이다!!!!”
리워르의 타는 두 눈이 이요프에게 닿았다.
“어우. 무서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니. 어우. 증말.”
이요프가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있잖아. 본인 처지를 까먹은 것 같은데….
넌 거기 묶여있고, 난 여기 이렇게 서 있어. 그치?
그런데 네가 날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날 죽이기는커녕 내게 닿기나 할 수는 있을까? 네가?”
“그게 가능할지는 내가 알려주지.”
“음?!”
낮고 굵직한 목소리에 이요프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황금빛 찬란한 토템을 들고 있는 타우한이 있었다.
“일어라. 파사의 빛이여.”
후우우웅.
“빌어먹을.”
이요프가 뭔가 수를 취하기도 전에
토템으로부터 솟구친 거대한 황금의 기운이
이요프를 향해 파도처럼 휘몰아쳐 다가오고 있었다.
이에 이요프가 식겁하며 손을 휘두르자,
그의 소매에서부터 짙고 어두운 색의 연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황금의 기운에게로 날아갔다.
쾅!!!!!
검은 연기와 황금의 기운이 맞부딪치자,
큰 굉음 소리와 함께 그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퍼져나간 타우한의 신성을 견디지 못했던 언데드들은
그대로 비명을 질러대며 그 자리에서 소멸되거나 녹아 사라졌다.
이러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은
이요프와 그가 뿜어낸 연기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끼야아아아아악!”
타우한의 빛에 연기는 빠르게 사라져갔고,
살아있기라도 한 것마냥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끄윽….”
빙글빙글 웃어대던 이요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얼굴 가득 어려 있던 웃음을 대신한 건
경직된 그의 얼굴 근육과 쉼 없이 흘러내리는 식은땀뿐이었다.
계속해서 연기를 내쏘고는 있었지만,
힘에 부치는 모양인지 그의 팔과 몸은 떨리고 있었다.
“죽은 이의 사념과 원념 뒤에 숨을 생각이냐. 이런 악독한….”
타우한의 음성에 노기가 어렸고,
그가 뿜어내는 황금의 빛은 더욱 강해졌다.
“끼야아아아악!!!!!!!”
“끄아악….”
더욱 강해진 빛에 검은 연기는 속수무책으로 녹아들었고,
이는 이요프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는지 그의 몸이 크게 떨렸다.
“쉽게 당해주진 않아. 영감!!!!!!”
이요프가 고함을 치자
그의 소매로부터 더욱 짙은 어둠을 간직한 연기들이
파도처럼 밀려 나와 타우한의 힘에 대항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잠시 잠깐 밀어냈을 뿐, 결국 녹아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빌어먹을 영감이….”
자신이 밀린다는 것이 분했던 것인지 이요프의 얼굴이 붉어졌다.
‘몸이… 움직인다!’
리워르에게 집중되어있던 힘이 분산되어서일까.
리워르는 자신을 옥죄던 힘이 점차 희미해져 감을 느꼈다.
‘움직여라. 움직여!!!’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힘을 주자,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며 조금씩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됐어. 조금만 더!!!’
콰득.
리워르가 안간힘을 써 주먹을 쥐자,
가위눌렸던 것이 확 풀려버린 것처럼
자신을 옥죄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콰당.
“커헉….”
리워르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꽤나 큰 소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타우한을 상대하느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딱히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이요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일어나!!!!!!’
이요프의 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리워르의 몸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리워르는 벌게진 눈을 한 채 일어서려 안간힘을 써댔다.
그러나 여전히 손만 까딱여질 뿐이었다.
‘일어나라!!!!!!!!!!!’
그의 간절함을 알아챈 것일까.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으며, 힘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됐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자,
리워르는 허리춤에 찬 단도를 꺼내 들었고
생각할 겨를도, 틈도 없이 이요프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요프는 그의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푸확.
이요프를 감싸고 있던 연기의 일부가
날카로운 칠흑의 창이 되어 리워르의 복부를 꿰뚫었으니까.
“커헉….”
창을 부여잡은 리워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리워르!!”
“내가… 저까짓 날붙이에 당할 거라 생각했나? 영감?”
이요프가 타우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이 노옴!!”
타우한의 노여움이 극에 달했을 때,
리워르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걱정은… 마시오… 타우한….
놈을… 죽이기 전까진… 절대 눈감지 않을 것이니.”
내장이 뒤집히는 고통 속에서도
리워르의 타오르는 눈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크고 강렬하게 타올랐다.
푸확!!!!!!!
“지금!!!!!!!!!”
“뭐야?!”
리워르가 박힌 창을 빼내며 소리쳤고
쏟아지는 피와 흘러내리는 내장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곧바로 이요프를 향해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으아아아아!!!!!!”
그가 죽을힘을 다해 휘두른 단도에는
때맞게 타우한이 부여한 신성의 힘이 깃들어 있었고
이요프의 정수리 한가운데에는 찬란한 빛 하나가 박히게 되었다.
콰득….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죽어라.”
단도를 꺾어 검신을 부러뜨린 리워르가 부들거리며 중얼거렸다.
털썩.
말을 마친 리워르는 제 소임을 다했다는 듯 그대로 쓰러져 내렸다.
“끄어어어어……ㄱ.”
고통에 이요프의 눈이 뒤집히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윽고 신성의 빛인 듯
그의 눈과 코, 입에서부터 밝고 환한 빛이 터져 나왔고
그를 이루고 있던 죽은 자들의 원혼들이 미친 듯 비명을 질러댔다.
“끼야아아아아악!!”
동시에 이요프의 온몸이 가뭄에 논 갈라지듯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졌고,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끄아아아아아악!!!!!!!!”
쾅!!!!!!!!
듣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의 몸이 유리가 터지듯 수천, 수만의 파편으로 터져나갔다.
그러자 이제껏 제 몸에 묶어 두었던,
죽은 이들의 사념과 원념이 그로부터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이런?!”
사특한 마기에 놀란 타우한이 빠르게 토템을 흔들었고,
황금빛 찬란한 막이 타우한과 리워르를 감싸고 돌았다.
…후우웅.
이요프가 완전히 소멸한 것이 맞는지,
게이트의 형태가 불안정하게 흔들려댔고 흐릿해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리워르!!!!!!!”
검은 연기가 사라지자,
타우한이 쓰러진 리워르를 향해 달려갔고
그를 감싸 안으며 할 수 있는 모든 회복의 술을 사용했다.
“커헉….”
이제야 숨이 도는 듯 리워르가 숨과 함께 피를 뱉었고,
타우한은 그런 리워르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죽었소?”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타우한에 물었다.
“…소멸했소. 내 눈으로 확인했소. 게이트도 사라졌고.”
“…다행이군… 적어도… 복수는 했으니.”
“말을 아끼시오. 회복에 집중해야 하니.”
타우한이 그의 복부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부족민을… 부탁하오. 타우한….”
리워르가 타우한의 손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조용히 하고 회복에나 전념하시오.”
타우한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회복의 술에 박차를 가했다.
“타우한… 나와… 약속해… 주시오… 저들을…구하겠다고….”
“걱정 마시오. 곧… 원군이 도착할 테니.”
“…원군이…라… 날… 도울… 이들이… 누가 있을…까….”
리워르가 떠오르는 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저 해를 보며… 승리를… 자축…하…고… 싶었…건마…ㄴ.”
그때였다.
뿌우우우우우….
어디선가 뿔피리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뿌우우우우 뿌우우우 뿌우우.
두두두두두….
이제는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한 뿔피리 소리와
코모코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리워르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자,
평원의 지평선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곧장 달려오고 있는
수천수만의 작은 점들이 보였다.
엄청난 흙먼지와 함께 몰려오는 작은 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형체가 점점 크고 선명해져갔고
희미하던 발굽 소리는 지축을 울릴 정도로 강해져갔다.
“아…!”
점의 정체를 확인한 리워르가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자욱하게 일었던 흙먼지가 걷히자,
그곳엔 수천에 달하는 정예 타우렌 전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렬 맨 앞에는 최북단 서리 눈꽃 부족부터,
최남단의 태양불꽃 부족까지 각 부족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모두가 단 하나 빠짐없이 바람에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