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 * *
“……음?”
순간적으로 느껴진 이질적 기운에 트롤이 뒤를 돌았다.
그러나 우거진 나무와 수풀 속에서는
올빼미일지 부엉이일지 모를 짐승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
아무런 기척도, 움직임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다.
“…착각인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은 트롤이 다시 뒤를 돌아
희미해져 가는 게이트를 향해 손을 올렸을 때였다.
훅.
바람 이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도끼 두 자루가 트롤의 양 팔목으로 향했고,
잘 벼려진 도끼의 날에 트롤의 양 팔목은 단번에 베어져 나갔다.
“끄아아악!!!!”
트롤이 고통스러운 고함과 함께 쓰러지자
그의 손목에서는 붉은 선혈이 솟구쳐 올랐고,
선명하던 게이트의 빛과 형상은 조금씩 흐려져 갔다.
쿵.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을 치는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서 뭔가가 빠르게 뜀박질 쳐 나왔다.
“…넌…?!”
“잘 가라. 주술사.”
몇십 미터는 족히 될 거리를
고작 몇 번의 달음박질로 좁혀버린 리워르가
저항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트롤의 머리를 도끼로 찍어 내렸다.
푸확.
“끄억….”
갑작스러운 리워르의 일격에
트롤은 이렇다 할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머리부터 배꼽에 이르기까지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고,
리워르의 몸에는 트롤의 피와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쿵.
“…싱겁군.”
리워르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조금의 저항은 할 줄 알았건만… 놈을 너무 높게 평가한 건가.’
찝찝함에 주위를 살피던 리워르가
별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자, 대기 중이던 타우렌들을 불러냈다.
“…모두 나오도록.”
리워르의 말에 숲에 흩어져 있던
타우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니나, 카파 너희 둘은 게이트의 흔적을 지워라. 빠를수록 좋다.”
“예.”
둘은 주술사인 듯 리워르의 말에 품에서 완드를 꺼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
리워르가 놀라 음성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음성은 게이트의 위에서 들려왔고,
그곳엔 분명 자신이 죽인 트롤이 앉아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의 음성과 표정에는 장난기와 익살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야. 전투의 기본도 몰라?
그리고 그런 도끼 따위로 날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입이 찢어질 듯 웃는 트롤의 웃음과
광기 어린 그의 눈을 보며 리워르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손끝에 감각이 느껴졌는데… 이게 무슨…?’
“네놈이 내려친 것은 내가 아니라,
나 대신 세워둔 꼭두각시 인형일 뿐이야.
그러게 상대를 잘 알아보고 덤볐어야지. 멍청하긴.”
리워르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의 말대로 거기에는 있어야 할 트롤 주술사가 아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트롤 하나가 누워 있었다.
“빌어먹을….”
“난 위대한 마신 투르바 님의 사자. 이요프 카미쉬야.
어떻게 불러도 좋지만 이왕이면 이요프라 불러주면 좋겠어.”
“….”
“원래 계획은 너희를 가볍게 제압하고
네놈들에게 위대하신 투르바 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였는데….”
“….”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저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칭찬해. 아주.
덕분에 간만에 재밌었어. 뭐 재미도 곧 끝나겠지만 말이야.
다른 부족 녀석들도 너만큼 버텨 주면 좋을 텐데. 후후.”
이요프가 어린아이를 칭찬하듯 웃으며 말했다.
‘역시… 우리 부족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나.’
이요프를 바라보는 리워르의 눈이 매서웠다.
“그렇게 눈이 빠져라 노려보면 무섭잖아. 응? 대화나 하자고.”
“…마기에 미친 자와 나눌 말은 없다.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네놈이 있던 곳으로 꺼져라.”
리워르가 그를 경계하며 낮고 단호히 대답했다.
“말 한마디에 물러갈 거였으면 오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살려줄지 말지 정하는 건 너 따위가 결정할 일이 아냐.”
“…원하는 게 뭐냐?”
“아~ 이제야 대화할 생각이 들었나 보네. 좋아.
무조건적인 항복과 위대하신 투르바 님의 종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너와 네놈의 하찮은 부족에게 원하는 전부야.”
“듣도 보도 못한 잡신 따위에게 엎드려 절할 성싶으냐.”
“자존심 따위가 목숨을 살려주진 않아.
처음이라 봐주는 거야. 두 번은 없어. 입조심해.”
온몸을 옥죄어오는 그의 살기에
리워르는 순간적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빌어먹을… 괴물이 아닌가.’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없음을 직감한 리워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
“항복해. 버텨봐야 애꿎은 네 부족민만 죽어 나갈 거야.
죽어도 일으켜서 다시 사용하면 그만이긴 한데. 효율이 떨어져.”
“….”
“더 저항해보고 싶으면 뭐, 동료를 부르든가.
아… 소문으로 듣자 하니 등을 맡길 만한 동료가… 없다던데…?”
이요프가 샐쭉 웃으며 중얼거렸다.
뿌드득
리워르는 도낏자루를 강하게 쥐며
그를 매섭게 노려볼 뿐, 별다른 답을 하지는 않았다.
“세상에 진짜인가 봐. 소문이 맞나 보네~
제 부족 하나조차 지킬 능력도, 힘도 없으면서
힘들 때 부를만한 친구조차도 하나 없어? 한심하군.”
“닥쳐라. 네놈 정도는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
리워르가 으르렁거리듯 답했다.
“항복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정말 멍청하네. 저항해봐야 소용없을 텐데…?”
이요프가 빙글빙글 웃으며 답했다.
“…그건 겪어보면 알 일이다. 주술사.”
리워르가 입술을 짓씹으며 답했다.
“살다 보면,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들이 있지.
이를테면… 네놈과 나 사이의 힘의 차이 같은 거?”
이요프가 능글맞게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붙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 붙어 봐도 안다니깐. 진짜 멍청하네.
우선, 귀찮은 저 두 녀석부터 끝내고 다시 대화하자. 잠깐만.”
이요프가 리워르의 뒤에서 뭔가를 꾸미는 듯
손을 꼼지락거리는 두 주술사를 보며 중얼거렸다.
삭.
그가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다 가로로 선을 긋자,
니나와 카파의 목에 얇고 붉은 선이 생겨났다.
“윽…?”
“니나…? 카파…?”
리워르의 말에 둘은 부들부들 떨 뿐, 답하지 못했다.
얇고 희미하던 붉은색 선은 점차 굵고 선명해졌고,
이내 선으로부터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니나!! 카파!!”
당황한 듯 리워르의 목소리가 커졌고,
그들에게 달려가 그들의 어깨를 붙잡자
둘의 머리가 기다렸다는 듯 떨어져 내렸다.
“니나!!!!!!!!!! 카파!!!!!!!!!!!!!!”
리워르가 그들을 끌어안았지만,
이미 둘의 숨은 끊어진 지 오래였다.
“아… 좋은 표정이네. 언제 봐도 즐거워.”
리워르의 절망 어린 얼굴을 본 이요프가
황홀하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 웃어 보였다.
“이 쓰레기 같은 자식이!!!!!”
분을 이기지 못한 젊은 타우렌 하나가
이요프를 향해 도끼를 집어 던지며 튀어 나갔다.
캉!!
도끼는 이요프에게 닿지도 못한 채
이요프가 친 한 겹의 쉴드에 튕겨져 나갔고,
젊은 타우렌 역시 그의 가벼운 손짓에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티아타!!!!!!!!!!!!!!!!”
리워르의 고함에 이요프는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절망에 찬 울부짖음은 언제나 날 즐겁게 하지.
얼마든 계속해봐. 어차피 죽는 건 네놈들이지 내가 아냐.”
“…모두 물러나라!”
리워르가 남은 다섯의 타우렌들을 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물러나!!!!! 어서!!”
“아빠가 물러나라 하시면 물러나야지. 꼬맹이.”
이요프가 윙크를 하며 중얼거렸다.
리워르의 고함에 나머지 타우렌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옳지. 그래야지. 잘했어. 후후.”
이요프가 타우렌들을 보며 씩 웃었다.
“…진짜로 원하는 게 뭐냐.”
“타우렌들 머리 나쁘다는 말 진짜인가 보네.
아까 전에 무조건적인 항복과 복종이라 말했잖아.
벌써 까먹은 거야? 정말 멍청한 애네. 얘?”
이요프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다. 네놈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만약 그것을 원했더라면… 압도적 물량으로 밀어붙였겠지.
지금처럼 나와 대화를 하려 들지도 않았을 테고.”
“…하. 참.”
이요프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금세 얼굴색을 바꾸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타우렌 전부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나 보네.
그건 또 어떻게 알아본 거래? 제법 날카로운데?”
“….”
“맞아. 난 네가 쉽게 항복하길 바라지 않아.
사실 더 치열하게 싸우고 고통받고 울고 슬퍼하길 바라.”
“….”
“또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스스로를 욕하길 바라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그걸 보는 게 내 취미이자 특기고 내 삶의 유일한 낙이거든.”
“…이런 짐승만도 못한 변태 새끼가….”
도끼를 쥔 리워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 너는 그렇다 쳐도 저쪽은 괜찮겠어?
지금쯤이면, 너희 쪽에 물자 다 떨어졌을걸?”
“…뭐?”
리워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잖아. 앞뒤 재지 않고 저렇게 막 쏴대는데
포탄이며, 돌이며, 통나무 화살이 남아나겠어? 안 그래?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단단한 목책도 부서져 내릴 거야~”
‘아뿔싸.’
리워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치열하게 들려오던 포탄과 바위소리가
이제는 점점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좌측으로 우회했던 녀석들도 슬슬 지쳤을걸?
조만간 잡혀서 구울들이나 좀비들에게 살점을 뜯기겠지.”
“….”
“자, 이제 넌 어떻게 할래?”
“….”
“설마 재미없게 여기서 포기하고 항복할 거야??
네 뒤에 죽은 애들 복수 안 해? 좀 더 발버둥 쳐보지 왜.”
슥.
“카인. 전사들을 데리고 가 리한에게 전해라.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뒤를 부탁한다고 전해.”
리워르가 도끼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족장!!”
카인이라 불린 타우렌이 놀라 소리쳤다.
“호오….”
이에 이요프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리워르를 바라보며 계속해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신… 저놈만은 내가 죽이고 간다고도 전해라.”
도끼를 잡아 쥔 리워르의 눈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가!!!!”
빠르게 빠져나가는 전사들을 보면서도
이요프는 무슨 생각인지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 * *
[주군. 리워르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
한성의 머릿속으로 벨루몬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슬슬 다음 단계를 시작해야겠군.]
[다른 부족들의 상황은 어때? 괜찮아?]
[단 하나 빠짐없이 모두가 시련을 이겨냈사옵니다.]
[그리고?]
한성이 씩 웃으며 물었다.
[…주군께서 안배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나이다.]
[그들 모두가 타우한의 부름에 응해 이곳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타우한이 소리친 보람이 있군.]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이 생겼나 보네.]
한성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녀석들이 이동하기에는 꽤 거리가 될 텐데?]
[원시적 수준이지만 녀석들에게도 워프 장치가 있었나이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불안정한 상태이긴 했으나,]
[작동에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다만, 워프의 수준이 미천하고,]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이가 없기에]
[장거리 이동은 아무래도 힘들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흠… 그건 좀 문제가 되겠군.]
[허나, 모든 부족에 워프 장치가 설치되어 있으니,]
[인근 부족으로 워프하며 거리를 빠르게 줄일 수는 있습니다.]
[시간이 걸릴 뿐, 이동에는 문제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그럼, 슬슬 극적인 연출을 만들어줘야겠군.]
한성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타우한!]
[부르셨소? 주군.]
[리한과 전사들이 슬슬 밖으로 나갈 거다.]
[너도 거기에 동행해 연기 좀 하다가 리워르에게로 가도록.]
[…알겠소.]
[벨루몬. 녀석들이 이곳까지 도착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지금의 속도로 봐선 아마 1시간이면 도착할 성싶습니다.]
[좋아. 그럼 클라이맥스를 준비해 볼까.]
흡족하다는 듯한 얼굴로 웃는 한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