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 * *
“수고하셨어요. 주군.”
“아니, 수고한 건 내가 아니라 너다.”
한성이 맥이 빠진 듯한 티에라를 바라보며 답했다.
모든 엘프들이 빠져나간 회의장에는
한성과 티에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뭘요… 주군께 험한 모습을 보이게 돼서 오히려 죄송한걸요.”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예견된 수순이었으니까.”
“…그런가요.”
“환부가 썩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조금은 고통스럽더라도 도려내 새살이 돋게 하는 게 낫다.”
“…그렇긴 하지만….”
“대놓고 터뜨리지 않았더라면,
뒤에서 알게 모르게 뭔가 작당을 했을 거다.
다가올 전쟁에 전력을 다 모아도 모자랄 판에,
그런 일들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것보단 이게 나아.
그러니 신경을 쓰지도, 마음에 두지도 않아도 된다.”
“…네.”
티에라가 힘없이 대답했다.
풀이 죽은 그녀를 바라보던 한성이 씩 웃으며 물었다.
“테낙스가 마음에 걸리나.”
“…네.”
“꽤나 충격이 크긴 했을 거다.
날 부정하려 함으로써 날 선택한 세계수를 부정한 꼴이 됐으니까.”
“…그럴 거예요.”
“게다가 자존심도 꽤나 상했겠지.
엘프들이 모인 자리에서 형편없이 제압당했고,
자신을 따르던 자들에게 버림당하기까지 했으니까.”
“…아마도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일족과 종족을 위하는 그의 마음이 진짜라면, 괜찮을 거다.”
“그럴까요…?”
티에라가 그의 자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고집스럽고 완고해 보이긴 했지만 멍청해 보이진 않았다.”
“….”
“그도 자존심과 명예 그리고 종족과 일족의 생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거다.”
“…그렇긴 하지만요.”
“설령 그가 제 자존심과 명예를 더 중요시 여겨
연합군에서 나간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기까지가 그가 가진 그릇의 한계라는 뜻일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말도록.”
“네.”
“그래.”
“며칠 내로 각 일족들이 보유한 전사들의 현황과
무기들 그리고 전력 정도를 파악 후 전시 편제를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직을 개편한 다음, 다시 보고 드릴게요.
또 말씀하신 대로 이티카와 테낙스를 필두로 연합군을 꾸릴게요.”
“그래. 수고해줘.”
“네.”
“별일 있으면 연락하도록.”
“네. 주군.”
한성이 말과 함께 일그러진 공간 안으로 사라졌다.
* * *
“남부 곡창지대의 반절이 사라졌소.
평소 생산하던 곡물의 양이 반의반으로 줄었고.”
“동부 벌목지도 마찬가지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돼 버렸소.
안에서 뭔가를 만들기는 하는지 소리는 들리는데,
접근을 허용치 않으니 도대체 뭘 만드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남동부 끝단 늪지대도… 모두 점령당했소.
그곳에 살던 독화살 개구리며, 포이즌 바이퍼,
늪의 주인인 두꺼비 선생까지 모조리 잡혀갔소.”
“검은 머리 늑대 부족 또한… 멸족당했소.
그를 도우러 갔던 우리 부족의 전사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타우한 부족장이 전에 한 말처럼,
녀석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소.”
성인 장정 이삼백이 들어가도 충분할 크기의 막사에는
타우한 수십이 앉아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덩치가 워낙 커서인지
겨우 수십밖에 되지 않는 숫자였음에도
그들에게 막사는 꽤나 좁고 불편해 보였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소.
이대로 가만두었다간 일은 더욱 커질 것이고,
우리가 발을 디딜 곳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며
우리 부족뿐 아니라 그대들의 부족민들 모두 위험해질 것이오.”
“나 또한 그대와 같은 생각이오.
지금 당장은… 세계수의 가호가 있으니
놈들이 전면에 나서 설치고 다니지는 못하겠지만
결국에는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해서 무너지게 될 것이오.”
“…소문에는 북쪽 검은 어금니 부족 엘프들이
놈들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멸족했다고 합디다.
그들이 지켜내려 했던 세계수의 뿌리 일부도 지켜내지 못했고.”
“나 또한 들은 이야기요. 소문이 아닌 것 같더군.”
“…하. 세상이 어찌 될는지.”
“오늘 엘프들도 종족 회합을 가지기로 했다더군.
시간이 꽤 지났으니 이미 이야기가 끝났을지도 모르겠소.
모르긴 해도… 아마 전쟁을 준비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갔겠지.”
“…후….”
막사 안에 침묵이 가득했다.
“오크들은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하더이다.”
“…빠르군.”
“주술사 바두르를 대족장의 자리에 앉히고,
그 자리를 노리던 후보들을 힘으로 굴복시킨 뒤,
그들을 대장군의 자리에 앉혀 기강을 바로잡았다더군.”
“…오크들치고는 꽤나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싶었더니 과연 그 이유 때문이었나.”
“그나저나 바두르에게 그런 힘이 있었나?
사이우스가 탐욕스럽고 아둔한 자이기는 해도,
단순한 무력만으로는 오크들 중 강한 수준이었던 걸로 아는데.”
한 타우렌이 놀라며 중얼거렸다.
“바두르가 아니오.”
“…그럼?”
“동부 지대를 주름잡던 하이오크 칸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더이다.”
“…오크들의 모든 불만을 잠재운 데다….
대족장의 자리에 자신이 앉지 않고 다른 이를 세웠다라….”
타우렌들의 수군거렸다.
“그뿐이 아니오. 사이우스가 각 부족에 걷던
모든 세금과 공납들을 모두 폐지했다고도 들었소.”
“…허… 그런 일이 있었소?”
“놀랄 일은 더 있소. 사냥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식량 창고에는 식량이 그득하다고 하더군.”
“…그들의 먹성에 그게 가능하오?
이 세계의 마물들 모두를 먹어치워도 모자랄 것인데?”
“어디까지나 들은 소문이오만, 요 며칠 동안
그들의 진영 하늘에서 식량이 쏟아져 내렸다더군.”
“…뭐요?!”
모든 타우렌들이 놀라 소리쳤다.
“그리고 그 식량이 쏟아져 내릴 때,
망자의 왕, 벨루몬이 그 자리에 있었다더군….”
“…허.”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뒤에
‘그’가 있다고 들었소만… 사실이오?”
타우렌 하나의 말에 타우렌들의 눈이 타우한에게로 가 닿았다.
“…맞소. 모든 것이 주군께서 뜻하신 바요.”
타우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칸도, 나도, 벨루몬, 티에라도 모두 그분을 따르오.”
“…참으로 대단한 자로군.”
“…그러게나 말이오.”
“우리도 하루빨리 힘을 모읍시다.”
“그럽시다.”
타우렌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모으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한 타우렌만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리워르. 당신은 왜 말이 없소?”
타우렌 하나가 가장 큰 덩치를 가진 타우렌을 보며 물었다.
“…나와는 별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싶어 그냥 듣고만 있었소.”
리워르가 따분하다는 듯한 얼굴로 귀를 파며 중얼거렸다.
“…뭐요?”
“후.”
타우렌들이 발끈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고 귀를 파던 손을 불 뿐이었다.
“뭐… 물론 우리 형제님들의 부족민들이 죽었고,
곡물이며, 주거지며 등등 잃은 것은 나도 안타깝소만….
그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힘을 빌려줘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소.”
“지금 뭐라 그랬소…? 빌려줘…?”
쾅!
타우렌 하나가 콧김을 내뿜으며 상을 내리쳤고,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한 나무판자는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
“이거 참… 우습지도 않군.”
리워르가 자신에게로 튄 나무 조각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한 번은 참아 주겠소. 허나, 두 번은 없소.
마신의 군대가 아니라 동족의 손에 당하고 싶지 않다면….
형제님께서는 행동거지를 똑바로 하는 것이 신상에 좋을 거요.”
“…뭐요?!”
“언제부터 우리 타우렌들이 자신의 부족뿐 아니라
다른 부족들의 안녕과 평화까지 신경 쓰기 시작한 거요?
내 기억에는 이제껏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
“무슨 소릴 하려는 건가.”
“기억할지 모르겠군.”
“…?”
“내가 우리 부족의 장이 되었던 그해,
각 부족을 돌며 인사를 전했던 그때를 기억들 하시오?”
“…기억하오. 그런데 왜?”
“…그해 빌어먹게도 큰 기근이 있었지. 아주… 끔찍했던….”
“기근…? 십 년 전 그 대기근을 말하는 건가.”
“그렇소. 십여 해 전의 그 기근을 말하는 것이오.
비는 내리지 않았으며, 땅은 말라갔고, 나무와 풀은 죽어갔지.”
“….”
“기근이 끝날 생각을 하지 않고 점점 길어지자,
대지 위에는 생명의 흔적이 점차 사라져가기 시작했소.”
“….”
“많은 부족민들이 힘들어했고, 지쳐갔소.”
“….”
“이를 버티다 못한 수십의 새끼들은 결국… 죽게 됐고,
이에 부모들은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기는커녕
그들을 먹어 제 굶주림을 해결하려는 극단적 시도까지 했었소.”
“….”
“그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소.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구걸밖에 없었소.”
“….”
“그래서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구걸을 하기로 했소.
부족을 하나하나 돌며 식량을 구걸하러 다녔지.”
“….”
“그때… 내게 도움을 준 이가 있었소?
있었다면 부디 어디 한번 말씀들 해보시오.”
“….”
“당연히 없겠지.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거절했으니까.”
리워르가 타우한을 제외한 타우렌들 모두를
하나하나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크…크흠… 그때는… 다… 힘들었….”
“헛소리!”
리워르의 고함이 천막을 가득 채웠다.
“곡식 창고에 곡식이 그득 들어찼었어도….
곡식의 아랫부분이 썩고 벌레 먹어 버리는 한이 있었어도….
나중을 위한 대비라 말하며 나에겐 단 한 줌도 주지 않았었지.”
“….”
“피둥피둥 살이 찌고, 기름으로 반질반질한 털을 가진 주제에
우리도 없다, 우리도 부족하다. 많은 이들이 굶었다 거짓말하더군.”
리워르의 목소리가 점차 커져갔다.
“그러나 타우한 부족장은 달랐소.
그는 내게 자신의 곡식을 아낌없이 나눠주었소.
다른 부족과 다르게 그들의 부족조차도 궁핍한 상황이었음에도,
그와 그의 부족은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지.”
“….”
“그뿐인 줄 아시오? 식량을 나눠준 것도 모자라,
우리 부족에까지 직접 손수레를 끌고 와 식량을 운반해주었고,
그들에게 죽을 쒀 먹여주고 병자를 치료해주었소.”
“….”
“그러나 당신들은 아니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뭐? 힘을 합쳐? 염치가 있는 것인가 싶군.”
“…크흠….”
“걸레짝처럼 찢어져 너덜거렸던 내 자존심과
그날에 느꼈던 치욕과 굴욕은… 난 아직도 잊지 못하오.
아니,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잊지 않을 것이오. 절대.”
“….”
“그래도 그대들의 그 매몰찬 배려 덕분에,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 있었고 강인한 전사들을 길러내
우리 부족을 타우렌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으로 만들 수 있었지.
그것에 대해선 진심으로 감사하오.”
“…리워르….”
타우한이 슬픈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만약 타우한 족장이 내게 도와 달라 말을 한다면,
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소.
그것이 병력이 되었든, 먹고 마실 물자가 되었든 뭐든!
하지만 그대들에게는 아니오.”
“….”
“당신들 모두가 죽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것이오.”
“….”
“양심이 있거든. 내게 도움을 구하지 마시오.”
리워르가 콧김을 내뿜으며 천막을 빠져나갔다.
* * *
“그래서… 그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타우렌들의 규합을 마쳤다?”
타우한을 보며 한성이 중얼거렸다.
“그렇소. 그가 내게는 도움을 준다 말했지만,
그것이 다른 타우렌들과의 규합이라는 걸 알면 그만둘 거요.”
“왜 굳이 그에게 목을 매는 거지?”
“그가 가진 전력이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오.”
“…그래?”
“확신하기는 어려우나, 그에게 속한 전사들의 수가
모든 타우렌 부족들이 가진 전사들의 수와 맞먹을 거요.
전사를 제외한 나머지 부족민들까지 전쟁에 동원한다면….
그 수는 꽤나 대단할 테지.”
“흠….”
“게다가 단순히 수만 많은 것도 아니고,
전사로서 그들의 능력과 무력도 출중한 편이오.
모르긴 해도 칸의 부족과 겨루어도 빠지진 않을 거요.”
“그래?”
“이유는 또 있소. 그의 부족에는 나만큼의 수준은 아니지만,
회복과 강화 마법을 쓸 수 있는 주술사들이 꽤나 많이 있소.
그들이 우리 연합군에 합류하게 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요.”
“확실히 합류한다면 든든하긴 하겠군.”
“그렇소.”
“그런데 여기서 질문 하나.”
“말씀하시오.”
“예전에 저 녀석에게 도움을 구했더라면,
더 빨리 약속의 토템을 되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그가 내게 도움을 주겠다 말은 했었소.”
“…그런데?”
“별것 아닌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저자에게 그런 큰 부담을 지우기는 싫었소.
싸움이 일면 전쟁으로 일이 커지게 될 것이고,
저들의 부족은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오. 그건 싫었소.”
“…흠.”
“또한, 전투 도중 토템이 부서지게 된다든지,
혹은 이 토템을 무기 삼아 전처럼 협박할까 싶어 거절했소.
내 손으로 직접 그 토템을 되찾아 주고 싶기도 했고.”
“예나 지금이나 고지식한 건 똑같군.”
“무후후. 그렇소?”
한성의 말에 타우한이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주군….”
“음?”
“전력도 전력이지만… 그에게도 동료라는 존재의 가치를….
그리고 내가 느꼈던 그 소중한 감정들을 느끼게 해주고 싶소.
그를 회유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소? 부디… 지혜를 빌려주시오.”
“방법이야… 많지.”
한성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