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 * *
“다들 모이신 것 같군요.”
게이트를 빠져나온 한성이 좌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셨습니까.”
이디아가 한성을 보며 인사했다.
“간만이군. 잘 지냈나.”
“예. 덕분에.”
“…누구냐. 넌.”
테낙스가 한성을 바라보며 날카로이 외쳤다.
“누구일 것 같습니까?”
한성이 씩 웃으며 답했다.
“대답해라. 목이 잘리고 싶지 않다면.”
한성을 향해 테낙스가 칼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콰각.
[한 번만 더 주군께 위해를 가하려 들었다간]
[네놈의 뼈와 살을 분리해 짐승들에게 줄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경고만 하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니,]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한성의 그림자에서부터 솟아오른 레그나토르가
테낙스의 칼을 한 손으로 종잇장 구기듯 구기며 중얼거렸다.
“…다… 당신은?!”
테낙스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고 장내는 어수선해졌다.
딱.
쿵.
“커헉!”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테낙스가
무언가 무거운 것에 짓눌린 듯 빠르게 땅에 고개를 처박았다.
“쯧… 쓸만한 녀석이 들어온 줄 알았거늘,
레그나토르 너마저 날 실망시킬 줄은 몰랐군.”
게이트 너머에서 벨루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라?]
“제 주제도 모르고 주군께 칼을 들이민 멍청한 녀석이다.
당장이라도 쳐 죽여 주군의 위엄을 내보여도 모자랄 판에….
경고 따위의 말랑말랑한 말만을 내뱉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
벨루몬이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레그나토르를 보며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낮춰라. 주군께서 자리하고 계시니.]
레그나토르가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정녕 주군의 검이라면,
무지렁이 같은 저따위 하찮은 놈들이
주군을 욕보이고 있을 때 가만히 있어선 아니 되었다.
놈의 손가락이라도 잘라 그 죄를 물었어야 했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놈의 짧은 생각일 뿐이다.]
“뭣이?”
[주군께서는 패도(悖道)를 걷는 분이 아니시다.]
[세상 모든 자들을 품으시려는 어버이 같은 분이시지.]
[신하 된 자로서 주군의 뜻과 엇나가는 짓을 할 성싶으냐?]
[게다가 놈은 주군께 위해가 될 정도의 무력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나서 주군의 앞을 막아서는 건]
[총애를 얻기 위해 아부나 부리는 간신들이나 할 법한 짓이지.]
“…죽고 싶은 건가?”
[네놈 따위가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럴 줄 알았다. 어휴….”
한성이 투닥거리며 으르렁대는 둘을 보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레그나토르와 벨루몬을 알아본 것인지 좌중이 시끄러웠다.
“그만.”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한성의 말에 둘은 짠 것처럼 높였던 언성을 낮추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에게 피워 올린 살기를 감추었다.
한성이 손짓을 하자 테낙스를 짓누르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어나시오. 테낙스.”
“허억… 허억… 허억….”
한성의 말에 비틀거리며 테낙스가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런 충격 때문인지,
그의 코뼈는 주저앉거나, 엉망으로 휘어져 있었고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는 모조리 부서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아픔보다도 충격 때문인지
고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피범벅이 된 얼굴로 한성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강단이 있는 놈이군. 마음에 들어.
벨루몬이 너무 강한 것일 뿐 녀석 또한
전사로서 꽤 상당한 힘과 능력을 가진 편이기도 하고.’
한성의 눈동자로 마력이 스쳐지나갔다.
스킬 ‘신의 눈’이리라.
“첫 인사가 거칠었습니다. 제 동료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테낙스를 보며 한성이 중얼거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아마 티에라에게 말씀을 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허억… 허억….”
‘저자가 바로….’
테낙스의 눈이 흔들렸다.
“타우한. 그를 치료해 주도록.”
“알겠소. 주군.”
게이트에서 몸을 드러낸 타우한이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뭔가를 중얼거렸고,
엉망이 되었던 그의 몰골은 금세 제 모습을 되찾았다.
“됐소. 무후후.”
타우한이 마물 좋은(?) 웃음을 하며
다 됐다는 듯 그의 등을 팡 하고 쳤다.
“큭….”
자신이 그리도 혐오하던 이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인지 테낙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날 욕하는 건 조금도 상관없습니다.
또, 당신이 일족과 종족을 생각하는 마음도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내 가족들에게 실례를 범하지는 마십시오.
그대의 일족과 종족이 소중하듯 이들도 내겐 소중한 자들이니까.”
“이런 건방진…….”
“뭐라…?”
벨루몬의 안광이 팍하고 타오르자,
그 기세에 놀란 테낙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벨루몬의 살기가 짙어지자 한성은 손을 들어 올렸고,
이에 찐득하던 그의 살기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놔라!”
자신을 부축하려는 엘프들을 뿌리친 테낙스가 소리쳤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는 것이냐?!”
“푸른 노래 일족의 수장, 테낙스… 그게 당신 아닙니까?”
티에라가 모습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항상 웃는 낯이던 그녀의 얼굴이 오늘은 어쩐지 차가웠다.
“…티에라 님…?”
테낙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 저번 종족 회합 때 경고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추잡하고 난폭한 존재들이 아니며,
내 가족들이니 실례될 만한 말과 행동은 조금도 하지 말라고.”
그를 바라보는 티에라의 눈이 날카로웠다.
“티에라 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영광스럽고 고귀한 당신께서
어떻게 그따위 망령된 말씀을 입에 올리신다는 말입니까?
당신의 가족은 우리이지, 저 흉물스러운 짐승들이 아닙니다.”
테낙스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마세요. 테낙스!!”
티에라의 언성이 높아졌다.
“혹시 저자가 힘으로 당신을 겁박이라도 한 것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우리 모든 엘프들이 나서 저자의 목을….”
테낙스가 한성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벨루몬이 손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철컥.
순식간에 테낙스의 머리에 티에라의 권총이 겨누어졌다.
“…티에라 님? 이게… 무슨…?!”
“거기서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머리에 구멍을 내주마. 테낙스.”
서릿발같이 차가운 그녀의 태도와 말에
회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렸고,
테낙스 또한 충격이 컸던 모양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대에게 나의 선택을 이해하라 한 적 없고,
받아들이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허나 존중은 하라 했다.”
“….”
티에라가 테낙스를 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나를 비롯한 우리 일족 전원은,
주군께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그러니 네놈의 그 더러운 말과 행동들로 그분을 더럽히지 마라.”
“….”
“또한 이들은 내게 있어 내 일족만큼이나 소중한 이들이며,
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자들이다. 그러니 함부로 말하지도 마라.”
“….”
“일족과 종족의 번영, 안위에 대한
그대의 마음이 얼마나 지극한지는 나도 안다.
그렇기에 한 번쯤은 찬찬히 생각해보길 진심으로 소원한다.
죽음 앞에 그까짓 명예가 무슨 소용이며, 종족이 무슨 소용인지.”
“….”
“이런 나와 내 동료들을 믿을 수 없고
일족들의 목숨보다 그깟 명예가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면….
그래서 정히 그대가 떠나야겠다면… 난 잡지도, 말리지도 않겠다.”
“….”
“허나 잘 선택하길 바란다. 힘을 합해 당면한 적을 칠 것인지,
아니면 그 고귀하고 잘난 엘프족만의 힘을 고집하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그대의 일족 모두를
적의 아가리에 가져다 바칠 것인지를.”
“….”
“알아들었나. 테낙스.”
테낙스가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악.
그와 동시에 티에라의 권총은
한 줌의 마력이 되어 그녀의 팔찌로 스며들었다.
“…좋지 않은 모습 보여드려 죄송해요. 주군.”
“괜찮다.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리된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군.”
한성이 비어 있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답했다.
“앉으시죠.”
한성의 말에 일어서 있던 엘프들이 홀린 듯 자리에 앉았다.
“이미 티에라에게 전후 사정은 다 들었을 것으로 압니다.”
“그렇습니다.”
노년의 엘프 하나가 수염을 매만지며 답했다.
“우리의 적이 누군지, 무엇을 하려 하는지도 들으셨을 겁니다.”
“…예. 그렇습니다.”
엘프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면하게 될 적은… 강할 겁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수준의 힘을 가졌을 것이며,
살아오면서 본 모든 것보다 더 많은 적을 보게 될 겁니다.”
“….”
“또 겪어본 적 없는 슬픔과 아픔을 느끼게 될 것이고,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의 시체를 안고 울게 될지도 모르며,
여러분이 나고 자란 마을과 봐왔던 모든 것들이 타오를지도 모르죠.”
“….”
“게다가 아직 그들이 가진 전력 또한 제대로 밝혀진 바 없고,
그들이 언제 움직일지, 얼마나 큰 전력으로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
“저조차도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고,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바친다 해도 힘들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신합니다.”
한성이 엘프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아픔이 두려워 이들을 내버려 두거나 피하려고만 한다면,
여러분이 지키고자 하는 그 모든 것들은 무너져 내릴 겁니다.”
“….”
“그러니 함께 발버둥 칩시다.”
“….”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칩시다.”
“….”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그 모든 것들을 지켜냅시다.”
한성의 말이 끝나고 회의장에는 한참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고,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침묵이 계속되던 그때,
노년의 엘프 하나가 손을 들며 중얼거렸다.
“…초원 바람의 부족은 그대와 함께하겠습니다.”
“…이티카 님….”
티에라가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전… 티에라 님의 선택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분의 말이 진심임 또한 믿습니다.”
이티카라 불린 노년의 엘프의 눈은 깊고 또 맑아 보였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고맙습니다.”
“딱히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을 처음 본 그 순간, 답은 나와 있었으니까.”
“…그렇습니까?”
이티카의 말에 한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그대의 힘이 짙어 잘 느껴지진 않지만,
그대에게선 분명 세계수님의 힘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분께서 그대에게 내려주신 은총이겠지요.”
이티카의 눈이 한성의 손에 끼워진 반지로 향했다.
“…예. 맞습니다.”
“뭐…?”
한성의 대답에 테낙스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또, 당신에게선 숲의 정기(精氣)가 느껴집니다.
세계수와 늘 함께하는 우리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것이 말이지요.”
‘숲의 정기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요?”
“세계수께서 당신과 함께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만큼 그대를 신뢰하고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이티카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세계수께서 선택한 당신이십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그렇습니까.”
“예. 그렇기에 당신과 함께하려 합니다.
저희 일족이 가진 힘이 작고 미천한 탓에,
그대에게 큰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그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부디 현명하고 올바르게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오크들과의 전쟁에서 지휘관의 역할을 하신
이티카 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티에라가 그의 말을 받으며 답했다.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지략가였나.’
티에라의 말에 한성의 눈이 반짝였다.
“누가 되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먼 훗날 엘프들은 이티카 님의 그 결단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그 용기를 가슴에 새길 것입니다.”
“곧 죽을 늙은이에게 칭찬을 하시다니요. 낯 뜨겁습니다.”
“용기는 젊은 엘프들 못지않으십니다.”
“그런가요? 하하하.”
티에라의 말에 이티카가 웃으며 답했다.
이티카의 말이 엘프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엘프들이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저희 붉은 나래 부족 또한 그대와 함께하겠습니다.”
“…저희 돌개바람 부족….”
자리한 모든 엘프들의 지지가 끝나고
남은 것은 테낙스와 그를 지지하던 몇몇의 엘프들뿐이었다.
“…저희 검은 모래 부족 또한 그대와 함께하겠습니다.”
테낙스의 눈치를 보던 그 몇몇의 엘프들 또한
마음이 움직였던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지지를 선언했다.
“…함께해 주지 않겠나. 테낙스.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네.”
이티카가 주름진 웃음을 지으며 테낙스를 향해 말했고,
테낙스는 그런 이티카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푸른 노래 일족 또한… 그대와 함께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