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 * *
“일단 시켜서 하기는 했는데, 왜 이런 방법을 택한 거요?
그냥 형우 씨가 저기 도달했을 때 그때, 그 전격으로 조지거나
마비시킨 뒤에 깃발만 싹 빼 왔으면 그대로 경기 끝났을 것 같은데.
애들 뭐 별 힘도 못 쓰고 그냥 맥없이 당하고만 있더만. 뭘.”
성용이 투덜거렸다.
“아마 그건 힘들었을 겁니다.”
형우가 웃으며 답했다.
“왜.”
“제가 사용한 마법은 위력은 꽤나 강하나,
마력이 별로 들지 않는 저급한 수준의 것입니다.
지속시간도 굉장히 짧고, 고통도 순간적이며 일시적일 뿐이죠.
마물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놓는 위협용 마법 정도랄까요.”
“그런데?”
“만약 고위급의 마법을 저들에게 사용하려고 했더라면,
저들도 마력의 흐름을 느꼈을 것이고 필사적으로 대응했을 겁니다.
지금처럼 무방비 상태에서 절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구요.
어쩌면 그들에게 제가 당했을 수도 있겠죠.”
“그런가.”
“게다가 저희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잖습니까.
저와 선우 씨가 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모두 프라임 길드장께
길을 부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눈속임이었을 뿐입니다.”
“그래.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그거야. 왜 길을 다 부수냐고.”
“그게 우리에게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왜?”
“일본 팀은 탱커 하나, 전사 계열의 헌터가 둘,
저격용 소총을 사용하는 원거리 공격형 헌터가 하나,
버퍼 하나, 힐러 하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뭐. 그렇지.”
“저들에게는, 워프나 텔레포트 같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 계열의 헌터가 없다는 뜻이죠.”
“아.”
“그러니 길이 없으면 이곳에 닿지도 못하게 될뿐더러,
저희의 측면이나 후방을 점해 양동 작전을 펼 수도 없습니다.”
“흠… 그렇군.”
“그 무엇보다 이런 작전을 편 가장 큰 이유는
저들은 여섯이지만 우린 다섯입니다. 부담이 있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우린 한 번에 한 명만 상대하면 됩니다.
효율적이고 편하게 말입니다.”
“…음.”
“이것으로 저들이 우리를 공격할만한 수단은
이제 원거리 딜러 하나밖에는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오?”
“맞습니다만, 아닙니다.”
“뭔 소리요? 그건 또.”
“헝가리전 때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
“예. 맞습니다. 여차하면 대단위 마법으로 저들의 주의를 끌고,
프라임 길드장께서 알파 길드장을 던져 후방을 점하게 한 뒤,
유유히 깃발을 빼 오면 그만입니다.”
“아주… 현명해. 계획이 다 있구만. 아주? 으잉?
저거 봐 저거. 당황해가지고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거다. 캬하하.”
성용이 눈을 찌푸려 점처럼 보이는
일본 팀들을 바라보고는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별거 아닙니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씩 웃는 성용에 형우도 마주 웃어 보였다.
“70점 드리겠습니다.”
바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성이 중얼거렸다.
“뭔 소리야?”
성용이 대답했다.
“좋은 작전이었습니다만, 완벽하진 못했습니다.”
“…엉?”
“그 정도 생각은 저쪽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길이 없으면 공격하기 힘든 건 우리도 마찬가지고
길 따위쯤이야 만들면 그만입니다.”
“…뭐?”
“저기 보세요.”
“…?”
한성이 턱으로 가리킨 곳에는 자신이 서 있는 대지를
네모반듯하게 자르고 있는 마키토와 이를 옮기는 사사키가 있었다.
“…저건…?”
“저쪽에 전략전술에 뛰어난 자가 있나 봅니다.”
“….”
“이쪽의 전략이 모두 간파당한 것 같습니다.
저쪽은 이를 파훼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짠 모양이고요.
그것도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끙….”
한성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
자신만만해하던 형우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아마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잘라낸 큐브에 마력을 주입해 단단하게 만든 뒤,
그것을 용암에다 던져 징검다리를 만들어 낼 겁니다.
이동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말입니다.”
쿵!
한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사키가 큐브를 던져댔다.
용암에 떨어져 내린 수십 개의 큐브들은 꽤나 견고해 보였다.
용암에 녹지도, 무너지지도 않았고
굳건하게 박혀 다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큐브의 색은 그들이 딛고 있는
지반의 색인 적갈색과 다르게 검고 어두운 색이었다.
한성의 말처럼 마력을 주입해 경화시킨 것이리라.
“크윽….”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요. 곧 건너올 겁니다.”
“…빌어먹을.”
한성의 말에 형우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조급해하지 말아요. 까짓거 막아내면 되니까.”
애림이 형우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너무 그리 걱정 마슈.
거 형우 씨가 새로운 작전 구상해 낼 때까지
나랑 선우 씨가 나가서 막아내고 있으면 될 일이지. 뭘.”
성용이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호기롭게 외쳤다.
“맞습니다. 단순히 막는 것이라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
선우가 성용의 말에 동의했고,
침묵하던 재권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 뒤, 형우가 입을 열었다.
“…후우… 좋습니다. 변경된 작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짧은 사이에 생각을 마쳤는지, 형우의 눈이 빛났다.
* * *
“…대단하군. 그 짧은 시간 안에
우리 진영을 뒤흔든 저놈들의 머리나,
저놈들의 생각이 뭔지를 읽어낸 너의 머리나.”
마키토가 요코하마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껏 상대해 온 멍청이들과는 확실히… 다른 듯합니다.”
요코하마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물어뜯으며 대답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렇지 않나.”
“예.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코하마가 중얼거렸다.
“해답은?”
“다리를 놓을 겁니다.”
“음?”
“다리가 없다면 다시 만들면 그만입니다.
우리에겐 다리를 재단할 수 있는 날카로운 검과,
이를 옮길 수 있는 무력이 있습니다. 못 만들 게 없죠.”
요코하마가 마키토와 마사키, 사사키를 보며 중얼거렸다.
“내 검을 돌 조각을 자르는 데 쓰겠다는 건가.”
“…이기기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요코하마의 눈이 타올랐다.
“후후… 마음에 드는군. 그 승부욕.
이길 수만 있다면 네놈의 검 따위 얼마든지 되어주지.”
“….”
“하지만 이길 수 있겠나.”
“…?”
“한국 팀에는 이한성이 있다. 그 라이언 나이트도 어쩌지 못한.”
“…알고 있습니다.”
요코하마의 표정이 어두웠다.
한성의 존재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리라.
“제 입으로 나서지 않겠다 말을 했으니
쉽게 나다니지는 않겠지만… 수세에 몰리면 또 모른다.”
“….”
“게다가 나머지 녀석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도
전과 달리 명확하고 깔끔해졌고, 더 크고 강건해졌어.
쉽지만은 않은 일이 될 거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내 보이겠습니다.”
“…그래?”
“예.”
“…좋아. 난 뭘 하면 되지?”
타오르는 그의 눈을 본 마키토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그럼….”
* * *
“자. 말해 보슈.”
성용이 형우를 보며 채근했다.
“저쪽도 이한성 헌터가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을 알고,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끝내려 공격적으로 접근할 겁니다.
그러니 마사키와 마키토를 좌, 우측으로 보내 치고 들어올 테고
전면에는 탱커 사사키를 내세워 압박하려 들 겁니다.”
“….”
“그리고는 사사키의 후위에
요코하마와 힐러를 붙여 안정적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고,
나가노를 최후방에 세워 저격을 해 모두를 서포트할 겁니다.”
“…정공법이군요.”
애림이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재권 씨랑 애림 씨 끼고 사사키 막으면 되고.”
“저는 마키토 헌터를 막으면 됩니다만….”
“마사키와 나가노는 누가 막습니까?”
성용과 선우 재권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제가 맡을 겁니다.”
“음…?”
모두의 눈이 형우에게로 향했다.
“…후. 그게 가능하겠수? 아무리 형우 씨라도…?”
성용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저라면 할 수 있습니다.”
“빌어먹을….”
성용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
간만에 들려온 한성의 목소리에
모든 길드장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형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티에라.”
“네. 주군.”
한성의 부름에 그녀가 즉각적으로 답해왔다.
“나오도록.”
“분부대로.”
공간이 일그러지며 티에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 뵙네요. 세계수의 축복이 그대에게도 닿기를.”
“아… 아예.”
티에라의 인사에 길드장들이 어정쩡하게 답했다.
“이분이 그럼…?”
성용이 티에라의 미모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일전에 그녀를 사수라 소개했던 게 기억난 형우가 물었다.
“예. 맞습니다. 그녀가 나가노를 맡아 줄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단 한 발의 탄환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구요.”
철컥.
티에라의 팔찌가 빛나자,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그녀의 키만큼이나 크고 긴 저격용 소총이 쥐어졌다.
“맡겨 주세요.”
“티에라. 넌 저쪽의 저격수가 전장에 난입하는 것을 막고,
이들을 서포트하도록. 그렇다고 싸움에 너무 개입하진 말고.”
“네.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티에라가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럼, 다시 시작하시죠.”
“…예.”
한성의 말을 끝으로 길드장들 전원이 전면에 나섰다.
* * *
“저건 또 뭐야.”
스코프로 한국 팀을 살피던 나가노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가노의 목소리가 들린 곳에서는
응당 보여야 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 환경에 완벽하게 동화되는 그의 스킬 매복 때문이리라.
“무슨 변화라도 있습니까.”
그의 이어폰으로 꽤나 날 선 요코하마의 말이 들려왔다.
“예. 이한성이 수하 하나를 소환했습니다.”
“…수하요?”
“예. 자신이 빠진 공백을 수하로 채울 생각인가 봅니다.”
“…보고된 리치 킹이나, 타우렌입니까.”
예상이라도 한 것인지 요코하마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아닙니다. 다크 엘프로 추정되는 본 적 없는 마물입… 음?!”
“뭡니까.”
“…그게… 총을 들었습니다.”
“…총이라 했습니까?”
“예.”
“분명해요?”
“예. 그것도… 꽤나 질이 좋은….”
“…아마 그것이 당신을 마크할 겁니다. 주의하시길.”
“Aye Aye, Captain!”
나가노의 대답이 이어졌다.
“어디… 뭘 들고 있나 볼까.”
스코프를 넘어 나가노의 시선이 이어졌고,
티에라의 무기에 그의 끈적한 시선이 닿았을 때
순간적으로 티에라의 고개가 나가노에게로 돌아갔다.
“…?!”
‘들켰나?’
순간적으로 놀란 그는 자신의 스킬이
풀린 것은 아닌지를 다시 한번 체크했다.
그러나 스킬은 풀려있지 않았다.
그는 적갈색의 돌무더기 그 자체였으니까.
‘뭐지. 방금 전의 그 모습은… 분명 날 본 것 같았는데….’
두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었음에도
나가노는 분명 그녀에게서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타겟 움직입니다.”
한국 팀이 움직이지 나가노가 빠르게 알렸다.
“갑시다. 승리를 향해.”
“좋지.”
“좋군.”
요코하마의 말에 팀원들이 하나둘 응했다.
‘…우연이겠지.’
자신을 바라보던 티에라의 날 선 기세를 떠올린 나가노는
그저 우연일 뿐일 거라며 자신을 애써 위로했고,
다시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