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 * *
“경기~~~~~~ 시작합니다!!!!!!!!”
“와아아아아아!!!!!!”
앵커의 고함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가려졌던 경기장이 열리자 드러난 스테이지는 밀림이었다.
강한 조명을 사용해 밀림의 찌는 듯한 더위와
불쾌할 정도의 찝찝한 습기까지 완벽하게 구현해 놓았고,
풀들과 넝쿨, 나무들까지 인공이 아닌 진짜로 식재해 두었다.
게다가 스테이지 중간중간에 펼쳐진 늪지대와 물웅덩이들은
마치 열대 밀림을 떼어다가 경기장에 펼쳐 놓은 듯했다.
밀림은 양국 헌터 모두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빽빽하게 들어차 움직임과 시야 확보를 어렵게 했다.
“골치 아프게 돼버렸군요.”
밀림을 바라보던 형우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왜 그러우.”
“시야를 제대로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은,
적을 발견하기 어렵고, 적의 움직임을 예상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 아군끼리도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말도 되구요.”
“이까짓 풀떼기들 뭐, 모조리 베어 내면 되지 않겠수?”
“그건 위험합니다.”
“왜.”
“이 정도 규모의 밀림을 베어내려면
꽤나 큰 기술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마력의 소모는 둘째 치더라도 기술을 사용하는 동시에
마력과 소음에 상대 선수들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꼴이 되죠.
위험부담이 큽니다. 그래서 저쪽도 지금 잠잠한 것일 테구요.”
“끄응….”
“게다가 이렇게 빽빽하게 풀과 넝쿨들이 들어찬 이상,
스테이지 안에서의 빠른 기동도 어렵습니다.
그 말인즉 저번처럼 양동 작전이 불가하다는 이야기구요.”
“형우 씨가 부유 마법을 써서 선제공격을 하는 건 어떻수?”
“그것도 좋은 전략입니다만, 그건 상대 진영에
우수한 마법계 헌터가 없을 때 가능한 전략일 겁니다.
하지만 상대편에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마법계 헌터가 있죠.
제가 아무리 잘 숨기고 감춰봐야 얼마 가지 못해 들킬 겁니다.”
“끙… 이래서야 원. 저번 대전과 같이
선우 씨가 먼저 치고 나가는 전략도 사용할 수 없겠고….
골치 아프구만 이거…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수.”
성용이 인상을 쓰며 물어왔다.
“현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방법은?”
“덫을 치고 유인해 하나하나 잡아 나가는 것 같습니다.”
“덫?”
“…게릴라전이라고 하죠.”
“게릴라라….”
형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고,
형우의 말을 들은 한성 또한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 * *
“빌어먹을.”
영국 측 헌터 둘이 깃발이 꽂혀 있는 깃대를 기점으로,
사방에 우거진 수풀과 넝쿨들을 칼로 쳐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당장 튀어 나가 녀석들을 썰어도 모자랄 판에,
이런 풀떼기들이나 썰고 있어야 하다니… 성미에 안 맞네. 거.”
안토니오의 말에 제라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 마커스 경이 저 녀석을 부탁하셨으니.”
제라스가 깃대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년을 턱으로 가리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쯧. 내가 보모도 아니고.”
“쉿. 애 듣겠다.”
“들으면 뭐 어때.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어디.”
“…그러지 마. 불쌍한 아이야.”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어.”
“알잖아. 너도. 녀석의 이야기를.”
“…그건 그렇지만.”
“잘해줘.”
“…알았어. 알았다고. 그 촉촉한 눈깔 좀 치워라.”
“….”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져 내릴 듯한
제라스의 촉촉한 눈을 보고는 안토니오가 기겁하며 대답했다.
“근데. 그거 사실이야?”
“뭐가?”
“부모와 형제를 모두 제 손으로 죽였다는 거…?”
안토니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쉿!!”
제라스가 놀라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지금 저 녀석이랑 우리 사이의 거리를 봐.
게다가 이렇게 작게 말하는데 들리겠냐. 생각을 좀 해봐.”
“…그렇지만….”
제라스가 슬쩍 소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소년은 전과 다름없이 쭈그리고 앉아,
풀과 나무들뿐인 숲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듣지 못한 것이리라.
“그래서 죽인 게 맞아. 아니야?”
“맞아.”
“휘유…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
저렇게 왜소하고 소심한 녀석이 어떻게 그랬는지. 원.”
“알잖아. 녀석이 가진 힘이 뭔지.”
“알지. 저 녀석한테 까불다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
“그래. 이성을 잃어버리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겠지.”
“…휴. 시한폭탄이 따로 없군.”
“그래도 자극이 없으면 변하지는 않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뭘.”
“저 녀석 적 팀에 던져 놓으면 금방 게임 끝날 것 같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중간에 멈추려 들지 않고
상대 헌터들을 다 찢어발기려 들 테니 그게 문제지 뭐.”
“쩝… 그건 그렇겠군.”
“게다가, 저쪽에는 이한성이 있어.
아무리 저 녀석이라 해도 쉽지는 않을 거야.”
“아이. 누가 이한성을 잡아 죽이래.
우리가 깃발 탈환할 때까지 시간만 벌어달라는 거지.”
“…그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하지만, 마커스 경께서 그런 방법을 모르실 리 없어.
다만… 그에게 쏟아질 세상의 시선을 신경 쓰시는 거겠지.”
“손자처럼 생각하신다더니, 맞나 보네.”
“그런 것 같아. 항상 끼고 다니시거든.
대격변의 날 때 죽은 손자랑 많이 닮았다나 뭐라나.”
“쩝… 녀석 부럽네. 본인이 가진 힘도 대단한데,
허우적거리다 잡은 줄도 하필 또 황금 동아줄이구만.”
“세상이 공평한 거지. 뭐. 하나를 앗아갔으니 하나를 준 거지.”
“속 편해서 좋겠다. 넌.”
사삭.
“마커스 경. 오신다. 조용히 하고 있어.”
“그래.”
수풀을 헤치고 마커스와 함께 따라갔던 헌터들이 돌아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커스 경.”
“아뇨. 수고는 안토니오와 제라스가 더 해주었죠.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정리를 해주시다니. 고마워요.”
마커스가 싱긋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가셨던 일은 잘하셨는지요.”
“네. 잘 설치하고 왔습니다.
조그마한 소리에나 움직임에도 발동해
우리에게 그 위치를 알려줄 겁니다. 하하.”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저쪽이 조용하네요.
저돌적으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러게요.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저쪽도 꽤나 머리를 쓰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우리 반응을 보고 움직이겠다는 뜻 같아요.”
마커스가 더운 듯 중절모를 벗고는
손으로 부채질하며 안토니오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그나저나 별일 없었나요?”
“네. 이렇다 할 접근이나 침입은 없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럼 저들의 움직임을 기다려 봅시다.”
“네.”
“그럼 경계 늦추지 말고 대기해주세요.
이겨서 여왕 폐하께 이 승리를 안겨 드립시다. 후후.
여왕 폐하께서 이번 경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답니다.”
“예.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마커스는 해밀턴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별일 없었니. 해밀턴?”
“…네.”
해밀턴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래. 그럼 됐다.”
“저… 마커스 경.”
“응? 왜.”
“…이한성 헌터는 강하다고 들었어요.”
“그래. 그는 강하단다. 이 할애비도 어찌 못 할 만큼.”
마커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만약 그가 참전한다면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지 않기만을 바라야겠지만….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해밀턴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따뜻했다.
“숨고 싶으면 숨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렴.
그 뒤는 할애비에게 모두 맡기고 말이야.”
“…무서워요. 또… 제가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괜찮다. 괜찮아. 이 할애비가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마.”
“…괜찮을까…요?”
“그래. 걱정 말거라. 후후.”
“…고맙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해밀턴을 보며
마커스가 흐뭇한 얼굴로 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불쌍한 녀석… 어떻게 이리 착한 아이가….’
해밀턴을 바라보는 마커스의 눈에는
슬픔과 아픔, 동정, 연민이 한가득이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됐수.”
정찰을 다녀온 선우를 보며 성용이 물었다.
“아무래도 우리와 비슷한 전략인 것 같습니다.
덫을 쳐놓고 우리가 먼저 다가오길 기다리더군요.”
“맞을 겁니다. 마커스 헌터는 노련한 헌터니까요.”
선우의 말에 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형우 씨는 어떻게 됐습니까.”
“저 또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그럼 슬슬… 가볼까요.”
“그래요.”
선우의 말에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형우와 선우에게로 애림과 재권의 버프가 쏟아져 내렸고,
둘은 영국 팀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습격이나 양동이 있을지 모르니,
프라임 길드장께서는 작전대로 깃발을 부탁합니다.”
“걱정 마슈. 둘 올 때까지는 내 거뜬히 버티고 있을 테니.”
성용이 씩 웃으며 가슴을 탕탕 내리쳤다.
“그럼.”
사사삭.
풀 밟는 소리와 함께 둘이 숲 저편으로 사라졌다.
“후우. 잘돼야 할 텐데.”
성용이 긴장한 듯 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잘될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어느새 다가온 애림이 성용의 등을 토닥였다.
“그랬으면… 좋겠긴 헌데… 영 신경 쓰이네.”
“뭐가요.”
“그 해밀턴이라는 애 말여.”
“아.”
“숨기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불안허네.”
“….”
“게다가 한성이 저거 봐. 저거. 아니 무슨 휴가 왔냐고.
벽 쌓는 걸 도와주든지, 하다못해 작은 힌트라도 하나 주든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티비 드라마 보듯이 우릴 보고 있질 않나.
선베드에 누워가지고 햇볕 쬐면서 빈둥거리지를 않나. 어휴.”
성용이 한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 이한성 헌터 들리도록 크게 말씀하시지 그러십니까.”
재권이 입을 열자, 성용은 민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뭐. 그렇게 크게 말할 건 아니고….”
“다 들립니다. 삼촌.”
한성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성용은 뜨악한 표정이 되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어… 어. 난 저기 목책 세워둔 거 확인 좀 하고 올게.”
성용이 후다닥 자리를 뜨자,
그 모습에 재권과 애림이 작게 웃었고
그를 바라보던 한성의 눈은 영국 팀이 있을 숲으로 향했다.
‘…꽤나 골치 아프겠군.’
* * *
“…왔다.”
마커스의 눈이 숲으로 향하자, 헌터 둘이 숲으로 뛰어나갔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여러분과 저들의 전력 차는 큽니다.
혹시라도 교전이 발생할 것 같으면 바로 도망치세요.
뒤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예.”
마커스의 이어폰으로 둘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 와라. 애송이들아. 환상의 세계로 너희를 안내하마.”
마커스의 눈이 타올랐다.
* * *
“옵니다.”
형우의 이어폰으로 선우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
형우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자,
선우는 말없이 손을 들어 숲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선우의 손끝에는 꽤나 이격되어 있는 수풀 두 개가 보였고,
수풀은 바람에 자연스레 천천히 하늘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뭘… 보라는….’
형우가 눈을 가늘게 떠 다시 한번 수풀을 바라보자,
수풀의 아래에는 어렴풋하게 보이는 인간의 형체가 있었다.
‘…이걸 발견했다는 말인가. 짐승이 따로 없군.’
마력을 꽤나 잘 갈무리했는지
그들에게선 한 줌의 마력도 느껴지지도 않았고,
수풀을 뒤집어쓴 채 천천히 접근하고 있는 탓에
바람에 흔들리는 풀떼기로밖에 보이지 않았건만….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것을 발견한 선우를 보며
형우는 혀를 내두르고는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저 둘부터 끊고 갑시다.”
“알겠습니다.”
30분쯤 지났을까.
선우와 형우가 있던 나무의 아래로
두 헌터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선우와 형우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형우는 손가락 세 개를 편 뒤 하나씩 접었다.
마지막 손가락이 접히자,
선우는 그대로 헌터의 등 뒤로 뛰어내려
헌터 하나의 목덜미를 손날로 강하게 내리쳤고,
형우는 블링크로 나머지 헌터의 등 뒤로 다가가
입을 막고는 자신의 특기인 전격계 마법으로 충격을 가했다.
사박.
불의의 일격에 둘은 동시에 기절해 고개를 떨궜고,
그대로 쓰러지려는 것을 형우와 선우가 조심스레 받아 눕혔다.
그리고는 이들의 입을 천으로 감싸 묶었고,
마력을 봉인할 수 있는 밧줄로 몸을 단단히 결박한 뒤,
나무 덤불과 풀 더미가 무성한 곳의 아래에 숨겨 두었다.
“…후. 둘 처리 완료.”
“잘했으.”
선우의 담담한 말에 성용이 대답해왔다.
“…얼마 안 있으면 마커스와 나머지 헌터들이
둘이 당한 걸 알고 움직일 겁니다. 작전은 그때부터 시작이구요.”
형우의 말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모습을 감추었다.
사삭.
형우와 선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근방에 있던 나무 덤불이 사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놀랍게도,
선우와 형우에게 당한 영국 측 헌터 둘이었다.
숲의 구석에 밀어 넣어진 헌터들은 시간이 지나자,
노이즈라도 낀 것마냥 파지직 소리를 내며 모습이 흐려졌고,
노이즈가 사라지자 거기엔 넝쿨과 잎으로 된 인형이 누워있었다.
“…추격 시작하겠습니다.”
헌터 중 하나가 중얼거렸고, 둘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