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 * *
“헉… 헉… 헉… 아이고. 죽겠다.”
늦은 새벽. 아프리카 짐바브웨.
성용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마물들의 피와 살점이 가득한
바닥에 눕는 것에 별다른 거부반응이 없어 보였다.
원래도 체면 같은 자질구레한 것을 따지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듯 보였다.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리라.
그런 그의 곁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선우와 재권, 형우와 애림이 그것이었다.
그들 또한 성용만큼 지쳐 보였고,
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재권과 형우는 파리한 안색으로
가부좌를 튼 채 마력의 회복을 꾀하고 있었고,
선우는 보초를 자처하고는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냄새가 역하다며 마물들의 사체 곁으로 얼씬도 않던 애림은
사체 하나를 쿠션 삼아 몸을 편히 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랄 수 있는 것은
애림의 힘 덕에 누구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애림이 곁에서 계속 치료해 준다 해도,
보츠와나부터 짐바브웨까지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쌓일 대로 쌓여버린 육체적 피로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또한 수없이 몰려드는 마물들을 대상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느라 극한의 상태까지 내몰렸으니
정신적으로도 피곤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후우… 우리 확실하게 짐바브웨 탈환한 거 맞수?
보츠와나 때처럼, 땅 파고 숨어있다거나 그런 거 아니고?”
성용이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는 듯 입만 벌려 중얼거렸다.
“네.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완벽하게 탈환했으니 걱정 마세요.”
형우가 태블릿을 보며 말했다.
“…후우… 다행이군.”
피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한성이는 어찌 됐수.”
“…리비아, 차드, 나이지리아까지 모두 수복했네요.”
형우가 태블릿을 보며 담담하게 답했다.
“뭐?! 이런 미친… 이집트 수복한 지 얼마 됐다고.”
성용이 놀라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이한성 헌터니까요.”
이제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형우가 말했다.
“…어후… 놀라는 것도 이제는 지겹수.”
“…그러게 말입니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성용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한성이가 사흘 동안 혼자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쏘다니는 동안
우리는 다섯이서 이제 겨우 나라 두 개를… 것도 힘겹게 탈환했수.
우리가 느린 거요? 아니면 한성이가 미치게 빠른 거요?”
“아마도 후자일 겁니다.”
선우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익숙한 기운에 선우와 형우가 동시에 공중을 올려다봤고,
거기에는 녹색으로 빛나는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탁.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성이 길드장들을 향해 말했다.
“이게 누구여. 한성이 아니여? 일은 다 끝냈어?”
성용이 힘없이 손을 흔들며 한성을 맞이했다.
“아뇨.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엥? 무슨 일이여. 그럼?”
“저희가 대회 중인 걸 잊으셨나 봅니다.”
“…아.”
“앞으로 세 시간 뒤에 경기가 하나 잡혀있습니다.
스웨덴이 기권을 해준 덕에 4차전은 쉽게 넘어갔지만,
이번 상대는 그리 쉽게 넘어가 줄 것 같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미리 준비도 할 겸, 휴식 시간도 드릴 겸 온 것이구요.”
“뭔가 잊고 있었다 했더니… 그게 오늘이었나.”
선우가 짜증 난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 그렇습니다.”
“후. 빌어먹을….”
성용이 얼굴을 벅벅 문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벨루몬, 타우한. 나오도록.”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한성의 부름에 벨루몬과 타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탁해.”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한성의 말에 둘은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벨루몬은 그들의 옷과 몸에 묻은
피와 살점의 얼룩을 지워내 주었고,
타우한은 애림이 미처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사기와 마기의 흔적들을 지워내 피로를 덜어내 주었다.
“아… 이거 좋군. 애림 씨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타우한 싸부의 힘은 애림 씨랑은 차원이 다르구만 그래.
이 정도면 다시 또 한바탕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으이.”
성용이 맑아지는 머리와 차오르는 힘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무후후. 날 따라오려면 아직은 멀었지.”
“그런가요. 후후. 좀 더 분발해야겠네요.”
타우한의 말에 애림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치료해주는 이의
수고도 몰라주는 저런 말들은 얄밉기는 하군.”
타우한이 성용을 향해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그렇죠? 다음부터는 치료해주지 말까 봐요.”
농담을 주고받는 타우한과 애림에
성용이 울상을 지으며 빠르게 말해 왔다.
“아… 아니. 수고해주는 거야 알지. 아이 참. 그러지 말어. 응?”
“농담이에요. 농담. 후후….”
그들이 떠드는 사이 한성은 길드장들의 면면을 살피고 있었다.
‘확실히… 가장 성취가 빠른 건 저 둘이군.’
한성의 눈이 선우와 형우를 향했다.
‘풍기는 기운이며, 마력을 갈무리하는 수준이
전에 비해 훨씬 깔끔하고 정순해졌어. 나쁘지 않아.’
한성이 흐뭇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번 상대는 여러분도 알고 계시겠지만, 영국입니다.”
“알고 있어.”
한성의 말에 성용이 한성의 대전 상대였던
헤롤드 마커스를 떠올리고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꽤나 힘들 겁니다.”
형우가 다가오며 말했다.
“?”
“헤롤드 마커스 헌터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건 사실이지만,
출전한 선수들 가운데 전에 본 적 없는 헌터가 하나 있습니다.
최근에 각성한 헌터라고 하더군요.”
“음….”
“개인전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그 능력도 알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정보라고는 이름과 열일곱이라는 나이뿐….
그 외에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흠… 그건 좀 곤란하군. 능력이 뭔지 모르면 대비가 어려우니.”
성용이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맞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한성이 너는 출전 안 해?”
“네. 여러분들의 수련을 위해서도 그게 더 나을 겁니다.”
“그러다 지면 어쩌려고.”
성용이 인상을 찡그리며 한성을 보자, 한성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글쎄요. 지금의 여러분이라면
상대가 누가 됐든 쉽게 지지는 않을 겁니다.”
“…강해진 것 같긴 헌데….
그래도 그렇게 속 편하게 말할 때가 아니여.”
성용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한성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일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 정리하시고 오십시오.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성은 타우한과 함께 게이트 너머로 넘어갔고,
게이트 앞에는 벨루몬과 길드장들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성용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잠깐의 침묵 뒤, 벨루몬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지면.”
덜그럭거리는 뼈 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는 그의 음성이 들려왔고,
기분 탓인지, 아님 정말로 그런 건지 순식간에 주위가 싸늘해졌다.
꿀꺽.
“죽일 거다.”
후웅.
벨루몬이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천천히 게이트 저편으로 사라졌다.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게 낫겄다. 임마.”
성용의 중얼거림에 길드장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준비들은 많이 하셨습니까.”
“어. 왔어?”
경기가 시작되기 5분 전, 한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드장들은 한성의 지각이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는지
그를 반기며 맞이할 뿐, 처음과 같이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형우가 길드장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신경 써야 할 건 헤롤드 마커스 헌터입니다.
그의 환각은 단일 대상을 상대로 그 환각의 정도가 강할 뿐이지,
다수의 대상에게 동시에 술을 펼치면 환각의 정도가 줄어
큰 효과는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환각을 깰 염려가 있는
동일 계열의 재권 씨나, 형우 씨는 안 건드릴 거고
나 아니면 선우 씨 혹은 애림 씨를 건드릴 확률이 높겠군.”
“그럴 겁니다. 그리되면 남은 넷이서
상대 여섯과 싸워야 할 수도 있게 됩니다.”
“…허어. 거 참.”
성용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환각에 걸린 아군과 싸워야 할 수도 있구요.”
“…제기랄.”
“혹시나 환각에 걸리더라도,
저나 재권 씨가 그의 환각을 역산해 이를 파훼할 것이니
너무 당황해하지는 마시고 저희를 기다려 주세요.”
“파훼하는 데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습니까.”
선우가 물어왔다.
“직접 부딪쳐 보기 전까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꽤 단련해두었으니까요.”
형우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커스 헌터를 제외하고는,
사실 별다른 위협이 될 만한 전력은 없어요.
아마 선우 씨나, 형우 씨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애림이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마커스 헌터와, 해밀턴이라는 이름의 소년입니다.
그의 능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상.
위험할 수 있으니 최대한 주의를 해주셔야 합니다.”
“알았수.”
성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누가 해커스 헌터의 환각에 걸리느냐에 따라
이동 경로와 공격 루트 등 공략법이 달라지니 기억해 두시구요.”
“네.”
“알았수.”
‘꽤나 연구했나 보군.’
뒤에서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한성이 씩 웃으며 생각했다.
“한국 팀. 입장하시겠습니다.”
형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스텝이 들어와 소리쳤다.
“으쌰. 자. 갑시다.”
성용의 기합과 함께 긴장한 듯한 얼굴의 다섯과
즐겁다는 듯한 얼굴의 하나가 경기장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 * *
“와아아아!!!!!!!!”
선수단의 등장에 관객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선수들의 얼굴이나 이름이 그러진 플래카드를 휘두르거나,
얼굴이라도 한번 봐줄까 싶어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러대는 등
관객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좋아하는 헌터들을 응원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인기 있는 헌터는 역시 한성이었다.
한성의 수트와 똑같은 디자인의 수트를 입고 온 팬부터,
벨루몬의 얼굴과 비슷하게 생긴 해골을 투구처럼 쓴 팬,
타우한의 토템과 비슷하게 생긴 형광 봉을 흔드는 팬 등.
한성을 응원하는 팬이 많은 만큼,
그를 응원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였다.
그래서일까.
경기장 전체를 울릴 정도로 큰
해설자와 앵커의 목소리는 함성 소리에 묻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
“…이번 경기는 한국과 영국의 경기로
관전 포인트는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최근 들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 팀의 성장세.
둘째. 영국 내 최연소 엠페러급 헌터인 해밀턴 군이 가진 능력.
마지막 셋째, 이한성 헌터의 경기 참여 여부가 되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한국 팀 전원이
놀라울 정도로 눈부신 성장 속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흔한 일은 아닌데요… 해설 위원께선 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하급 헌터가 아닌 엠페러급의 헌터가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성장을 하는 사례는 잘 없습니다.”
게다가 팀원 하나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팀원 전체에 해당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구요.”
“그렇습니다. 저도 매년 대회의 앵커를 맡고 있습니다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약물 검사와 마력 증폭제 복용 여부까지 확인했겠습니까.”
“맞습니다. 뭐 결과는 모두 음성으로 판명 났죠?”
“네. 그렇습니다. 모두 깨끗한 상태입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포인트를 보겠습니다.
해밀턴 군의 능력은 아직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개인전은 출전하지 않았고, 단체전에서도 나선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영국 팀의 비밀병기라는 뜻일 텐데요.
모쪼록 이번 경기에서는 그 능력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기대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포인트. 이한성 헌터의 참여 여부입니다.”
“아. 저도 이게 너무 궁금합니다.
경기에 나서지 않는 이한성 헌터의 속내가 무엇인지.”
“이한성 헌터 본인의 말에 따르면,
한국 팀의 기량과 전력을 높이기 위함이라 말했습니다만….
여전히 저로서는 이렇다 할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드립니다.
광고 후 경기가 곧바로 시작되겠습니다.
경기가 중계되는 이곳은 대한민국의 서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