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 *
“와라. 전력을 다해. 아니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날 테니.”
칸이 손을 들어 까딱거리며 말했다.
으득….
“네놈이 강하다 한들, 우리 넷 모두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판이 도낏자루를 강하게 그러잡으며 소리쳤다.
“짖는 짐승은 물지 않는다 했다. 그러니 그만 짖고 덤벼라.
전투의 종족인 오크가 검을 휘둘러야지 입을 휘두르면 쓰나.”
칸은 그런 판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대답했다.
“…죽여주마.”
부아가 치미는 듯 판이 으르렁거렸다.
“나와 판이 녀석의 후방을 노리겠다.
물라. 차카. 너희는 전방에서 녀석의 시선을 끌어다오.
물론 공격에 성공하면 더욱 좋겠지만, 힘들면 시간이라도 끌어라.”
네바다의 속삭임에 물라와 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족장도 아닌 네바다의 명령을 듣는 것이 아니꼬웠지만,
네바다의 지략은 오크들 사이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었기에
잠자코 그의 말을 따랐다.
슥.
“오… 무식하게 달려들 줄 알았더니 나름 머리를 썼다 이건가.”
칸이 자신을 중심으로 진을 짜는 넷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족장의 후보로 거론될 만한 녀석들이라 그런가,
녀석들의 움직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일반적인 오크들처럼 흥분해 날뛰지도 않았고,
무턱대고 달려들며 도끼나 대검을 휘두르지도 않았으니까.
오히려 그들은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칸을 압박해 나갔다.
물론 그렇다 해서 칸이 압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흥미롭게 쳐다볼 뿐.
삭.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네바다와 판의 기운이 느껴졌다.
대족장의 후보로 거론되었다 해도,
한성 덕에 격이 오른 칸에게 있어 녀석들은 풋내기에 불과했다.
살기 하나 제대로 갈무리할 줄 몰라
‘나 여기 있소’ 하고 기척을 드러내는 수준이라니.
죽은 사이우스가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한 칸이었다.
“해 진다. 얼른 들어….”
쿵.
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물라와 차카가 먼저 움직였다.
쾅!
“…이럴 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른 도끼에 움찔조차 하지 않는 칸과
조금의 흠집조차 나지 않은 그의 방패에 물라가 놀라 중얼거렸다.
“쓸 만한 완력이군. 그러나 그게 끝이다.”
칸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 물라! 물러나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네바다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칸의 방패가 흡수했던 에너지를 방출했으니까.
쾅!!!!!!!!
“물라!!!!!!!!”
함포가 발사되는 수준의 굉음과 함께,
방패에서부터 방출된 에너지에 물라가 나가떨어졌다.
수십 그루의 나무를 박살 내며 날아간 물라의 위로
거목들이 쓰러져 내렸고, 그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이 자식이!!!!!!”
카가각!
차카의 대검이 칸을 향했다.
불똥과 함께 금속성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지만,
칸의 방패에는 여전히 생채기랄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윤기만 흐를 뿐.
“…쯧… 병장기를 그렇게 험하게 다루면 쓰나….
날도 갈고, 기름칠도 좀 하고 그래야지. 기본이 안 돼 있군.”
이가 나가 있는 차카의 대검을 보며 칸이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이익….”
부아가 치민 차카가 힘으로 칸을 밀어내려 해봤지만,
칸은 태산마냥 조금도 꿈쩍이지 않았다.
“그 정도 힘으로 날 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리고 말이야… 검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나.”
스릉.
원래 모습으로 변한 방패에서 대검이 솟아올랐다.
살벌한 소리와 예기에 차카가 놀라 물러섰지만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칸이 아니었다.
“어딜 도망가나.”
칸이 한 발 나아가며 차카에게 검을 휘둘렀다.
캉. 카가각….
“끄윽….”
별거 아닌 단 한 번의 휘두름뿐이었음에도 차카는 휘청거렸고,
두 번째 휘두름에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놓칠 뻔했다.
까각….
“…?!”
비록 명검은 아닐지언정, 수없이 많은 전장을 함께한 대검이
눈앞의 붉은 오크의 일격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로군.”
캉!
칸의 말과 함께 검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렸다.
“좀 이따 보지.”
검을 수거한 칸이 방패로 강하게 차카를 강타했고,
차카 또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날아가 숲에 처박혔다.
탓
“어딜!”
뒤에서 들려온 작은 소리에 칸이 빠르게 반응했다.
오른손의 방패를 원형으로 변환시켜 뒤를 향해 날렸고,
거기엔 칸이 공격받는 틈을 타 은밀하게
도끼 두 자루를 들고 다가오는 판이 있었다.
“으헉?!”
자신의 접근을 칸이 알아챌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판은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하며 칸의 방패를 막아내려 했다.
그러나 칸의 방패는 빠르게 판에게로 나아가
이를 막아내려 내리친 판의 도끼를 모조리 박살 냈다.
쾅!!!!!!
“크헉….”
복부에 그대로 꽂혀버린 칸의 방패에 판의 눈이 뒤집어졌다.
털썩.
이를 이겨내지 못한 판은 기절한 채 뒤로 몇 바퀴나 굴러야 했다.
착.
방패를 회수한 칸이 네바다의 목에 검을 들이밀며 중얼거렸다.
“더 해볼 텐가?”
얼음보다도 시린 칸의 검에 네바다는 오한을 느꼈고,
힘이 빠져서인지 애지중지하던 도끼를 놓쳐 떨어뜨렸다.
“…졌다.”
네바다가 패배를 시인하며 무릎을 꿇은 순간, 석양이 졌다.
* * *
“칸이 대족장이 되는 것에 불만이 있는 자 있나?”
울려 퍼진 한성의 말에 공터는 조용했다.
한성을 향하던 살기어린 시선과 적대적인 눈들도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거기엔 공포와 두려움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없소. 그는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만 없이 결투에 임했고….
오크족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음 대족장의 후보가 될 자들
모두를 쓰러뜨렸소. 그는 정당하게 대족장의 지위를 얻었소.”
샤먼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오늘부로 대족장은 칸이다. 알겠나.”
“…알겠소… 세율과 공납은… 어찌 정하겠소.”
칸이 대족장이 되었음에도 샤먼은 어째서인지
대족장이 된 칸에게 물어야 할 것을 한성에게 묻고 있었다.
칸에게서 느껴지는 한성의 기운을 보며
그가 한성의 권속임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호오….’
“알고 있었나.”
“…미천하지만 나 또한 마도의 길을 걷는 자요.
마력의 흐름에 대해서는 여기 있는 녀석들보다는 민감하지요.”
한성의 뜻 모를 말에도 샤먼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거 봐라…? 쓸 만한데?’
샤먼을 바라보는 한성의 눈이 반짝였다.
“칸은 내 대전사이자, 내 친구이고 형제이며 가족이다.
그리고 그런 칸이 오크들의 왕이 되었고 너희가 그를 인정했으니
너희 오크들 또한 내 가족이나 다름이 없다.”
“…그 말씀은…?”
“세금도 필요 없고, 그 어떤 공물도 필요 없다.
그간 있었던 모든 것들을 철폐하겠다. 편하게 살도록.”
“…저… 정말이오?”
샤먼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
한성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있으니 넌 날 따라와라.”
* * *
“…믿기 힘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이다.”
새벽이 될 때까지 대족장의 거처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한성과 샤먼이 있었다.
한성은 그간 있었던 일들과, 마물과 인간의 세계
모두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샤먼에게 알려 주었다.
칸이 대족장의 지위를 얻었다고는 하나, 칸은 한가하지 않았다.
한성과 함께해야 하기에, 족장 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고
칸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며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실질적인 지도자의 자리에
현명하고 눈치 빠른 샤먼을 대리로 앉힐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모두 알려 주었다.
“분명 사특한 기운이 우리 오크들을 위협했던 것은 사실이나….
밖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음은 저희도 전혀 몰랐습니다.
게다가… 당신이나 되는 분께서 제게 거짓을 말씀할 리 없겠죠.”
“…그렇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난 날 도와 함께 투르바를 제거할 세력을 모으고 있다.
그중에 너희도 나의 계획에 포함되어있고.”
“…그렇습니까.”
“원래는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유대를 쌓고,
너희에게 날 보여주고 마음을 보듬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도 시간도 없다.
그렇기에 이런 과격한 방법을 사용한 것을 이해해다오.”
“아… 아닙니다. 당신은 힘으로 누를 수 있으셨음에도
저희의 방식을 존중해주셨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샤먼이 늙고 주름진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이군.”
“게다가 당신이 이리 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영문도 모른 채 그녀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하거나,
마기에 미쳐 이유도, 목적도 없이 누군가를 죽이고 먹었겠지요.
저희도 그것은 싫습니다.”
그가 두렵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제 당신의 수하인 것입니까?”
샤먼이 머뭇거리며 한성에게 물어왔다.
“수하라는 표현보다는… 가족이자 친구가 맞겠군. 싫은가?”
“아닙니다.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기뻐서… 그만.”
“…기쁘다…?”
한성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가 저희 오크를 당신처럼 귀히 여겨주겠습니까.
길을 가다 발에 치이는 돌부리만큼이나 많은 것이 저희입니다.
아무도 저희를 귀히 여겨주지 않지요.”
“그런가?”
“같은 마물들조차 저희를 먹을 것과 전투, 성욕에 미친
마물이라며 손가락질하고 무시하는 판국입니다. 후후.”
“….”
그의 웃음에 씁쓸함이 묻어나 있었다.
“그런데 당신께서는 그런 저희를 무시하거나 짓누르지 않고
가족이라 하셨고 또… 친구라 하셨습니다. 기쁠 수밖에요.”
“뭐. 너희가 칸을 인정했으니, 나 또한 너희를 인정한 것뿐이다.”
한성의 말에 샤먼은 한참이나 한성을 바라보았다.
“왜?”
“아닙니다. 신기해서 말입니다.”
자신이 실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그가 황급히 한성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뭐가?”
“당신을 보고 있으니… 제가 어릴 적 들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게 누구지?”
“초대 마신이라 알려진 아네스입니다.
누구나 귀히 여기며, 누구나가 성군이라 칭하던 자.
누구보다 위엄 있고 기품 있으며, 누구보다도 강한 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런 자이지만….
당신을 보고 있으니 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그런가.”
아네스를 떠올린 한성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전 이만 오크들에게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다 하셨으니 저도 빨리 움직여야겠습니다.”
“…무슨 말이지?”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에게 말해주고,
저들에게 투르바와 맞서 싸워야 할 이유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겁니다. 오크들은 바보들이기 때문이지요.”
“허….”
한성이 감탄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늙었다고는 하나, 그 누구보다도 총명하고 이치에 밝은 그였다.
“…현명하군.”
“당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처음으로 그가 웃음을 내보였다.
‘잠깐… 대리를 할 게 아니라…?’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한 한성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감돌았다.
마치 뭔가를 꾸미기라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