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 *
게이트를 바라보는 오크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한성과 같은 수트를 입었다고는 하나,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근육과
위로 솟아난 투박한 송곳니, 오크들의 언어로 된 문신들까지.
게이트 저편에서 나타난 그는 누가 봐도 오크였다.
“…하이 오크인가.”
칸의 붉은 얼굴을 본 샤먼이 중얼거렸다.
이에 오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는 명예로운 전사이며 하이 오크의 족장, 칸이다.”
오크들의 반응에 흡족스럽다는 듯 웃는 한성이었다.
“…만난 적이 있다던 사이우스의 말이 허풍이 아니었던 건가….”
샤먼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크의 역사에서 사라진 줄 알았건만….’
샤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오크가 아니라 하이 오크라서
그의 출신이 불만이라거나 오크가 아니라고 말할 자 있나.”
한성의 말에 좌중이 고요했다.
“없나 보군. 좋아.”
한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가 날 대신해 대전사로서
대족장의 자리에 도전하는 것에 불만이 있는 자는 있나?”
이번에도 역시 오크들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그를 반대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그는 분명 오크로, 도전의 자격이 있었으니까.
“좋아. 그럼 지금부터 대족장의 자리를 건 결투를 시작하지.”
한성의 눈빛이 반짝였다.
* * *
오크 군단의 연무장.
연무장이라 해봐야 조악한 돌바닥에 텅 빈 공터였지만,
손재주라고는 없는 오크들이니 그러려니 하는 한성이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여기 있는 칸을 이기면 된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의자에 앉아있던 한성이 입을 열었다.
“기한은 지금부터 시작해 해가 떨어지는 순간까지다.
그 안에 그 누구든, 언제든, 얼마든 도전해도 된다.
단 한 번이라도 칸을 꺾게 된다면 그가 바로 대족장이다.”
“….”
“허나, 상대를 죽이든 죽이지 않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그의 몫이며,
난 여기에 조금도 관여치 않을 것이다.”
“….”
“또한, 오크 부족 전체에 파발을 돌려
이 사실을 알렸으며, 대족장이 될 기회를 주었음에도
해가 진 이후에 정통성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즉시 그와 그가 속한 부족들 전원을 박살 낼 것이다. 약속하지.
만약 전원이 그리 말한다면 오늘부로 오크란 이름은 없어질 거다.”
“….”
“자. 불만 있는 자 있으면 지금 당장 얘기해라.
지금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나중에 가서 딴소리해도 죽는다.”
한성의 엄포에 오크들은 눈만 굴릴 뿐,
그 누구도 불만이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제시했던 명분을 한성은 이미 충족했고,
오히려 기회까지 준 마당에 자신들이 뭐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또한 불만을 말하기에는 한성의 무력이
자신들이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불만 없는 것으로 간주하지. 시작하도록.”
“내가 먼저 도전하지.”
한성이 말을 마치자마자 오크 하나가
연무장 가운데로 걸어 나오며 중얼거렸다.
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꽤나 우람한 몸집을 한 오크였다.
온몸 가득 꽉꽉 들어찬 근육들하며,
훈장처럼 새겨진 크고 작은 자상과 상처들까지.
대족장으로서 전혀 손색없는 모습이었다.
“그대인가. 그대의 이야기는 많이 전해 들었다. 라우라.”
조용하던 칸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호오…? 날 아나?”
칸의 말에 라우라가 흥미롭다는 듯 대답했다.
“쪽빛 나무 부족의 부족장이며,
도끼 두 자루로 트롤 서식지를 박살 낸 장본인이지.”
“명예로운 하이 오크께서 알아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답했다.
[칸. 대답하지 말고 고개만 끄덕여라.]
한성의 음성이 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끄덕.
칸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두머리 녀석들은 나중에 각 부족의 구심점이 될 거다.]
[수많은 오크들을 관리하고 다루려면 중간 관리자가 필요해.]
[그러니 웬만하면 그들은 죽이지 말고 제압만 하도록 해.]
[물론 수하가 될 녀석들 또한 귀중한 자원이니]
[어지간히 까부는 녀석들 아니고서야 죽이지 말고.]
끄덕.
[대신 너의 힘을 보여야 하는 자리이니만큼]
[상대는 빠르고 강하게, 그리고 압도적으로 짓뭉개도록.]
끄덕.
[마지막으로… 저번에도 말했지만, 네가 만일 진다면….]
[너에 대한 모든 권한을 벨루몬에게로 이양할 거다.]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부르르.
한성의 말에 칸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어깨를 떨었다.
한성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칸의 눈이 투지로 불타올랐다.
투지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박함이었던 건가. 뭐… 여하튼.
칸의 팔찌가 빛나고, 칠흑의 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패…라? 하이 오크들은 모두 명예로운 전사라더니,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군. 뒤에 숨어서 기회만 노릴 텐가.”
라우라가 이죽거렸다.
“말이 많군. 들어와라. 라우라.”
칸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고작 방패 두 개로 내 도끼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제아무리 하이 오크라지만…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릴 것 같군.’
라우라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생각했다.
쿵!!!!
선공은 라우라였다.
힘찬 도약과 함께 뛰어오른 라우라가 칸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멍청한 녀석.’
“쯧….”
그를 본 한성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고 고개를 저었다.
‘생긴 것만 그럴싸하지. 몸풀기조차 안 될 실력이군.’
“두 동강을 내주마. 잘 가라. 하이 오크!”
꽝!!!!!!
“크윽…?”
라우라의 도끼가 칸의 방패를 내리찍었지만,
라우라가 기대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만 일었을 뿐, 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데미지를 입은 것은 라우라인 듯했다.
저려 오는 통에 왼손에 쥔 도끼는 떨어뜨린 지 오래였고
그나마 버티던 오른손의 도끼는 날이 나가 못쓰게 되었으니까.
“…실력이 들은 것만 못하군.”
칸은 흡수한 에너지를 방출할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그저 오른손의 방패를 들어 올려 라우라를 강하게 쳐 올렸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라우라는
공터 주변에 있던 나무에 부딪치며 쓰러졌고,
나무는 우지끈 소리와 함께 부러져 라우라의 위로 떨어졌다.
피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떨어져 내린 나무 때문이었는지
라우라가 애지중지하며 매일 갈고 다듬던 그의 송곳니 하나가
완전히 박살이 나 부서졌다.
“…킁. 다음.”
칸이 그를 보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 * *
그 후로도 오크들의 도전 행렬은 계속되었다.
누가 봐도 하찮은 꼬맹이들부터,
한성으로서도 눈여겨 볼만한 노련한 전사들까지.
오크생(?) 역전을 노리는 것일까.
칸에게 도전하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칸을 상대로 조금의 우위라도 점하는 이들은 없었다.
끽해야 3~5초, 길어야 30초 안에 쓰러졌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크들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이에 칸 또한 쉼 없이 오크들을 상대해 쓰러뜨렸으며, 짓밟았다.
압도적이고도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자,
오크들의 시선이 뒤에서 이를 관망하던 오크 넷에게로 쏟아졌다.
라우라와 함께 다음 대족장의 유력 후보로 점쳐지던 오크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면에 먼저 나서지 않고,
자신의 수하 오크들로 하여금 칸에게 도전하게 했다.
칸의 힘을 소모하게 할 계획인 듯했다.
비겁하다면 비겁하달 수 있는 뻔한 수법이었지만,
한성은 이에 대해 딴지를 걸거나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유치한 수마저도 감내할 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칸 또한 한성의 이런 자신감을 방증이라도 하듯,
조금도 지침이 없어 보였고 그저 담담해 보였다.
“어때? 할 만해?”
10분의 휴식 시간.
칸의 곁으로 다가온 한성이 물을 건네며 물었다.
“우스울 정도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주군.
이 정도쯤이야, 그 인간과의 겨루기보다 못한 수준이니.”
칸이 물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해 질 때쯤, 나머지 부족장 녀석들이 결투를 신청할 거야.
모르긴 해도 네 힘이 빠졌을 거라 생각하고 덤비는 거겠지.”
한성이 네 부족장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너 보기엔 어때. 괜찮아 보여?”
“…흠. 쓸 만한 수준이긴 하지만,
많이 쳐줘 봐야 인간 제자 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쓸 만하네. 그럼.”
“그런가. 흠.”
“여하튼 수고해줘. 이번 일 별 탈 없이 잘 끝나면,
꽤나 괜찮은 술 몇 동이 정도는 가져다줄 테니까.”
“그거 좋군.”
“못하면 벨루몬이….”
한성이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하자,
칸이 질린 듯한 얼굴로 한성의 말을 황급히 막았다.
“그만. 그 얘기는 상상도 하기 싫으니 그만해라. 주군.”
“후후. 알았다. 그러니 잘해 봐.”
“걱정 마라 주군. 주군의 이름을 더럽힐 일은 없을 거다.”
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한가득 어려 있었다.
“자.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시작한다.”
한성의 외침과 함께 겨루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 * *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에 구름과 온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오크들은 더욱 치열하고 끈질기게 칸에게 도전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치열하게 달려든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칸의 주먹과 방패에 나가떨어지거나
날아가 기절한 채로 바닥에 널브러질 뿐이었으니까.
“더 이상 도전할 녀석은 없나.”
칸의 굵고 묵직한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지만
그 어떤 오크도 그의 말에 대답하거나 호기롭게 나서지 않았다.
조금도 지치지 않는 칸의 모습에 오크들은 되려 질려했고,
이에 도전하는 오크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그때 오크들의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라.”
말 한마디에 오크들이 갈라지며 길을 텄고,
길 사이로 네 마리의 오크가 걸어 나와 칸의 앞에 섰다.
뒤에서 관망만 하고 있던 후보들이었다.
‘드디어 나왔군.’
한성의 눈이 반짝였다.
“호오… 네바다, 판, 물라, 차카… 드디어 나왔나.”
칸이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호명하며 씩 웃었다.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다니 영광이군. 명예로운 자여.”
네바다라 불린 오크가 중얼거렸다.
“누구부터 덤빌 테냐.”
“아니. 그럴 것 없다.”
한성이었다.
“…?”
“저길 보도록.”
한성의 손가락 끝에는 거의 넘어가기 직전의 해가 보였다.
“…뭐지?”
“내가 분명 도전 기간은 해 지기 전까지라 했다. 아닌가?”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네바다가 씹어뱉듯 소리쳤다.
“너희 넷 모두를 하나씩 상대하다 보면 지겠지. 안 그런가?”
“…그럼 어쩌자는 얘기냐.”
“넷 다 덤벼라.”
“그거 재밌겠군.”
한성의 말에 칸이 씩 웃으며 답했다.
“뭐?”
“넷 다 덤비라 했다. 어때 칸.”
“상관없다. 오히려 좋군.”
“들었나.”
“…우릴 우습게 여기는 것인가!!!”
판이 흥분한 듯 도낏자루를 쥔 채 소리쳤다.
“딱히 그런 것은 아니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이다. 후후.
해가 지면 너희는 싸울 기회를 잃는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지.
자… 지금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해는 지고 있다. 어쩔 것인가.”
한성의 말에 빠르게 지고 있는 해를 보며 차카가 다급히 소리쳤다.
“왕좌는 녀석을 이기고 난 뒤 우리끼리 정하는 것으로 하지.”
“좋다.”
차카의 말에 나머지 오크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