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183화 (183/336)

183화

* * *

작업이 시작되었고, 한 시간이 흘렀다.

레그나토르는 전자기기를 충전하는 것마냥

안광이 꺼지고 켜지기만을 반복할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성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흡….”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최대한 평온을 유지하려는 듯했지만,

전혀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세하지만 몸은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렸고,

얼마나 세게 물고 뜯었는지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으니까.

관자놀이와 온몸에는 핏줄이 굵게 돋아났고,

혈류인지 마력인지 모를 것들이 빠르게 흘러 터질 듯 보였다.

한성조차 감내하기 쉬운 고통은 아닌 듯 보였다.

이에 타우한이 놀라 걱정되는 눈으로 한성을 바라보았고,

회복의 술이라도 걸어주려다 털끝도 건드리지 말라는

벨루몬의 엄명이 떠올라 이를 그만두었다.

놀란 것은 한성도 마찬가지였다.

벨루몬의 경고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몸이 나노미터 단위로 잘게 조각나는 느낌이었고,

온몸 마디마디를 얇고 날카로운 칼로 저미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망치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두드려 펴는 게

지금의 고통보다는 덜 아플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고만 있으려니 죽겠군….”

타우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혼(魂)과 혼(魂)의 문제이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벨루몬이라는 전문가(?)가 전면에 나서고 있는 이상,

이 분야에 문외한인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나서봐야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게 뻔했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잘 되길 빌며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후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벨루몬이 중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잘됐소?”

타우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래. 작업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주군의 혼을 조각내는 과정이 조심스러워 시간이 좀 걸렸다.”

“둘의 혼을 분리하는 것은 어땠소.”

“둘의 혼이 하나가 되다시피 해서 떼어내는 데 애를 좀 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뒤는?”

“그 뒤부터는 내가 뭐 딱히 할 게 없었다.

주군의 혼을 가져다 댔더니, 녀석이 알아서 들러붙더군.

아무래도 아네스의 혼이 가진 힘이 점점 쇠약해져 가니

새로운 힘이 될 주군의 혼이 탐이 났던 것이겠지.”

“…다행이구려.”

“아직은… 다행이라 단정 짓기 어렵다.

주군의 힘을 녀석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끝이니까.

녀석의 그릇에 비해 주군의 힘은… 너무나 크고 강대하다.”

“만약…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면요?”

티에라였다.

“…글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군.

주군께서는 늘 내 예측을 벗어나 버리셨으니.”

“…일반적이라는 게 있잖아요.”

티에라가 채근했다.

“…일반적이라… 흠….”

벨루몬이 머리를 긁적였다.

“만약 녀석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면….”

꿀꺽.

칸이 침을 삼켰다.

“레그나토르는 그대로 존재 자체가 소멸하게 될 것이고,

주군은 회복하지 못할 수준의 큰 상처를 얻으시겠지.

최악의 경우 영영 못 일어나시게 될지도 모르고.”

벨루몬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사지가 저리 멀쩡한데. 못 일어난다고?”

칸이 중얼거렸다.

“육체가 문제가 아니다. 혼이 조각나 사라지면

육체는 그저 주인 없는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잘되길 빌어야겠군.”

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잘될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 것이고.

그러려고 내가 반나절이 넘게 치열하게 진을 짰다.”

벨루몬의 시선이 한성과 레그나토르에게 닿았다.

* * *

“…으음….”

밝고 따뜻한 빛에 한성이 잠을 깨듯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본 적 있던 풍경이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고, 낡고 때 타지 않았다는 점이

기억과 약간은 다르지만 분명 일전에 보았던 아네스의 궁이었다.

“오… 깼구만.”

한성이 깨길 기다렸다는 듯

한성의 뒤로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달까.

소리가 들린 곳으로 한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익숙한 자가 있었다.

여섯의 팔, 터질 듯한 근육, 황금빛 머리털과 짙은 두 눈썹.

바로 아네스였다.

그는 화려하게 장식된 왕좌에 앉아,

한성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었군. 레그나토르 녀석의 새로운 친구가.”

“당신은….”

갑자기 펼쳐진 상황에 한성의 눈에는 의심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 상황은.’

“너무 그리 경계하지는 말게. 가짜는 아니니까 말이야.”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는 한성을 보며 아네스가 싱긋 웃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바바라에게 부탁해둔 것이네.”

“…가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자네도 보다시피 나라네. 아네스. 하하하.”

그가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 된 것인지 궁금하겠지. 별거 아니야.

그저 영혼의 조각에 붙어있던 내 의식의 편린(片鱗)일 뿐이니.”

“레그나토르에게 있던 당신의 혼 조각 말입니까?”

“그래. 그렇지. 이해가 빠르군.”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가 어디죠?”

“별거 아니야. 내 의식 속이니까. 후후….

이런 날이 언젠간 오리라 싶어 바바라에게 특별히 부탁해 두었다네.

내 후인이 될 자를, 내 친구의 친구가 될 자를 보고 싶었거든.”

그는 손자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얼굴과 말투로 한성을 대했다.

“…그렇습니까.”

“참으로… 강대한 기운을 지녔구만. 넓고도 깊은 힘이야. 후후….”

“…감사합니다.”

한성을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애초에 죽어 사라졌어야 할 혼이 계속 버티고 있었으니 오죽할까.”

“…혹여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레그나토르에게 전달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든지….”

한성이 물었다.

“아니. 그에게는 이미 충분히 많은 말을 해 두었네.

내가 말을 남기고 싶은 상대는 자네야.”

“…?”

“자네에게 부탁을 좀 하고자 하네.”

“…그게 무엇입니까.”

“레그나토르를… 잘 부탁하네.”

그의 얼굴에 어쩐지 씁쓸함이 감돌았다.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그는 이미 제 동료가 되었고, 또 제 가족이 되었으니까요.”

“그런가. 후후… 다행이군. 그리고 하나가 더 있네.”

“…?”

“그에게 걸린 불사의 저주를 자네가 거두어주게.”

“…그게 무슨 의미시온지.”

“자네가 날 만나러 왔다는 뜻은,

자네가 되었든, 자네의 동료가 되었든

내 혼을 거두어내고 누군가의 혼을 대신한다는 뜻일 걸세.”

“맞습니다. 제 동료 중 하나가 그 작업을 진행 중이고

당신의 자리를 대신해 제 혼의 일부를 그에게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후후. 내 살아생전에도

자네만큼 강한 힘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없어.

자네가 딱 그 적임자 같구만 그래. 후후.”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자네의 힘으로 새로이 삶을 부여받을 걸세.

그러나 나 때와 같이 또다시 불사의 삶을 살아가겠지.

세지도 못할 만큼의 억겁의 세월 동안.”

“….”

“그러니, 그 불쌍한 녀석을 위해

부디 자네가 그 저주의 고리를 끊어주게.

자네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 그의 숨도 다하도록 해주게.

그래서 또다시 그가 외롭지 않게… 그렇게 해주게. 부탁하네.”

아네스가 침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성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왜지?”

아네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그를 대대손손 부려 먹을 작정인가.”

“아뇨. 아닙니다.”

“그럼…?”

“그가 절 주군으로 삼았다고 하나 그의 삶은 오롯이 그의 것입니다.

제가 선택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아네스의 눈동자에 맑은 눈을 한 한성의 모습이 비쳤다.

“…하하하하하하….”

그가 머리를 젖힐 정도로 크게 웃어댔다.

“…레그나토르 녀석… 제대로 된 친구를 만났군….”

한성을 바라보는 아네스의 눈에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럼 한번 물어나 봐주겠나.”

“그런 것이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고맙네. 참으로 고마워.”

“아닙니다.”

“…이제야 마음을 놓고 갈 수 있겠어. 후후….”

선명하던 그의 몸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갈 때가 되었나 보군. 자. 이거 받게.”

핑.

탁.

“…이것은…?”

아네스가 엄지를 튕기자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휙 날아

한성의 손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반지였다.

“그를 잘 부탁한다는 나의 뇌물이자, 작은 성의라네.”

“…감사합니다.”

“어떻게 쓰는지는 레그나토르가 알려 줄 거고,

그리고 가기 전 하나의 선물을 더 주고 갈 걸세.”

“…그게 무슨…?”

“곧 알게 될 게야. 이제 가보게나. 내 후인이여.”

딱.

그가 손가락을 튕겼고, 한성의 의식은 끊어졌다.

* * *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요?!”

“나… 나도 모른다!”

희미하던 타우한과 벨루몬의 고함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의식이 돌아오자 한성은 눈을 떴다.

눈을 뜬 그곳에는 공중으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는

레그나토르의 육체가 보였다.

그의 몸은 덜그럭 소리를 내며 미친 듯 떨리고 있었고,

녹색 안광은 빛나다 못해 형광빛으로 터져 오르고 있었다.

갑주의 관절 마디마디 끝까지 꽉꽉 들어찬

검은 기운들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기세로 커지고 있었다.

한성의 기운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폭주하고 있는 것이리라.

‘뭐지. 꿈이었던 건가.’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했던 그 기억.

약에 취한 듯 아직도 한성은 몽롱했다.

‘음?’

한성은 손에서 이물감이 느껴져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꿈에서 아네스가 자신에게 주었던 반지가 있었다.

‘…꿈이 아니었나….’

“통제가 불가능하다. 위험해. 다 나가!!!!!!!!

타우한 할 수 있는 최대의 방호를 펼쳐라. 어서!!!!”

벨루몬이 레그나토르의 주변에 절대 방어를 수십 겹 펼치며 소리쳤다.

“그럴 필요 없다.”

“…주군?!”

벨루몬의 고함 소리에 한성이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질 테니. 소란 떨지 말도록.”

“허나?!”

“아네스의 마지막 선물이 이것이었나 보군.”

“예…?”

한성의 뜻 모를 중얼거림에 벨루몬이 급히 되물었고,

한성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레그나토르를 바라보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레그나토르의 몸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다.”

한성의 말과 함께 레그나토르의 갑주가

폭탄이라도 터진 듯 부서지고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한성의 앞에

벨루몬과 타우한의 방호 수십 겹들이 겹겹이 쌓였고,

칸이 빠르게 다가와 방패를 크게 펼쳤지만,

예상하던 폭발 등의 일은 없었다.

터져나간 갑주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을 뿐이니까.

단단하기 그지없어 보이던 갑주들이 사라지자,

레그나토르의 본체라 생각되는 흰 빛이 확 하고 타올랐다.

이에 레그나토르에 스며들려던 한성의 기운들이

잠시 잠깐 그 빛에 주춤해 스며들려던 것을 멈추었다.

연무장 전체를 비출 만큼 크고 밝게 타오른 흰 빛이

서서히 그 빛을 잃고 사라져 갈 때쯤, 어디선가 나타난

따뜻하고 밝은 황금빛 기운이 흰 빛에 스며들었다.

‘…저것인가… 아네스가 말한 것이.’

황금의 빛을 바라보는 한성의 눈이 깊었다.

‘부디… 잘 가시오. 아네스.’

한성이 스며드는 황금의 빛을 보며 속으로 빌었다.

그러자 꺼질 듯 희미해져 가던 흰 빛이 커졌고 밝게 타올랐다.

아네스의 마지막 힘이리라.

이에 한성의 기운들이 기다렸다는 듯

흰 빛에게로 스며들어 그를 감싸 안았다.

터져 나오던 흰 빛에 어두운 기운들이 스며들고,

그 빛이 모두 가려지자 어두운 기운들이 모양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어서 와라. 2.0 패치 버전 레그나토르.”

중얼거린 한성의 입가에는 큼지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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