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 * *
“우선 하나씩 정리해야겠군.”
한성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레그나토르.”
[예. 주군.]
레그나토르가 즉시 답했다.
“한 가지만 묻겠다. 신중히 생각해보고 답하도록.”
[말씀하십시오.]
“지금도 나와 함께하겠다는 너의 그 마음은 변함이 없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습니다.]
그의 녹색 안광이 불타올랐다.
“그럼 됐다. 더 이상 내 말에 토를 달지 말도록.”
한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스킬 : 충성(忠誠)의 인장을 시전합니다.]
이에 레그나토르의 안광이 흔들렸다.
자신에게만 들리고 보이는 알림과 알림창 때문이겠지.
[…이것도 주군의…?]
“그래.”
[….]
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확인 버튼을 누르자,
그의 가슴팍에 검은 불꽃 모양의 문양이 새겨졌다.
후우웅.
순간적으로 그에게서 눈부신 녹색 빛이 터져 나왔고,
이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것이… 정녕… 주군의 힘이란 말인가….]
그가 주체 못 할 정도로 솟구치는 힘에 놀라며 중얼거렸다.
주먹을 쥐었다 펴보며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변화를 만끽했다.
온몸 가득 차오르는 힘에 능히 땅과 바다를,
산과 하늘을 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면 전성기 때의 아네스와 겨루어도
그에게 밀리지 않고 휘몰아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저 강한 소년이라 생각했던 그의 힘이
충성의 인장이 새겨지자 분명하고 깨끗하게 느껴졌다.
그 힘은 크고도 깊어 그 정도를 헤아릴 수 없었고,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위엄마저 갖추고 있었다.
도대체 저 소년의 정체가 무엇일까.
‘내가… 저런 자와 대적하려 했단 말인가….’
한성을 바라보는 레그나토르의 눈에는 놀라움만이 가득했다.
[주군 힘의 끝은 도대체가… 어디까지인 것입니까.]
“별거 아니다.”
한성이 손을 휘저으며 중얼거리고는 동료 육성창을 열었다.
“역시나군.”
한성이 그의 스탯을 재분배하려 했건만, 딱히 할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균형 잡혀 있었고,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흠….”
한성은 스킬창을 열어 이번에 새로 얻게 된 충성의 인장을 살폈다.
[스킬 : 충성(忠誠)의 인장.]
· 복속시킨 대상에게 새겨지는 왕의 인장.
· 절대적 충성과 복종으로 이루어지는 영혼의 계약.
· 계약자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왕의 힘.
‘확실히… 모두가 전보다 강해졌다. 이 때문이겠지.’
충성의 인장을 살피던 한성의 눈이
세 번째 옵션에 머물렀다 벨루몬들을 스쳐 지났다.
육성창과 스킬창을 끈 한성이 벨루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벨루몬 너의 두 걱정 중 하나는 사라졌다. 맞나.”
“…그러하옵니다. 허나….”
벨루몬이 머뭇거리며 대답했지만 한성이 말을 잘랐다.
“지금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다.”
한성이 벨루몬의 말을 자르며 말을 하자,
벨루몬들의 눈이 일제히 레그나토르에게 닿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움직임이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해 보이더군.”
‘그 혼잡한 와중에도 모든 것을 살피고 계셨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놀라야 할지….’
레그나토르의 안광이 흔들렸다.
[허나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비록 노쇠한 몸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쓸 만합니다.]
[감당키 어려우니 부디 저에 대한 걱정은 마십시오. 주군.]
레그나토르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오랜 세월을 낡고 닳아버렸으니 몸이 삐걱거릴 거다.
모르긴 해도 전성기 때의 힘에 비해 많이 부족할 거고.
게다가 나와의 일전으로 꽤나 몸이 상했겠지.”
찌그러진 갑주와 갑옷들에 난 상처들을 보며 한성이 중얼거렸다.
“제아무리 아네스의 혼을 바탕으로 태어난
하나뿐인 존재라고 해도 너 역시 영원불멸은 아니다.
다른 존재에 비해 오래 존재할 수 있는 것뿐이지,
필멸자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 정도 상처쯤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 아까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네게 남긴 아네스의 힘이 점점 옅어져 간다는 뜻일 테지.”
[….]
한성의 말에 그는 침묵했다.
확실히 예전과 달리 더뎌진 회복 속도와 몸의 변화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까.
“그렇기에 약해져만 가는 아네스의 혼을
대체할 누군가의 힘이 필요하다 판단했다.”
“허나, 주군. 그것이 반드시 주군의 혼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제게 속한 혼들을 엮어 저자에게….”
벨루몬이 급히 입을 열었으나 한성이 손을 들어 그것을 저지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이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전 괜찮습니다. 주군.]
“아니. 내가 괜찮지 않다.”
“….”
레그나토르를 바라보는 벨루몬의 눈이 어쩐지 매서웠다.
“그는 이제 아네스의 수호기사가 아니라,
나의 가족이며, 나의 동료이고 또 친구가 되었다.
그렇기에 내 혼으로 아네스의 혼을 대신하려는 것이다.”
“….”
“또한, 자만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아네스 정도 되는 자를 대신할 자는… 몇 없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부족하지만 난 나라고 생각한다.”
한성의 얼굴에 진지함이 감돌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군.]
[그의 전성기 시절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레그나토르가 진심을 담아 한성에게 말했다.
“…그거 다행이군.”
한성이 씩 웃으며 답했다.
“허나… 위험부담이 크옵니다. 주군.”
“당연히 위험하겠지. 우선 할 수는 있나.”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할 수는 있습니다. 허나….”
벨루몬이 머뭇거렸다.
“…미천한 제가 혹여나 실수해 주군께서 잘못될까 겁이 나옵니다.”
좌중에 침묵이 찾아왔다.
그의 말에 타우한과 칸은 경악했고, 티에라마저 놀란 듯했다.
그런 발언을 한 존재가 다른 이도 아닌 벨루몬이었으니까.
모든 일에 늘 자신감이 넘치다 자만해 보이기까지 하던 그였고,
재수는 없었지만(?) 늘 기대 이상으로 모든 일을 해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난색을 보였다. 놀랄 법도 했다.
“난 널 믿는다. 벨루몬. 그러니 걱정 마라.”
“허나….”
“소요 시간과, 성공 확률은 어느 정도나 되나.”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며, 성공 확률은 8할 정도이옵니다.”
벨루몬이 담담히 답했다.
[…? 뭐라? 3시간…? 게다가 8할이라고 했나?]
레그나토르가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 그렇다. 아… 그래. 너의 마음은 이해한다.”
레그나토르의 반응에 뭐지? 싶었던
벨루몬이 이제 이해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 3시간이면… 주군의 옥체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고,
2할의 실패 확률 또한 당연히 적은 것이 아니지… 걱정될 법하다.
너의 충은 가상하지만… 내 능력으로는 이것이 최대다.”
벨루몬이 죄스럽다는 말투와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 마도(魔道)의 극에 달한 자라 하더니… 어찌… 바바라보다….’
최고의 주술사라 추앙받던 바바라도 아네스의 혼을 자르고,
이를 레그나토르의 혼과 이어 붙이는 데 사흘 밤낮이 걸렸다 했다.
게다가 성공 확률도 절반이 살짝 넘는 정도라
거의 도박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자신에게 말했거늘….
어찌 저자는 저리 쉽게 말한단 말인가….
과연… 망자의 왕이라는 이명이 부끄럽지 않구나.
서로를 오해하는 벨루몬과 레그나토르였다.
“8할이면, 굉장히 높군.”
한성이 이를 듣고는 담담히 답했다.
“허나 2할의 실패 확률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주군.
그렇다면 주군… 제게 시간을 좀 더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벨루몬이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왜지?”
“시간을 주시면 성공 확률을 올려 보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해내 보이겠습니다. 제게 조금의 시간을 주소서.”
‘대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많은 것들을 봐왔고, 들었던 그였고,
벨루몬들 모두의 수명을 합친 것보다 오랜 산 그였지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화와 일들은 들은 적, 본 적 없었다.
그저 새로운 것을 본 어린아이처럼 멍하니 바라볼 뿐.
“…흠.”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나이다. 주군.
타우한과 함께 준비한다면 1시간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그러니 부디… 제발… 이것만큼은 허락해주소서.”
벨루몬이 간청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그래야지 네 마음이 편하겠다면 뭐… 그렇게 해.”
“바로 준비하겠나이다. 타우한 넌 나를 따라라.”
“알겠소.”
벨루몬이 적장의 목을 벨 것 같은 비장한 표정이 되어
차원의 문을 열었고 타우한 또한 같은 표정으로 그를 따랐다.
멍하니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던 레그나토르가
정신을 퍼뜩 차리고는 한성에게 소리쳤다.
[어찌 신하 된 자에게 주군의 안위를 위협할 일을 하라 하십니까?]
[저는 지금도 괜찮습니다. 주군. 부디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토를 달지 말라 했을 텐데.”
[허나 이는…!?]
“킁. 소용없다. 기사.”
칸이 콧김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뭐라?]
칸을 돌아본 그의 안광이 형형했다.
“킁. 주군은 원래 그렇다. 한다면 하는 이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네놈들은 주군의 가신이라는 자각이 없는 것이냐?]
[제아무리 주군이라 해도, 잘못된 길을 가시면 바로잡아 드려야….]
“잘못된 길이 아니니까요.”
티에라가 입을 열었다.
[뭐라.]
“위험할지언정 잘못된 길이 아니니까요.”
침묵하던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동료를 위해 자신의 뭔가를 내주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요.”
[허나….]
“게다가 군사가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했는걸요 뭐.
군사가 그렇다면 그런 게 맞아요. 그는 틀린 적이 없거든요.”
[…허.]
“기사. 넌 아직 군사의 위대함을 모른다.”
[…뭐?]
“주군과 관련된 일이라면 군사는 무서울 정도로 대단해진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고 말지.
뿐만 아니라 타우한과 함께 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분명 그 둘은 해낼 것이다. 그러니 믿고 기다리도록.”
[….]
레그나토르는 그들의 눈에서 한성의 판단에 대한 믿음과,
벨루몬과 타우한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보았다.
종도, 생김새도 다른 이들 사이에 무언가 끈끈한 게 보였다.
어쩐지 아네스와 바바라, 그리고 자신을 보는 듯했다.
“이야기는 끝났나.”
[…예. 주군.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그럼… 그저 따르겠습니다.]
“그래.”
한성이 만족한 듯 웃으며 답했다.
* * *
벨루몬과 타우한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했지만,
자신을 위하는 그들의 마음이 고맙고 또 미안해 그냥 두었다.
“주군. 완료되었습니다. 성공 확률을 9할까지 올려 두었나이다.”
“무우우… 쉬운 일은 아니었소.”
타우한이 땀을 닦는 척하며 중얼거렸다.
‘9…할…?’
레그나토르의 안광이 또다시 흔들렸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예. 주군. 레그나토르. 네 녀석도 이리로 와라.”
한성에 대한 것과는 달리 레그나토르에 대한
벨루몬의 태도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알겠다.]
제 주군을 생각하는 벨루몬의 마음을 자신도 알았기에
레그나토르는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벨루몬의 지시에 따랐다.
딱.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기자,
연무장의 바닥에 두 개의 마법진이 생겨났다.
마법진에는 복잡한 문양과 알 수 없는 수식,
듣도 보도 못한 글자들이 한가득 쓰여 있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주군께서는 그저 편한 자세로 계시면 되옵니다.
다만 이 진 밖으로 나오시면 아니 되니 주의해 주소서.”
“알겠다.”
“너 또한 마찬가지다. 레그나토르.”
[…알겠다.]
“후우….”
불안한 듯 한숨을 내쉬는 벨루몬의 곁에
타우한이 다가와 웃는 낯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소. 군사. 나와 군사 둘이서 직접 만들고
몇 번을 시험해보고, 또 개량하고 검사하지 않았소.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오. 무후후. 걱정하지 마시오.”
“…그래. 그래야 할 것이다.”
벨루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벨루몬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