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 * *
철컥.
[신(臣) 레그나토르가 주군께 인사드립니다.]
레그나토르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중얼거렸다.
그 자세가 꽤나 경건해 보였다.
[주군께서는 시험에 당당히 통과하셨고,]
[왕이 될 자격을 오롯이, 온전히 갖추셨으며.]
[왕으로서의 그릇과 본인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이에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을 제 주군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부디 이를 허락해주시길 진실로 간청드립니다.]
한성에 대한 레그나토르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음성은 부드러워져 있었으며, 태도는 신중하고 기품 있어졌다.
한성을 인정했다는 뜻이리라.
“….”
그러나 기뻐하며 흐뭇해하고 있어야 할
한성의 얼굴은 딱히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얼굴이었으니까.
“그것은 너의 의지냐. 아니면… 그의 의지냐.”
한성이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온지?]
“날 주군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온전한 너의 의지인지를 물었다.”
[…미천한 저로서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네스의 전언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날 네놈의 주군으로 삼는 것은 아니냐는 말이다.”
흠칫.
레그나토르의 어깨가 떨렸고 그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맞나 보군. 그런 것이라면 그만둬라.”
[…?!]
한성의 말에 레그나토르가 놀라 숙였던 고개를 쳐들었다.
“난 네가 아네스의 말과 명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난 과거를 잊고 나아가고자 날 선택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아네스가 너에게 바라는 모습이었겠지.”
레그나토르의 안광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렇기에 확인차, 네게 물은 것이다. 너의 의지냐고.”
[….]
“그러나 넌 멍청하게도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군.”
한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네스가 너에게 남긴 그 몇 조각의 말 때문에,
날 주군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라면 부디 그러지 마라.”
[….]
“그리고 이제 그만해라.”
[…무엇을 말씀입니까.]
“표식도, 전언도 그저 죽은 이가 남기고 간 것일 뿐이다.
그따위 것에 얽매여서 너의 삶을 함부로 낭비하지 마라.”
[그따위 것이 아닙니다!!]
레그나토르가 소리쳤다.
“…한심하군.”
[….]
“죽은 이의 말과 기억에 허우적대느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산 자의 삶이라….”
콰득….
한성의 이죽거림에 레그나토르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난 동료이자 가족이 될 자를 찾는 것이지,
명령만을 맹목적으로 좇는 꼭두각시를 찾는 게 아니다.”
[….]
“또한 나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자를 찾는 것이지,
과거에 발목 잡혀, 끝없이 침전하는 못난 자를 찾는 게 아니다.”
‘아… 어쩌면… 이분은….’
레그나토르의 안광이 명멸을 반복했다.
“그러니 그저 네 주인이었던 자의 명을 완수하기 위해
날 주군으로 모시려는 것이라면… 오히려 내가 널 거부하겠다.”
한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한 말과 아네스가 남긴 그 말이
무슨 의미일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또 고민해라.
아둔한 네놈이라도 이 정도까지 말해주었으면 알겠지.”
한성이 등을 돌렸다.
“죽은 이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징징거리다 한 줌 먼지가 될지
아니면 나라는 기회를 잡고 새로운 삶을 살 것인지는 네가 정해라.”
[….]
“네놈이 준비되었다 싶으면… 그때 다시 찾아오겠다.
다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한성은 그대로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잠깐….]
레그나토르가 한성을 불러 세웠다.
“뭐지?”
[잠깐만…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주군.]
“…?”
레그나토르가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오래 기다리지는 않겠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래.”
‘뭐지?’
철컥.
레그나토르가 천천히 성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성안의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기 시작했다.
마치 먼 길을 떠나기 전의 사람처럼.
철컥… 철컥….
그가 걸음을 멈춘 것은 왕좌의 앞이었다.
그는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아네스의 표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표식을 소중히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네스 님….]
[…이제 그만 가려 합니다.]
그의 음성은 그의 손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저는… 당신이 눈을 감으시는 그날부터….]
[죽은 당신께 투정과 어리광을 부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게 새로운 삶과 기회를 주신 당신은 제 아비이자 어미셨기에….]
낮고 묵직한 그의 목소리가 성안을 잔잔히 울렸다.
[또한 언젠가는 당신을 떠나가야 함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이제껏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물기가 어려 있었다.
기분 탓일까.
[…그런데 당신과 닮은 이를 하나 만났습니다.]
[생긴 것은 다를지언정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이 다 당신을 조금씩 닮아 있었습니다.]
왜인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 보였다.
[그리고 그를 보는 순간, 전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가 멍청하고 어리숙한 절 이끌어줄지 모르겠다고.]
[또… 남은 제 삶을 가치 있게 살아낼 수 있도록 해줄 것 같다고.]
한성을 떠올리며 레그나토르가 중얼거렸다.
[허나 당신처럼 왕으로서의 위엄과 품격을 갖추진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더욱 막무가내이며, 더욱 파격적인 이였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옆에서 가르쳐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하….]
그의 안광에서 불똥이 튀어 올라 내렸다.
눈물인 것일까.
[게다가 당신에게 혼났던 것처럼… 그에게도 혼이 났습니다.]
[당신이 제게 하시던 말씀을 그대로 하고 있더군요.]
[어쩐지 그 꾸지람이… 전… 싫지 않았습니다. 하하….]
힘없는 그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그래서… 전 그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그가 당신을 닮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부탁이자 명을 이루기 위해 그를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힘이 담겨 있었다.
[당신께서 제게 바라셨던 것처럼….]
[제 의지로, 제 이름으로 된 제 삶을 한번 살아보려 합니다.]
[그가 제게 말했던… 동료, 가족… 그리고 가신이 되어.]
[그가 왕이 되는 길을 바라보고 그의 앞길을 살펴주고자 합니다.]
탁.
레그나토르가 표식을 왕좌에 조심스레 올려 두었다.
[그렇기에…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의 안광이 타올랐다.
[…그러니 당신께서도 더 이상 제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부디… 다시 뵈올 그날까지 강녕(康寧)하십시오.]
[감사드립니다… 제 주군이었고, 어버이였고, 친구였던 분이시여.]
쿵.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하고 공손한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은 레그나토르가 왕좌에 기사의 예를 보였다.
그의 투구에서 파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녹색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펄럭.
망토를 휘날리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은 결연했으며,
미련이나 상념과 같은 감정과 기억의 찌꺼기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용이 둥지에서 떠나기로 한 것이리라.
* * *
“오셨다.”
벨루몬이 읽던 마법서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후웅.
벨루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게이트의 저편에서 한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함께 왔어야 할 레그나토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된 것일까.
“다녀왔어.”
“오셨습니까. 주군.”
벨루몬이 가장 먼저 인사해 왔다.
“레그나토르는 회유에 실패한 것입니까?”
벨루몬이 안경을 내리며 한성에게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
타우한이 인사도 하기 전에 다가와
한성의 몸 상태를 점검하려 손을 들어 올렸다.
스릉.
[주군의 몸에서 그 손을 치워라. 타우렌.]
한성의 그림자에 녹아 있던 레그나토르가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언제 빼 들었는지 파랗게 날 선 검을 타우한의 목에 겨누었다.
그 속도는 채 1초가 되지 않았고,
한성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타우한의 목을 쳐낼 듯한 살벌한 기세였다.
“….”
주륵.
그새 베었는지 타우한의 목에서 피가 한 방울 흘러 내렸고,
그는 상당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거늘….’
벨루몬조차 놀란 표정이었다.
“하아… 그만.”
한성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척.
[예.]
한성의 말 한마디에 그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는 내 신의(神醫)다. 너의 동료가 될 자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이곳에 있는 모든 자들이 너의 동료다.
그러니 함부로 적대하거나 검을 꺼내 들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레그나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레그나토르가 즉각적으로 사과를 했고,
타우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제 목이 떨어질 뻔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자, 모두 나와 인사 나눠. 동료가 될 레그나토르야.”
[잘 부탁한다. 레그나토르다.]
그가 녹색 안광을 불태우며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잘 부탁드려요. 레그나토르. 전 티에라예요.”
[…세계수의 수호자…?]
티에라가 웃으며 손을 내밀자,
그가 손을 잡으며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그것도 옛말이죠. 후후. 지금은 주군의 사수랍니다.”
“잘 부탁한다. 난 칸이다.”
레그나토르와 키나 덩치가 가장 유사한
칸 또한 웃으며 레그나토르에게 인사를 해 왔다.
[동부의 지배자 하이 오크 대족장….]
“흠흠… 뭐 첫인상이 딱히 좋지는 않았으나,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하오. 난 타우한이오. 잘 부탁드리지.”
[토템으로 만물을 다스린다는… 타우렌의 대주술사….]
“벨루몬이다. 일전에 본 적이 있지.”
[…망자의 왕… 서쪽 피 무덤의 지배자.]
“…뭐 그 이명을 버린 지는 꽤 됐다만 그렇다.”
[…도대체 주군은 어디까지 절 놀라게 할 생각이십니까?]
[아네스 님조차도 이 정도 되는 이들을 가신으로 맞지 못했거늘….]
레그나토르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아네스 따위와 비교하지 마라.
주군께서는 세상 모든 것들을 아래에 두실 위대한 분이시니.”
벨루몬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말조심해라. 벨루몬. 그에게 있어 아네스는 소중한 이다.”
“명심하겠나이다.”
한성이 선수를 쳐 벨루몬에게 주의를 주었다.
레그나토르는 움찔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주군은 한성이지 아네스가 아니었기에.
[주군. 이들에게서 주군의 힘이 느껴집니다.]
[이것도 주군께서 가지신 힘의 일부이옵니까?]
레그나토르가 한성을 보며 물었다.
“내 힘이자, 내 동료라는 표시다. 너에게도 주어질 것이고.”
[…?]
이해할 수 없는 한성의 말에 레그나토르의 안광이 커졌다.
“그 전에 벨루몬.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그저 하명하소서.”
“레그나토르에게 새겨진 아네스의 혼을 지워내고
내 것으로 그것을 대체하고자 한다. 할 수 있겠나?”
[…?!]
“그것은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주군!!!!”
벨루몬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혼을 조각내고 나누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당사자에게 막대한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는 일일뿐더러,
만에 하나라도 실수했다간, 주군의 혼 전체가 망가질 것입니다.”
벨루몬이 단호히 소리쳤다.
[주군. 저 또한 그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맞소. 주군. 위험부담이 너무 크오.”
레그나토르와 타우한도 반대하고 나섰다.
칸과 티에라는 추이를 지켜볼 계획인 듯
그저 조용히 이들의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충성의 인도 새겨져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만약 힘을 얻은 그가 변심하여 주군을 해하려 한다면
저희는 너무나 허무하게 주군을 잃게 됩니다.
물론, 제가 이를 좌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이는 여러모로 위험부담이 상당히 큰 사항입니다. 주군.”
벨루몬이 레그나토르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입 조심해라. 리치. 기사는 제 주군을 해하지 않는다.]
불쾌하다는 듯이 레그나토르가 으르렁거렸다.
“닥쳐라. 기사도 따위 내가 알 바 아니니.
네놈 따위의 명예니 뭐니 하는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주군의 목숨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건방지기 짝이 없군. 사령의 기사여. 주제를 알아라.”
레그나토르와 벨루몬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후우… 그만.”
한숨을 내쉰 한성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