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 *
“이봐.”
자신을 부르는 한성의 말에
기억을 더듬던 레그나토르가 현실로 돌아왔다.
[…미안하군.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레그나토르의 말에는 어쩐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괜찮나.”
전과 다른 그의 모습에 한성이 물었다.
레그나토르는 답 없이 한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모멸적이고 모진 말들만 한 자신에게
괜찮냐 물어오는 저 청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확실히… 닮았군.]
한참의 침묵 끝 레그나토르가 입을 열었다.
“뭐가.”
[검을 들어라.]
“음?”
[아까도 말했듯, 내게 뭔가 말하고 싶거든.]
[적어도 날 이기고 난 뒤에 해라. 그것이 승자의 권리니.]
철컥.
레그나토르가 검을 들어 올렸다.
‘뭐지.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혹여라도….]
“…?”
[혹여라도 네가 나와 싸워 이긴다면….]
[그땐… 네가 왕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겠다.]
한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먹혔나.’
“좋아.”
[온 힘을 다해 덤벼라.]
[나도 온 힘을 다해 상대해 줄 테니.]
“온 힘을 다하라… 흠… 그러고 싶지만,
내 힘은 기사의 자긍심과는 거리가 먼 사술일 텐데.”
[네놈이 직접 말하지 않았나. 네놈은 기사가 아니라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일 뿐이라고.]
[그럼, 발버둥 쳐라. 그리고 내게 보여라.]
[네놈이 가고자 하는 길을.]
“…고지식하다 들었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군.”
한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덤벼라.]
“그러지.”
한성이 단검을 역수로 잡아 쥐며 중얼거렸다.
“소화.”
[노래하는 자의 상태가 활성화됩니다.]
[대상 ‘이한성’의 공격력과 공격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 * *
“10분 휴식.”
“헉… 헉… 헉….”
The Last Emperor의 연무장,
오늘도 길드장들은 벨루몬들의 훈련을 받고 있었다.
가장 체력이 강한 선우와 성용이 널브러질 정도니,
마법 계열에 속하는 나머지 길드장들이야 말해 뭐 할까.
“군사. 주군은 어디 가셨소.”
타우한이 벨루몬에게 다가가 물었다.
“레그나토르를 회유하러 가셨다.”
마법서를 읽고 있던 벨루몬이 안경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오. 그자를?”
“그래.”
놀란 표정의 타우한을 보며 칸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자가 누군데 그러는 건가.”
사악
“초대 마신의 호위 기사를 말하는 거예요.”
벨루몬의 공간 이동이 익숙해졌는지
티에라가 일그러진 공간에서 나오며 대신 답해주었다.
“수고했다. 티에라.”
“별말씀을.”
벨루몬이 중얼거렸다.
후우웅.
티에라의 곁으로 황금색의 빛무리가 떠다니더니 이내 사라졌다.
“고마워요. 타우한.”
“별거 아니오. 다친 곳도 없고. 후후.”
“별 어려움은 없었나.”
“이 정도에 힘들 리가요. 후후.
군사께서 호위를 붙여주셨으니 더욱 쉬웠죠.”
길드장들을 훈련시키느라 바쁜 벨루몬들을 대신해,
티에라는 자진해서 길드에 배당된 게이트들을 제거하러 다녔다.
할 일이 없어 심심하기도 했거니와,
몸이 굳을 것 같다며 뭐라도 해야겠다 말해서였다.
E급부터 시작해 A급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그녀는 가리는 게이트도, 공략하지 못하는 게이트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대로 벨루몬이 자신의 데스나이트들 중
믿을 만한 몇 녀석을 호위로 붙여주었기에 공략은 더욱 쉬웠다.
덕분에 공방에는 사체와 마력석으로 한가득이었고,
Last Emperor에는 무구와 방어구들이 계속 조달되었다.
“호위 기사? 그래 봐야 칼 든 전사 나부랭이 아닌가.
충성이니 기사도니 지껄여도 막상 칼을 대보면 별거 없더군.”
칸이 지난날들을 떠올리고는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쯧… 멍청한 오크 녀석. 그는 보통 호위 기사가 아니다.”
벨루몬이 마법서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음? 뭐가 다른가.”
“그는 본디 마물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마물이다.
데스나이트에 혼 조각을 덧붙여 만들어진 하나뿐인 존재지.
그것도 역사상 가장 강한 마물이라 칭송받던 자의 혼을.”
“…설마?”
“그래. 아네스의 혼 조각을 덧붙여 만들어졌다.”
“…그… 투신 아네스의?”
칸의 눈이 커졌다.
“그래. 그렇다. 난 레그나토르와 만난 적이 있다.
싸워 본 것은 아니나, 왕궁을 지나는 길에 마주쳤지.”
“…그래서?”
“내 기운을 감지하고는 내가 적인지 알고 뛰쳐나왔더군.”
“하긴… 군사의 기운이 워낙 흉흉하니….
마기에 미쳐버린 마물들과 다를 바 없긴 하지.”
타우한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떠했는가.”
“지금의 주군과 비슷할 정도더군.”
“…미친.”
“어디까지나 느껴지는 기운만 그렇다는 것이다.
전력을 다하면 제깟 놈이 주군을 이기기야 하겠냐만은,
제아무리 주군이라 하시더라도 쉬이 그를 이기시진 못할 게야.”
“…군사의 말이 그러하다면 그렇겠지.”
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나.”
벨루몬의 말에서 뭔가 웃음이 느껴졌다.
“음…?”
“그를 무장해제 시킬 비장의 무기를 주군께 들려서 보냈다.
조만간 아주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실 게야. 후후후.”
벨루몬의 안광이 빛났다.
“…비장의 무기?”
“그래. 힘이 아니라 마음을 꺾을 무기지.
제 주인을 잃은 기사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 무기.”
꿀꺽.
“그게 무엇인가.”
“바로 주군 그 자체다.”
“…그게 무슨 말이오?”
타우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우선적으로, 나도 전해 들은 얘기다만….
아네스의 성품이 주군과 상당히 닮은 것 같더군.”
“…그게 무슨 상관이오?”
“쯧. 멍청한 녀석. 생각해 보도록. 그는 고지식하고 충직한 기사다.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을 제 주인을 기다릴 정도로.”
“…그런데요?”
티에라가 물었다.
“그런 그의 앞에 제 주인과 닮은 자가 나타났다 생각해 봐라.
게다가 그자는 세계수로부터 제 주인의 후인이라 인정까지 받았고,
제 주인이 가지고 있었어야 할 물건을 가지고 있기까지 하다.
또, 잊고 있었던 제 주인의 전언을 전해주기까지 했다.
과연 그 기사의 마음이 어떨 것 같나?”
“…모르긴 해도 크게 흔들릴 거요.”
타우한이 중얼거렸다.
“그래. 흔들릴 거다. 그런데 말이다.
그가 제 주군의 후인 자격을 갖춘 것뿐 아니라,
왕이란 이름에 걸맞은 무력과 능력, 품성까지 갖추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 같나.”
“…많이 흔들리겠죠.”
티에라가 답했다.
“후후후. 그렇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의 마음을 자극할 수 있는 몇 마디의 말과
칸을 속일 때처럼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연기를 더한다면…?”
“껌뻑 죽겠지.”
칸이 대답했다.
딱.
“그거다.”
손가락을 튕긴 벨루몬이 다시 안경을 올리고는 마법서를 펼쳤다.
벨루몬을 바라보던 타우한이 팔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소름 돋는구려. 어째 군사는 점점 더 주군을 닮아가오?
주군에게 어울리는 군사가 되려 열심히 노력하는 건 알지만….
이런 면까지 닮거나 배우지는 마시오. 소름 끼치오. 진심으로.”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후후….”
“지금쯤 뭐 하고 계실까요 주군은…?”
티에라가 중얼거렸다.
“슬슬 결판을 내고 계실 게다. 후후후….”
벨루몬의 안광이 빛났다.
* * *
쾅!!!!!!!!
[……크윽….]
둔기로 내려치는 듯한 충격에 레그나토르가 침음을 흘렸다.
레그나토르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녹이 슬어 있던 방어구의 일부는 충격에 부서져 내렸고,
단단해 보이던 갑주에는 수없이 많은 상처가 가득했다.
날카로운 것에 잘려 나간 흔적과
철갑임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찢겨져 나간 흔적,
선명한 주먹 모양의 흔적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쾅 쾅!!!!!!!
내리치고 찔러 들어오는 한성의 단검을
레그나토르가 힘겹게, 그리고 간신히 막아냈다.
이 정도의 힘을 거뜬히 버텨내는 단검도 신기했지만,
그것보다 더욱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단검의 주인이었다.
‘빌어먹을… 무슨 힘이….’
그가 한 번 후려칠 때마다 온몸이 흔들리고 팔이 뻐근했다.
성을 가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검을 때렸음에도,
그 충격에 성의 외벽과 망루가 부서져 내렸고,
이제는 본성의 차창마저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공격은 한 번 한 번이 매섭고 날카로웠다.
잠시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간 목이 달아날 정도였고,
예상치 못한 변칙적인 공격과 기형적으로 꺾여 들어오는
그의 공격을 막아내며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게다가 그의 변화는 완력의 증가만이 다가 아니었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증가된 속도까지 더해져 있었다.
방어를 하는 것도 그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막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단검의 번뜩거림과, 순간적 살기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빌어먹을. 꼼짝도 할 수 없군.’
레그나토르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긴장했다고…? 이 몸이 저 애송이에게?’
평소와 다른 몸의 변화에 그의 안광이 크게 흔들렸다.
오랜 세월을 전장에 살다시피 한 그였다.
수없이 많은 마물들을 만났고, 수없이 많은 전투를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지금처럼 긴장을 느껴본 적 없던 그였다.
그저 제 주인을 위해 무감각하게
눈앞의 마물을 그저 베고 또 벴을 뿐.
가끔 제 주인과 대련을 할 때,
이따금씩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공격에
식은땀을 흘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긴장하지는 않았다.
제 주인이 전력을 다해도 될 만큼 그는 강인했으니까.
이 모든 것은 한성이 가진 특수성 때문이며,
육체적 능력으로만 따지면 한성은 아네스보다 한참 부족하겠지만,
지금의 레그나토르에게는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칼을 휘둘러 자신에게 닥쳐오는 공격을 막아낼 뿐.
눈앞의 소년은 그런 무지막지한 힘과 속력을 내고서도
제 전력은 이게 다가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웃기까지 했다.
그의 끝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방금 전만 해도 분명 눈앞의 조그마한 생명체는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해 힘겨워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되려 자신이 힘겨워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시 한번 기사의 맹세나 검기를 사용하려 해도,
아까 보았던 포식이라 불린 존재가 신경 쓰였다.
잘못했다간 자신의 힘이 오롯이
한성에게로 돌아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어느 쪽으로든 자신이 이길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이 그런 의미였나.’
한성의 말을 기억해낸 레그나토르가 검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패색이 짙다 생각했던 그때.
쾅!!!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던
한성이 순식간에 레그나토르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런…?!’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한성의 주먹이
레그나토르의 안면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피할 수 없다.’
다가오는 주먹에 레그나토르의 사고가 멎었다.
‘…이건… 위험해.’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본능이 위험하다 고함을 지르며 레그나토르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치게 될 충격을 대비하려 검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가 검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한성의 주먹이 먼저 레그나토르의 안면 근처에 도달했다.
‘늦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바로 눈앞에서 한성의 주먹이 멎었으니까.
푸화아아아악.
쾅!!!!!!!!
주먹이 닿은 것이 아님에도 거칠게 인 풍압에
레그나토르의 투구가 크게 짓이겨지며 덜덜 떨렸고,
그의 뒤에 있던 외벽과 망루가 박살 나 성 밖으로 터져 나갔다.
투둑… 툭… 툭….
얼마 후. 몇몇 돌덩어리들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
“후우.”
한성이 숨을 내쉬고는 뻗었던 주먹을 거두어들였다.
카각….
레그나토르의 손에 있던 검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박혔다.
[…왜 끝내지 않았나.]
레그나토르가 한성을 보며 물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었으니까.”
[….]
레그나토르의 안광이 흔들렸다.
“대단하군. 기사단장이라는 직책이 조금도 아깝지 않아.
벨루몬 녀석들이었다면 4초면 충분했을 텐데. 하하.
뭐… 그들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아니다… 충성의 인장 때문에 지금은 힘드려나.”
한성이 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더 해 보겠어?”
[아니. 몇 번을 한들…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 같군.]
[내가… 졌다. 너의 승리이며 시험은… 끝났다.]
“인정해줘서 고맙군.”
한성이 씩 웃으며 답했다.